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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na Maharshi

Spiritual Instruction / 마히리시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5.04|조회수158 목록 댓글 1

Spiritual Instruction / 마히리시

영적인 가르침 (Spiritual Instruction)


가장 초기의 헌신자 중 한 사람인 스리 나따나난다는 어느 날 바가반과 그의 헌신자 몇 사람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받아 적었다. 우리가 그때 그의 노트를 정리하고 확장해서 그것을 바가반께 보여드렸더니, 당신은 그것을 점검해 주셨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우빠데샤 만자리(Upadesa Manjari), 즉 영적인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BLESSINGS

<기원문>

 

I seek refuge at the sacred feet of the blessed Ramana, who performs the

entire work of creation, preservation and destruction, while remaining

wholly unattached, and who makes us aware of what is real and thus protects us, that I may set down his words fittingly.

 

저는 복되신 라마나의 신성한 발에 귀의하오니, 당신께서는 창조, 보존, 파괴의 전체 과업을 수행하시면서도 전혀 집착이 없으시며, 저희들로 하여금 무엇이 실재하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저희들을 보호 하시나니, 이에 저는 당신의 말씀을 적절하게 적어둡니다.

 

IMPORTANCE OF THE WORK

<이 저작의 중요성>

 

Worshipping with the instruments (of thought, word and body) the sacred lotus feet of Bhagavan Sri Ramana Maharshi, the very embodiment of the beginningless infinite supreme Brahman, the Satchitananda (existence, consciousness, bliss), I have gathered this bouquet of the flowers of his instructions (upadesamanjari) for the benefit of those who are foremost among the seekers of Liberation and who are adored by learned persons, in order that they might adorn themselves with it and attain salvation.

 

시작 없고 부분 없는 슈리 삿찌다난다[존재-의식-지복] 빠라브라만(지고의 브라만)의 화신이신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르쉬의 신성한 연꽃 발에,

세 가지 도구로써 경배 드리오니, 해탈을 구하는 자들 중에서도 으뜸가며

학식 있는 이들로부터 숭앙받는 그런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의 꽃다발’을 모았거니와, 이는 그들이 이 꽃다발로 스스로를

장식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This book is an epitome of the immortal words of that great soul,

Sri Ramana Maharshi, whose teachings entirely dispelled the doubts and wrong notions of this humble person even as the sun dispels darkness.

 

이 책은 저 위대하신 영혼, 슈리 라마나 마하르쉬의 불멸의 가르침의 한 요약이니, 당신의 가르침은 마치 해가 어둠을 몰아내듯, 이 비천한 사람의 의심과 그릇된 관념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었습니다.

 

he subject of this book is that eternal Brahman which shines as the pinnacle and heart of all the Vedas and Agamas.

 

모든 베다와 아가마의 꼭대기요 심장으로서 빛나는 저 영원한 브라만이,

이 저작의 주체입니다.

That incomparable Self-realization (atmasiddhi) which is praised by all

the Upanisads and which is the supreme good to be sought by all noble

aspirants (brahmavids) is the theme of this work.

 

모든 우빠니샤드가 찬양하고 모든 고귀한 구도자들이 추구하는 지고의 선인 저 비할 바 없는 진아 깨달음이, 이 저작의 주제입니다.


『라마나 마하르쉬 저작전집』중에서(대성스님 번역 / 자료제공 : 탐구사)

CHAPTER 1

INSTRUCTION

 

제1장 가르침(Upadesa)


1.

What are the marks of a real teacher (Sadguru)?

 

참스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Steady abidance in the Self, looking at all with an equal eye, unshakeable courage at all times, in all places and circumstances, etc.

 

진아 안에 항상 안주하며, 언제,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써 일체를 평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2.

What are the marks of an earnest disciple (sadsisya)?

 

참제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An intense longing for the removal of sorrow and attainment of joy and an intense aversion for all kinds of mundane pleasure.

 

불행을 소멸하고 행복을 성취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온갖 세속적 쾌락을 단호히 멀리하는 것입니다.

3.

What are the characteristics of instruction (upadesa)?

 

우빠데샤(upadesa-가르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The word ‘upadesa’ means : ‘near the place or seat’ (upa- near, desa- place or seat).

The Guru who is the embodiment of that which is indicated by the terms sat, chit, and ananda (existence, consciousness and bliss), prevents the disciple who, on account of his acceptance of the forms of the objects of the senses, has swerved from his true state and is consequently distressed and buffeted by joys and sorrows, from continuing so and establishes him in his own real nature without differentiation.

 

‘우빠데샤’란 말은 ‘가까운 곳(장소)’[upa-가까움, dsa-장소]이라는 뜻입니다. 상(sat), 식(chit), 락(nanda)[존재, 의식, 지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의 화현인 스승은, (가까이 있는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줌으로써) 제자가 감각 대상들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자신의 참된 성품에서 벗어나 기쁨과 슬픔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 당하고 농락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하고, 그를 아무 차별상 없이 자기 자신의 참된 성품 안에 뿌리내리게 합니다.

 

Upadesa also means showing a distant object quite near. It is brought home to the disciple that the Brahman which he believes to be distant and different from himself is near and not different from himself.

 

‘우빠데샤’는 또한 멀리 있는 대상을 아주 가깝게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는, (자기와)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자신과는 별개라고 믿어 온 브라만이, 자기 가까이 있으며 그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납득하게 됩니다.

 

4.

If it be true that the Guru is one’s own Self (atman), what is the principle underlying the doctrine which says that, however learned a disciple may be or whatever occult powers he may possess, he cannot attain self-realization (atma-siddhi) without the grace of the Guru?

 

스승이 바로 자신의 진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자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 해도 스승의 은총 없이는 진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는 가르침의 본뜻은 무엇입니까?

 

Although in absolute truth the state of the Guru is that of oneself it is very hard for the Self which has become the individual soul (jiva ) through ignorance to realize its true state or nature without the grace of the Guru.

 

All mental concepts are controlled by the mere presence of the real Guru. If he were to say to one who arrogantly claims that he has seen the further shore of the ocean of learning or one who claims arrogantly that he can perform deeds which are well-nigh impossible, “Yes, you learnt all that is to be learnt, but have you learnt (to know) yourself? And you who are capable of performing deeds which are almost impossible, have you seen yourself?”, they will bow their heads (in shame) and remain silent.

 

Thus it is evident that only by the grace of the Guru and by no other accomplishment is it possible to know oneself

 

절대적 진리 안에서는 스승의 상태가 자기 자신의 상태이지만, 무지 때문에 개아個我가 되어버린 자아는, 스승의 은총 없이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 또는 성품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참스승의 친존親存에 있기만 해도 모든 정신적 개념들은 제어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배움의 바다 저쪽 언덕을 보았다거나 혹은 누구도 거의 할 수 없는 행위들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오만하게 주장할 때, 만약 스승이 그런 사람에게, “좋습니다. 그대는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법을) 배웠습니까? 그리고 그대는 거의 불가능한 행위들을 할 수 있다지만, 그대 자신은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면,

그들은 (부끄러워서)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떠한 성취에 의해서도 불가능하고,

오직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

What are the marks of the Guru’s grace?

 

스승의 은총(anugraha)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It is beyond words or thoughts.

 

그것은 말과 생각을 넘어서 있습니다.

 

6.

If that is so, how is it that it is said that the disciple realizes his true state by the Guru’s

grace?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은총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It is like the elephant which wakes up on seeing a lion in its dream. Even as the elephant wakes up at the mere sight of the lion, so too is it certain that the disciple wakes up from the sleep of ignorance into the wakefulness of true knowledge through the Guru’s benevolent look of grace.

 

그것은 마치 코끼리가 꿈속에서 사자를 보고 (놀라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가 사자를 보자마자 깨어날 수 있듯이, 제자도 스승의 자비로운 은총의 눈길에 의해서 무지의 잠으로부터 진지의 각성 상태로 깨어날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7.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saying that the nature of the real Guru is that of the Supreme

Lord (Sarvesvara)?

 

지고의 주(Sarvesvara)의 성품이 곧 참스승의 성품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In the case of the individual soul which desires to attain the state of true knowledge or the state of Godhood (Isvara) and with that object always practises devotion, when the individual’s devotion has reached a mature stage, the Lord who is the witness of that individual soul and identical with it, comes forth in human form with the help of sat-chit-ananda, His three natural features, and form and name which he also graciously assumes, and in the guise of blessing the disciple, absorbs him in Himself. According to this doctrine the Guru can truly be called the Lord.

 

진지眞智의 상태 또는 주(Isvara)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아個我는 부단히 헌신을 수행합니다. 그의 헌신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 개아個我를 지켜보아 온 자(주시자)이면서 또한 그와 동일한,

지고의 주主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세 가지 본질적 속성인 존재-의식-지복의 도움하에, 형상과 이름까지 우아하게 갖추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를 축복하는 듯이 하면서 그를 자신의 안으로 흡수합니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스승은 진정 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8.

How then did some great persons attain knowledge without a Guru?

 

그러면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스승 없이 진지眞智를 성취했습니까?

 

To a few mature persons the Lord shines as the light of knowledge and imparts awareness of the truth.

 

소수의 성숙된 사람들에게는 주主가 형상 없는 지의 빛으로 나타나서 진리의 자각을 전해줍니다.

 

9.

What is the end of devotion (bhakti) and the path of Siddhanta (i.e., Saiva Siddhanta)?

 

헌신 혹은 싯단따(Siddhnta)[즉, 샤이바 싯단따]의 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It is to learn the truth that all one’s actions performed with unselfish devotion, with the aid of the three purified instruments (body, speech and mind), in the capacity of the servant of the Lord, become the Lord’s actions, and to stand forth free from the sense of ‘I’ and ‘mine’. This is also the truth of what the Saiva-Siddhantins call para-bhakti (supreme devotion) or living in the service of God (irai-pani-nittral).

 

그것은 정화된 세 가지 도구[몸, 말 그리고 마음]를 가지고 신의 종으로서, 사심 없는 헌신의 마음으로 하는 모든 사람의 행위는 신의 행위가 되며, ‘나’와 ‘내 것’이라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뚝 선다는 진리를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샤이바 싯단따파의 사람들이 지고의 헌신 혹은 ‘신에 봉사하는 삶’이라고 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10.

What is the end of the path of knowledge (jnana) or Vedanta?

 

지 혹은 베단따(Vdnta)의 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It is to know the truth that the ‘I’ is not different from the Lord (Isvara) and to be free from the feeling of being the doer (kartrtva, ahamkara).

 

그것은 ‘나’가 주[이슈와라(Isvara)]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알고, 행위자 관념[아상我相]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11.

How can it be said that the end of both these paths is the same?

 

이러한 두 길의 목적이 동일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Whatever the means, the destruction of the sense ‘I’ and ‘mine’ is the goal, and as these are interdependent, the destruction of either of them causes the destruction of the other; therefore in order to achieve that state of Silence which is beyond thought and word, either the path of knowledge which removes the sense of ‘I’ or the path of devotion which removes the sense of ‘mine’, will suffice. So there is no doubt that the end of the paths of devotion and knowledge is one and the same.

 

어떤 수단으로든 아상我相과 아소상[我所相 ‘나’라는 느낌과 ‘내 것’이라는 느낌]을 소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이 두 가지는 상호 의존적이므로 어느 하나를 소멸해도 다른 하나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과 말을 넘어서 있는 그 침묵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느낌을 제거하는 지(앎)의 길이나, ‘내 것’이라는 느낌을 제거하는 헌신의 길중의 어느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헌신과 지의 길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NOTE:

So long as the ‘I’ exists it is necessary to accept the Lord also.

If any one wishes to regain easily the supreme state of identity (sayujya) now lost to him, it is only proper that he should accept this conclusion.

 

*주 : ‘나’가 존속하는 한 주主(Lord)를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만약 누구든지 지금은 자기가 잃어버린 지고의 동일성의 상태(신과의 합일 상태)를 쉽게 되찾고 싶다면,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12.

What is the mark of the ego?

 

아만我慢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The individual soul of the form of ‘I’ is the ego The Self which is of the nature of intelligence (chit) has no sense of ‘I’. Nor does the insentient body possess a sense of ‘I’. The mysterious appearance of a delusive ego between the intelligent and the insentient, being the root cause of all these troubles, upon its destruction by whatever means, that which really exists will be seen as it is. This is called Liberation (moksha).

 

‘나는 나다’ 하는 아상我相의 형상을 한 개인적 자아가 아만我慢입니다.

지성의 본질을 지닌 진아는 전혀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각능력이 없는 육체가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에고가 지성 있는 것과 지각능력 없는 것 사이에서

불가사의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며,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에고를 소멸하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CHAPTER II

PRACTICE (Abhyasa)

 

제2장 수행(abhyasa)


 

1.

What is the method of practice?

 

수행 방법은 무엇입니까?

 

As the Self of a person who tries to attain Self-realization is not different from him and as there is nothing other than or superior to him to be attained by him, Self-realization being only the realization of one’s own nature, the seeker of Liberation realizes, without doubts or misconceptions, his real nature by distinguishing the eternal from the transient, and never swerves from his natural state. This is known as the practice of knowledge. This is the enquiry leading to Self-realization.

 

자신의 참된 성품을 직접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진아는 그 사람과 다르지 않고, 그가 성취할 것으로서 그가 아니거나 그를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진아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의 성품을 직접 깨닫는 것일 뿐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의 분별에 의해, 아무런 의심이나 오해 없이 자신의 참된 성품을 깨닫고, 자신의 본래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知-수행(jnna-abhysa)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아 깨달음에 이르는 탐구입니다.

 

2.

Can this path of enquiry be followed by all aspirants?

 

이 탐구의 길은 모든 구도자들이 따를 수 있습니까?

 

This is suitable only for the ripe souls. The rest should follow different methods according to the state of their minds.

 

이것은 성숙된 영혼들에게만 적합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른 수행법을 따라야 합니다.

 

3.

What are the other methods?

 

다른 수행법들은 무엇입니까?

 

They are (i) stuti, (ii) japa, (iii) dhyana, (iv) yoga, (v) jnana, etc.

 

그것은 (1) 찬송, (2) 염송, (3) 명상, (4) 요가, (5) 지(知) 등입니다.

 

(i) stuti is singing the praises of the Lord with a great feeling of devotion.

 

찬송은 큰 헌신의 감정으로 신(Isvara)의 찬가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ii) japa is uttering the names of the gods or sacred mantras like Om either mentally or verbally.(While following the methods of stuti and japa the mind will sometimes be concentrated (lit. closed) and sometimes diffused (lit. open).

The vagaries of the mind will not be evident to those who follow these methods).

 

염송은 신의 명호나 옴(Om)과 같은 신성한 진언을 마음속으로나 입으로

소리 내어 외는 것입니다. 찬송이나 염송의 방법을 따를 때에는 마음이 어떤 때에는 집중되고[문자적으로는 ‘닫히고’] 어떤 때에는 흩어집니다[문자적으로는 ‘열린다’]. 이러한 방법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변덕스러움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iii) dhyana denotes the repetition of the names, etc., mentally (japa) with feelings of devotion. In this method the state of the mind will be understood easily. For the mind does not become concentrated and diffused simultaneously. When one is in dhyana it does not contact the objects of the senses, and when it is in contact with the objects it is not in dhyana. Therefore those who are in this state can observe the vagaries of the mind then and there and by stopping the mind from thinking other thoughts, fix it in dhyana. Perfection in dhyana is the state of abiding in the Self (lit., abiding in the form of ‘that’ tadakaranilai). As meditation functions in an exceedingly subtle manner at the source of the mind it is not difficult to perceive its rise and subsidence.

 

명상은 헌신의 감정을 가지고 명호 따위를 마음속으로 반복하는 것[염송]을 뜻합니다. 이 방법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동시에 집중되거나 흩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명상에 들어 있을 때, 그는 감각 대상들을 접촉하고 있지 않습니다. 감각 대상들을 접촉하고 있을 때는 그가 명상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변덕스러움을 바로 그 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고, 마음이 다른 생각들을 하는 것을 멈추어 그것을 명상 안에 고정합니다.

명상의 완성은 진아 안에 안주하는 상태(그것의 형상이 된 상태)입니다.

명상은 마음의 근원에서 극도로 미묘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때 명상자는) 마음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것을 지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iv) yoga: The source of the breath is the same as that of the mind; therefore the subsidence of either leads effortlessly to that of the other. The practice of stilling the mind through breath control(pranayama) is called yoga. Fixing their minds on psychic centres such as the sahasrara (lit. the thousand-petalled lotus) yogis remain any length of time without awareness of their bodies. As long as this state continues they appear to be immersed in some kind of joy. But when the mind which has become tranquil emerges (becomes active again) it resumes its worldly thoughts. It is therefore necessary to train it with the help of practices like dhyana, whenever it becomes externalised. It will then attain astate in which there is neither subsidence nor emergence.

 

요가 : 호흡의 근원은 마음의 근원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다른 하나도 자연히 가라앉습니다. 호흡 제어[조식]등의 수행을 통해 생명 기운을 가라앉힘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을 요가라고 합니다.

요기들은 사하스라라(sahasrra)[문자적으로는, ‘천 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와 같은 심령적인 중심(짜끄라)에 마음을 고정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얼마든지 오랜 시간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는 한 그들은 어떤 기쁨의 상태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요해졌던 마음이 떠오르면[다시 활동하게 되면] 세간적인 생각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따라서 마음이 밖으로 쏠릴 때마다 명상과 같은 수행법으로 그것을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가라앉음도 없고 떠오름도 없는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v) jnana is the annihilation of the mind in which it is made to assume the form of the Self through the constant practice of dhyana or enquiry (vichara). The extinction of the mind is the state in which there is a cessation of all efforts. Those who are established in this state never swerve from their true state. The terms ‘silence’ (mouna) and inaction refer to this state alone.

 

지(知)는 부단한 명상이나 탐구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절멸시켜 그것이 진아의 형상을 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멸은 일체의 노력이 그쳐버린 상태입니다. 이 상태 안에 자리잡은 사람은 그들의 진정한 상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묵’과 ‘고요히 있음’이라는 말은 실로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NOTE:

(1) All practices are followed only with the object of concentrating the mind. As all the mental activities like remembering, forgetting, desiring, hating, attracting, discarding, etc., are modifications of the mind, they cannot be one’s true state. Simple, changeless being is one’s true nature. Therefore to know the truth of one’s being and to be it, is known as release from bondage and the destruction of the knot (granthinasam). Until this state of tranquillity of mind is firmly attained, the practice of unswerving abidance in the Self and keeping the mind unsoiled by various thoughts, is essential for an aspirant.

 

주 :

(1) 모든 수행법은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욕망하고, 혐오하고, 취하고, 버리는 등의 모든 심적인 활동은 마음의 변상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상태일 수 없다. 단순하고 변함없는 ‘있음’이 우리의 참된 성품이다. 따라서 자기 존재의 진리를 알고 그것이 되는 것이 속박의 제거이며 매듭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고요라는 이 상태를 확고하게 성취하기 전에는, 진아 안에 흔들림 없이 안주하면서 마음이 온갖 생각들로 오염되지 않게 하는 수행이 구도자들에게 필요하다.

 

(2) Although the practices for achieving strength of mind are numerous, all of them achieve the same end. For it can be seen that whoever concentrates his mind on any object, will, on the cessation of all mental concepts, ultimately remain merely as that object. This is called successful meditation (dhyana siddhi). Those who follow the path of enquiry realize that the mind which remains at the end of the enquiry is Brahman. Those who practise meditation realize that the mind which remains at the end of the meditation is the object of their meditation. As the result is the same in either case it is the duty of aspirants to practice continuously either of these methods till the goal is reached.

 

(2) 마음의 힘을 얻기 위한 수행법들이 다양하다고는 해도, 그것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달성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사람은, 모든 심적인 개념들이 사라지고 나면 궁극적으로 오직 그 대상으로서 머무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한 명상(명상의 성취)이라는 것이다.

탐구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탐구의 끝에 남아 있는 마음이 곧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명상의 끝에 남아 있는 마음이 곧 그들이 한 명상의 대상임을 깨닫는다. 어느 경우나 그 결과는 동일하므로, 구도자들은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이러한 방법들 중의 어느 하나를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4.

Is the state of ‘being still’ a state involving effort or effortless?

 

‘고요히 있음’의 상태는 노력이 있는 상태입니까, 없는 상태입니까?

 

It is not an effortless state of indolence. All mundane activities which are ordinarily called effort are performed with the aid of a portion of the mind and with frequent breaks. But the act of communion with the Self (atma vyavahara) or remaining still inwardly is intense activity which is performed with the entire mind and without break. Maya (delusion or ignorance) which cannot be destroyed by any other act is completely destroyed by this intense activity which is called ‘silence’ (mouna).

 

그것은 노력 없는 나태함의 상태가 아닙니다. 보통 노력이라고 하는 세간적 활동은 마음의 한 부분의 도움으로 영위되며, 자주 끊어집니다. 그러나 진아합일 행위, 즉 내적으로 고요히 머무름은 온 마음을 다해서 이루어지는 강렬한 활동이며, 끊어짐이 없습니다. 다른 행위로는 파괴될 수 없는 마야[망상 혹은 무지]도 ‘침묵’이라고 하는 이 강렬한 활동에 의해 완전히 파괴됩니다.

 

5.

What is the nature of maya?

 

마야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Maya is that which makes us regard as non-existent the Self, the Reality, which is always and everywhere present, all-pervasive and self-luminous, and as existent the individual soul (jiva), the world (jagat), and God (para) which have been conclusively proved to be non-existent at all times and places.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며, 일체에 두루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진아, 즉 실재(Reality)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하고,

어느 때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적으로 증명되어 온 세계,

개아個我 그리고 신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6.

As the Self shines fully of its own accord why is it not generally recognised like the other objects of the world by all persons?

 

진아는 그 스스로 완전히 빛을 발하는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세상의

다른 대상들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하지 못합니까?

 

Wherever particular objects are known it is the Self which has known itself in the form of those objects. For what is known as knowledge or awareness is only the patency of the Self (atmasakti). The Self is the only sentient object. There is nothing apart from the Self. If there are such objects they are all insentient and therefore cannot either know themselves or mutually know one another. It is because the Self does not know its true nature in this manner that it seems to be immersed and struggling in the ocean of birth (and death) in the form of the individual soul.

 

우리가 특정한 대상들을 아는 것은 그 때마다 진아가 그러한 대상들의 형상으로 스스로를 알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 또는 자각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진아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진아가 단 하나의 지각능력 있는 대상입니다.

진아와 별개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지각능력 없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서로간에도 알 수 없습니다. 진아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적 영혼의 형상을 하고 탄생(과 죽음)의 바다에 잠겨서 분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7.

Although the Lord is all-pervasive it appears, from passages like “adorning him through His Grace”, that He can be known only through His grace. How then can the individual soul by its own efforts attain self-realization in he absence of the Lord’s Grace?

 

이슈와라가 비록 일체에 두루한다 해도, ‘그의 은총을 통해서 그를 숭모한다’고 하는 구절에서 보듯이, 그는 그의 은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슈와라의 은총 없이 개아個我가 어떻게 그 자신의

노력으로 진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As the Lord denotes the Self and as Grace means the Lord’s presence or revelation, there is no time when the Lord remains unknown. If the light of the sun is invisible to the owl it is only the fault of that bird and not of the sun. Similarly can the unawareness by ignorant persons of the Self which is always of the nature of awareness be other than their own fault? How can it be the fault of the Self? It is because Grace is of the very nature of the Lord that He is well-known as ‘the blessed Grace’. Therefore the Lord, whose nature itself is Grace, does not have to bestow His Grace. Nor is there any particular time for bestowing His Grace.

 

이슈와라는 곧 진아를 뜻하고, 은총은 신의 임재 혹은 현시를 뜻하기 때문에, 이슈와라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때는 없습니다. 만약 햇빛이 부엉이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엉이 탓이지 해의 탓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항상 자각의 성품인 진아를, 무지한 사람이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탓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진아의 탓이겠습니까?

이슈와라가 ‘복된 은총’으로 잘 알려진 것은 은총이 바로 그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성품이 은총인 이슈와라는, 그의 은총을 내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그의 은총을 내려주어야 할 특별한 시점도 없습니다.

 

8.

What part of the body is the abode of the Self?

 

몸 안의 어느 부위가 진아의 거주처입니까?

 

The heart on the right side of the chest is generally indicated. This is because we usually point to the right side of the chest when we refer to ourselves. Some say that the sahasrara (the thousand-petalled lotus) is the abode of the Self. But if that were true the head should not fall forward when we go to sleep or faint.

 

일반적으로 가슴 오른쪽의 심장이 진아의 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보통 가슴의 오른쪽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하스라라(sahasrra)[천 개의 연꽃잎 모양의 짜끄라]가 진아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잠이 들거나 기절했을 때 머리가 앞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9.

What is the nature of the heart?

 

심장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The sacred texts describing it say: Between the two nipples, below the chest and above the abdomen, there are six organs of different colours *. One of them resembling the bud of a water lily and situated two digits to the right is the heart. It is inverted and within it is a tiny orifice which is the seat of dense darkness (ignorance) full of desires. All the psychic nerves (nadis) depend upon it. It is the abode of the vital forces, the mind and the light (of consciousness). (See Appendix to Reality in Forty Verses 18 -19).

 

*.These are not the same as the Chakras.

 

경전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 젖가슴 사이, 가슴 아래이며 배 위에, 서로 다른 색깔의 여섯 가지 기관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수련꽃 봉오리처럼 생겼는데 가슴 중심에서 손가락

두 개 폭으로 오른쪽에 위치하며 그것이 심장이다. 그것은 거꾸로 서 있고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욕망들로 가득 찬 짙은 어둠

[무지]의 자리이다. 모든 영적인 신경들이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 기운과 마음과 (의식의) 빛이 거주하는 곳이다.”

(<실재사십송 증보>, 제18-19송 참조.)

 

 

But, although it is described thus, the meaning of the word heart (hrdayam) is the Self (atman). As it is denoted by the terms existence, consciousness, bliss, eternal and plenum (sat, chit, anandam, nityam, purnam) it has no differences such as exterior and interior or up and down. That tranquil state in which all thoughts come to an end is called the state of the Self. When it is realized as it is, there is no scope for discussions about its location inside the body or outside.

 

그러나 심장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흐리다얌(hridayam)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진아입니다. 심장은 존재, 의식, 지복, 영원, 완전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는 안팎이나 위, 아래의 구분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생각들이 그 안에서 종식되는 그 고요한 상태[심장의 상태]가

진아의 상태입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깨달을 때에는, 그것이 몸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따질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10.

Why do thoughts of many objects arise in the mind even when there is no contact with external objects?

 

외부의 대상들과 접촉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왜 마음속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일어납니까?

 

All such thoughts are due to latent tendencies (purva samskaras). They appear only to the individual consciousness (jiva) which has forgotten its real nature and become externalised. Whenever particular things are perceived, the enquiry “Who is it that sees them”? should be made; they will then disappear at once.

 

그런 모든 생각들은 잠재적인 습(習)에 기인합니다. 생각들은 자신의 참된 성품을 잊어버리고 외부화된 개인적 의식에만 나타납니다. 특정한 사물이 지각될 때마다 ‘이것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탐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11.

How do the triple factors (i.e., knower, known and knowledge), which are absent in deep sleep, samadhi, etc., manifest themselves in the Self (in the states of waking and dreaming)?

 

깊은 잠, 삼매 등의 상태에서는 없는 세 가지 요소[즉, 아는 자, 알려지는 것 그리고 앎]가 어떻게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진아 안에 나타납니까?

 

From the Self there arise in succession

 

(i) Chidabhasa (reflected consciousness) which is a kind of luminosity.

 

(ii) Jiva (the individual consciousness) or the seer or the first concept.

 

(iii) Phenomena, that is the world.

 

진아로부터 연쇄적으로,

(1) 일종의 광명인 반사된 의식,

(2) 개아[개인적 의식], 즉 보는 자 혹은 최초의 개념,

(3) 현상계, 즉 세계 등, 알려진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12.

Since the Self is free from the notions of knowledge and ignorance how can it be said to pervade the entire body in the shape of sentience or to impart sentience to the senses?

 

진아는 지(知)와 무지(無知)라는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지각의 형태로 몸 전체에 두루하다거나, 혹은 감각 기관에 지각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Wise men say that there is a connection between the source of the various psychic nerves and the Self, that this is the knot of the heart, that the connection between the sentient and the insentient will exist until this is cut asunder with the aid of true knowledge, that just as the subtle and invisible force of electricity travels through wires and does many wonderful things, so the force of the Self also travels through the psychic nerves and, pervading the entire body, imparts sentience to the senses, and that if this knot is cut the Self will remain as it always is, without any attributes.

 

현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영적인 신경들의 근원과 진아

사이에는 하나의 연결이 있다. 이것이 심장의 매듭이다. 지각 있는 것과 지각 없는 것 사이의 연결은 이것이 진지의 도움에 의해 잘려나갈 때까지 존속한다. 미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력이 전선 속을 흘러가듯이, 진아의 힘도 영적인 신경들 속을 흘러가서 몸 전체에 두루 퍼지며, 감각 기관에 지각을 부여한다. 그리고 만약 이 매듭이 끊어지면 진아가 항상 그러한 그대로, 아무런 속성 없이 남아 있게 된다.”

 

13.

How can there be a connection between the Self which is pure knowledge and the triple factors which are relative knowledge?

 

순수한 지(知)의 진아와 상대적인 지(知)의 세 가지 요소 사이에 어떻게

연결이 있을 수 있습니까?

 

This is, in a way, like the working of a cinema as shown below:-

CINEMA SHOW

 

1/ The lamp inside (the apparatus)

2/ The lens in front of the lamp

3/ The film which is a long series of (separate

photos).

4/ The lens, the light passing through it and the

lamp, which together form the focused light.

5/ The light passing through the lens and falling on

the screen.

6/ The various kinds of pictures appearing in the

light of the screen.

7/ The mechanism which sets the film in motion.

 

SELF

1/ The Self

2/ The pure (sattvic) mind close to the Self.

3/ The stream of latent tendencies consisting of

subtle thoughts.

4/ The mind, the illumination of it and the Self,

which together form the seer or the Jiva.

5/ The light of the Self emerging from the mind

through the senses, and falling on the world.

6/ The various forms and names appearing as the

objects perceived in the light of the world.

7/ The divine law manifesting the latent tendencies

of the mind.

 

Just as the pictures appear on the screen as long as the film throws the shadows through the lens, so the phenomenal world will continue to appear to the individual in the waking and dream states as long as there are latent mental impressions. Just as the lens magnifies the tiny specks on the film to a huge size and as a number of pictures are shown in a second, so the mind enlarges the sprout-like tendencies into tree-like thoughts and shows in a second innumerable worlds. Again, just as there is only the light of the lamp visible when there is no film, so the Self alone shines without the triple factors when the mental concepts in the form of tendencies are absent in the states of deep sleep, swoon and samadhi. Just as the lamp illumines the lens, etc., while remaining unaffected, the Self illumines the ego (chidabhasa), etc., while remaining unaffected.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다음 아래표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의 상영 과정과 비슷합니다. 필름이 렌즈를 통하여 그림자를 던지는 동안은 화막에 화면들이 나타나듯이, 내적 기관 안에 원습들이 남아 있는 동안은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 개인에게 현상계가 계속 나타나겠지요.

렌즈가 필름 상의 작은 점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하며 한 순간에 여러 개의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싹과 같은 습을 나무와 같은 생각들로 확대하며 한 순간에 수많은 세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무 필름이 없으면 전등의 불빛만 보이듯이, 깊은 잠, 기절 상태 그리고 삼매 속에서 습의 형태를 한 마음의 개념들이 없을 때에는 세 가지 요소 없이 진아만이 빛납니다.

전등이 렌즈 등을 비추면서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 있듯이, 진아도 에고 등을 비추면서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영 화진아
(1)내장된 전등(영사 장비)진아
(2) 전등 앞의 렌즈진아에 가까운 순수한 마음
(3) 별개의 사진들을 길게 이어놓은 필름미묘한 생각들을 이루는 잠재적 습의 흐름
(4) 합동하여 집중된 빛을 형성하는 렌즈, 렌즈를 통과한 빛 그리고 전등합동하여 보는 자, 즉 개아를 형성하는 마음, 마음의 빛 그리고 진아
(5) 렌즈를 통과하여 화막에 닿는 빛감각 기관을 통과하여 세계에 닿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진아의 빛
(6) 화막의 빛 안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화면들세계의 빛 안에서 지각되는 대상들로 나타나는 갖가지 형상과 이름들
(7) 필름을 가동하는 기계장치마음의 잠재적 습을 나투는 신의 법칙

 

14.

What is dhyana (meditation)?

 

명상이란 무엇입니까?

 

It is abiding as one’s Self without swerving in any way from one’s real nature and without feeling that one is meditating. As one is not in the least conscious of the different states (waking, dreaming, etc.) in this condition, the sleep (noticeable) here is also regarded as dhyana.

 

명상이란 자신의 참된 성품으로부터 어디로도 벗어나지 않고, 자기가 명상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이, 자신의 진아로서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우리가 다른 상태들[생시, 꿈 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므로, 여기서 (흔히 나타나는) 잠 또한 명상으로 간주됩니다.

 

15.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dhyana and samadhi?

 

명상과 삼매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Dhyana is achieved through deliberate mental effort; in samadhi there is no such effort.

 

명상은 세심한 마음의 노력을 통해 성취됩니다. 삼매 속에서는 전혀 그러한 노력이 없습니다.

 

16.

What are the factors to be kept in view in dhyana ?

 

명상에 있어서는 어떤 요소들을 명심해야 합니까?

It is important for one who is established in his Self (atma nista) to see that he does not swerve in the least from this absorption. By swerving from his true nature he may see before him bright effulgences, etc., or hear (unusual) sounds or regard as real the visions of gods appearing within or outside himself. He should not be deceived by these and forget himself.

 

진아 안주자[진아 안에 자리잡은 사람]는 그 몰입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참된 성품에서 벗어나면, 눈 앞에 밝은 광채를 보거나,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혹은 자신의 안팎에서 나타나는 너무나 실제적인 신들의 환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것들에 속아 자신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NOTE:

(i) If the moments that are wasted in thinking of the objects which are not the Self, are spent on

enquiry into the Self, Self-Realization will be attained in a very short time.

 

(ii) Until the mind becomes established in itself some kind of bhavana (contemplation of a personified god or goddess with deep emotion and religious feeling) is essential. Otherwise the mind will be frequently assailed by wayward thoughts or sleep.

 

(iii) Without spending all the time in practising bhavanas like ‘I am Siva’ or ‘I am Brahman’, which are regarded as nirgunopasana (contemplation of the attributeless Brahman), the method of enquiry into oneself should be practised as soon as the mental strength which is the result of such upasana (contemplation) is attained. (iv) The excellence of the practice (sadhana) lies in not giving room for even a single mental concept (vritti)

 

주 : 진아 아닌 대상을 생각하느라고 허비된 순간들이 진아에 대한 탐구에 쓰여진다면, 진아 깨달음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성취될 것이다.

 

마음이 그 자신 안에 자리잡을 때까지는 어떤 종류의 보심관[인격화된 신이나 여신을 깊은 감정과 종교적 느낌으로 내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빈번히 망상이나 잠에 휩쓸릴 것이다.

 

무성내관[속성 없는 브라만에 대한 명상]으로 간주되는 ‘나는 쉬바다’나

‘나는 브라만이다’ 같은 보심관을 수행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지 말고,

그러한 내관의 결과인 마음의 힘을 얻자마자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를 수행해야 한다. 수행을 잘 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심적인 개념도 일어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17.

What are the rules of conduct which an aspirant (sadhaka) should follow?

수행자가 따라야 할 행위 준칙은 무엇입니까?

 

Moderation in food, moderation in sleep and moderation in speech.

적당한 음식, 적당한 잠 그리고 적당한 말입니다.

 

18.

How long should one practice?

 

얼마나 오래 수행해야 합니까?

 

Until the mind attains effortlessly its natural state of freedom from concepts, that is till the sense of ‘I’ and ‘mine’ exists no longer.

 

마음이 개념들로부터 벗어난 본래적 상태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즉 ‘나’와 ‘내 것’이라는 느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19.

What is the meaning of dwelling in solitude (ekanta vasa)?

 

혼자 살기[독거獨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s the Self is all-pervasive it has no particular place for solitude.

The state of being free from mental concepts is called ‘dwelling in solitude’.

 

진아는 일체에 두루하므로 그것은 혼자만의 어떤 특정한 장소도 갖지 않습니다. 심적인 개념들로부터 벗어나 존재하는 상태가 ‘혼자 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20.

What is the sign of wisdom (viveka)?

 

지혜(분별)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Its beauty lies in remaining free from delusion after realising the truth once. There is fear only for one who sees at least a slight difference in the Supreme Brahman. So long as there is the idea that the body is the Self one cannot be a realizer of truth whoever he might be.

 

지혜의 참된 면모는 진리를 일단 깨달은 뒤에 미혹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지고의 브라만 안에서 조금의 차별이라도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몸이 자기라고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는 진리를 깨달은 자일 수 없습니다.

 

21.

If everything happens according to karma (prarabdha: the result of one’s acts in the past) how is one to overcome the obstacles to meditation (dhyana)?

 

만약 모든 일이 발현업[과거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일어난다면,

명상의 장애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Prarabdha concerns only the out-turned, not the in-turned mind.

One who seeks his real Self will not be afraid of any obstacle.

 

발현업은 밖으로 향하는 마음에만 관계되지, 안으로 향하는 마음에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참된 진아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22.

Is asceticism (sanyasa) one of the essential requisites for a person to become established in the Self (atma nista)?

 

출가수행의 삶은 사람이 진아 안에 안주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입니까?

 

The effort that is made to get rid of attachment to one’s body is really towards abiding in the Self. Maturity of thought and enquiry alone removes attachment to the body, not the stations of life (asramas), such as student (brahmachari), etc. For the attachment is in the mind while the stations pertain to the body. How can bodily stations remove the attachment in the mind? As maturity of thought and enquiry pertain to the mind these alone can, by enquiry on the part of the same mind, remove the attachments which have crept into it through thoughtlessness. But, as the discipline of asceticism (sanyasasrama) is the means for attaining dispassion (vairagya), and as dispassion is the means for enquiry, joining an order of ascetics may be regarded, in a way, as a means of enquiry through dispassion. Instead of wasting one’s life by entering the order of ascetics before one is fit for it, it is better to live the householder’s life. In order to fix the mind in the Self which is its true nature it is necessary to separate it from the family of fancies (samkalpas) and doubts (vikalpas), that is to renounce the family (samsara) in the mind. This is the real asceticism.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실로 진아 안에 안주하기 위한 것입니다. 생각의 성숙과 탐구에 의해서만이 몸에 대한 집착이 제거되며,

학생기 등의 인생 단계가 그렇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착은 마음 안에 있지만 그러한 단계들은 몸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몸의 단계들이 어떻게 마음속의 집착을 없애줄 수 있겠습니까?

생각의 성숙과 탐구는 마음에만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숙과 탐구만이―

바로 그 마음으로써 하는 탐구에 의해―무분별함을 통해 마음속에 스며든

집착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수행의 삶은 무착심(無着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고 무착심은 탐구를 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출가자들의 단체에 가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무착심을 통한 탐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출가수행을 할 만큼 성숙되기 전에 출가자들의 단체에 가담하느라고 자신의 삶을 허비하느니보다는, 재가자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마음을 그것의 참된 성품인 진아 안에 고정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망념[욕망]과 의심[분별]의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아야 합니다. 즉, 마음속의 가족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출가수행입니다.

 

23.

It is an established rule that so long as there is the least idea of I-am-the-doer, Self-knowledge cannot be attained, but is it possible for an aspirant who is a householder to discharge his duties properly without this sense?

 

‘내가 행위자다’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진아지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확립된 원칙이지만, 재가자인 공부인이 이러한 느낌

없이 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As there is no rule that action should depend upon a sense of being the doer it is unnecessary to doubt whether any action will take place without a doer or an act of doing. Although the officer of a government treasury may appear, in the eyes of others, to be doing his duty attentively and responsibly all day long, he will be discharging his duties without attachment, thinking ‘I have no real connection with all this money’ and without a sense of involvement in his mind. In the same manner a wise householder may also discharge without attachment the various household duties which fall to his lot according to his past karma, like a tool in the hands of another. Action and knowledge are not obstacles to each other.

 

행위자라는 느낌이 있어야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행위자’ 없이, 혹은 ‘하는 행위’ 없이도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고를 담당하는 관리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루 종일 주의 깊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나는 이 모든 돈과 아무런 실질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집착 없이, 그리고 개입한다는 느낌 없이 자신의 임무를 해나갈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명한 재가자도 자신의 과거업에 따라 그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재가 업무를, 마치 남의 손에 쥐어진 연장이 일을 하는 것 같이,

아무 집착 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행위와 앎은 서로 장애물이 아닙니다.

 

24.

Of what use to his family is a wise householder who is unmindful of his bodily comforts and of what use is his family to him?

 

자기 육신의 안락을 돌아보지 않는 현명한 재가자가 그의 가족에게 무슨

소용 있으며, 그의 가족이 그에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Although he is entirely unmindful of his bodily comforts, if, owing to his past karma, his family have to subsist by his efforts, he may be regarded as doing service to others. If it is asked whether the wise man derives any benefit from the discharge of domestic duties, it may be answered that, as he has already attained the state of complete satisfaction which is the sum total of all benefits and the highest good of all, he does not stand to gain anything more by discharging family duties.

 

그가 비록 자기 육신의 안락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해도, 만약 자신의 과거업 때문에 자기의 노력으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이 현명한 사람이 가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미 완전한 만족의 상태―그것은 모든 이익을 합친 것과 같고 또한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선인데―에 도달했으므로, 가정적 임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더 이상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25.

How can cessation of activity (nivritti) and peace of mind be attained in the midst of household duties which are of the nature of constant activity?

 

그 성격상 끊임없는 행위를 요하는 가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속에서 어떻게 행위의 그침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As the activities of the wise man exist only in the eyes of others and not in his own, although he may be accomplishing immense tasks, he really does nothing. Therefore his activities do not stand in the way of inaction and peace of mind. For he knows the truth that all activities take place in his mere presence and that he does nothing. Hence he will remain as the silent witness of all the activities taking place.

 

이 현명한 사람이 하는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행위로 보이고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실제로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들은 행위의 그침과 마음의 평안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행위들이 단지 그의 면전에서 일어날 뿐,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의 말없는 주시자로 남을 것입니다.

 

26.

Just as the Sage’s past karma is the cause of his present activities will not the impressions (vasanas) caused by his present activities adhere to him in future?

 

진인의 과거업이 그의 현재의 행위의 원인인 것과 꼭 같이, 그의 현재의 행위들에 의해 야기된 인상들이 미래에 그에게 붙지 않겠습니까?

 

Only one who is free from all the latent tendencies (vasanas) is a Sage. That being so how can the tendencies of karma affect him who is entirely unattached to activity?

 

모든 원습[잠재적 습]을 벗어난 사람만이 진인입니다. 그럴진대, 행위에

전혀 집착함이 없는 그에게 어떻게 업의 습이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27.

What is the meaning of brahmacharya?

 

브라마짜리야[범행-학습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Only enquiry into Brahman should be called brahmacharya.

 

브라만에 대한 탐구만을 브라마짜리야라고 해야겠지요.

 

28.

Will the practice of brahmacharya which is followed in conformity with the (four) orders of life (asramas) be a means of knowledge?

 

인생 단계에 맞추어 따르는 브라마짜리야의 실천은 지[깨달음]의 한 수단이 되겠습니까?

 

As the various means of knowledge, such as control of senses, etc., are included in brahmacharya the virtuous practices duly followed by those who belong to the order of students (brahmacharins) are very helpful for their improvement.

 

지(知)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금계, 권계의 많은 규율이 브라마짜리야에 포함되기 때문에, 독신 학생들이 방정한 품행을 충실히 지키는 것은 그들의 진보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29.

Can one enter the order of ascetics (sanyasa) directly from the order of students (brahmacharya)?

 

학생기에 있다가 출가 수행기로 바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까?

 

Those who are competent need not formally enter the orders of brahmacharya , etc., in the order laid down. One who has realized his Self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the various orders of life.

Therefore no order of life either helps or hinders him.

 

능력 있는 사람은 학생기 등의 인생 단계에 공식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진아를 깨달은 사람은 그러한 인생 단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생 단계도 그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거나 그를 장애 하지

않습니다.

 

30.

Does an aspirant (sadhaka) lose anything by not observing the rules of caste and orders of life ?

 

수행자가 계급(caste)과 인생 단계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이 있습니까?

 

As the attainment (anusthana, lit.practice) of knowledge is the supreme end of all other practices, there is no rule that one who remains in any one order of life and constantly acquires knowledge is bound to follow the rules laid down for that order of life. If he follows the rules of caste and orders of life he does so for the good of the world. He does not derive any benefit by observing the rules. Nor does he lose anything by not observing them.

 

지(知)의 실천이 다른 모든 실천(수행)의 최상의 목적이기 때문에, 부단히

지의 실천을 하면서 어느 인생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인생 단계에 대해 규정되어 있는 법칙들에 구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계급과 인생 단계의 법칙을 지킨다면 그것은 세상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러한 법칙들을 따른다고 해서 스스로 얻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잃어버릴 것도 전혀 없습니다.

 

CHAPTER III

EXPERIENCE (Anubhava)

 

제3장 체험(Anubhava)


1.

What is the light of consciousness?

 

의식의 빛이란 무엇입니까?

 

It is the self-luminous existence-consciousness which reveals to the seer the world of names and forms both inside and outside. The existence of this existence-consciousness can be inferred by the objects illuminated by it. It does not become the object of consciousness.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의식으로서, 안과 밖에 있는 이름과 형상의 세계를 ‘보는 자’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존재-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조명되는 대상들에 의해 추리됩니다.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2.

What is knowledge (vijnana)?

 

명지(vijnna)란 무엇입니까?

 

It is that tranquil state of existence-consciousness which is experienced by the aspirant and which is like the waveless ocean or the motionless ether.

 

그것은 구도자가 체험하는 존재-의식의 평온한 상태인데,

파도 없는 바다 혹은 움직임 없는 허공 같은 것입니다.

 

3.

What is bliss?

 

지복(nanda)이란 무엇입니까?

 

It is the experience of joy (or peace) in the state of vijnana free of all activities and similar to deep sleep. This is also called the state of keval‎a nirvikalpa (remaining without concepts).

 

그것은 모든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잠과 비슷한 명지의 상태에서 갖는 기쁨[혹은 평안]의 체험입니다. 이것을 또한 합일무상삼매[개념 없이 머무름]라고도 합니다.

 

4.

What is the state beyond bliss?

 

지복을 넘어선 상태(nandtta)란 어떤 것입니까?

 

It is the state of unceasing peace of mind which is found in the state of absolute quiescence, jagrat-sushupti (lit. sleep with awareness) which resembles inactive deep sleep. In this state, in spite of the activity of the body and the senses, there is no external awareness, like a child immersed in sleep1(who is not conscious of the food given to him by his mother).

A yogi who is in this state is inactive even while engaged in activity. This is also called sahaja nirvikalpa Samadhi (natural state of absorption in oneself without concepts).

 

1. The acts of sleeping children like eating and drinking are acts only in the eyes of others and not in their own. They do not therefore really do those acts in spite of their appearing to do them.

 

그것은 절대적 침묵, 즉 움직이지 않는 깊은 잠과 비슷한 ‘생시-잠’[문자적으로는, ‘깨어있는 잠’]의 상태에서 발견되는, 끊임없는 마음의 평안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육체와 감각 기관은 활동하고 있지만, (엄마가 주는 음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잠에 빠진 아이같이 그 사람에게는 전혀 외부적 자각이 없습니다. 이 상태에 있는 요기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에도 행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본연무상삼매라고도 합니다.

 

5.

What is the authority for saying that the entire moving and unmoving worlds depend upon Oneself ?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세계들 전체가 자기 자신(‘나’)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말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The Self means the embodied being. It is only after the energy, which was latent in the state of deep sleep, emerges with the idea of ‘I’ that all objects are experienced. The Self is present in all perceptions as the perceiver. There are no objects to be seen when the ‘I’ is absent. For all these reasons it may undoubtedly be said that everything comes out of the Self and goes back to the Self.

 

자기(진아)란 육화된 존재를 뜻합니다. 우리가 모든 대상을 경험하는 것은,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가 ‘나’라는 관념과 함께 나타난 뒤의 일입니다. 진아는 모든 지각에 있어서 ‘지각하는 자’로서 현존합니다. ‘나’가 없을 때는 보이는 대상도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로 해서, 일체가 진아로부터 나오고 또 진아로 돌아간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As the bodies and the selves animating them are everywhere actually observed to be innumerable how can it be said that the Self is only one ?

 

우리는 도처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육체들과, 그것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자아들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어떻게 진아는 오직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If the idea ‘I am the body’ is accepted*, the selves are multiple.

The state in which this idea vanishes is the Self since in that state there are no other objects.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Self is regarded as one only.

 

* The idea that one is one’s body is what is called hrdaya-granthi (knot of the heart). Of the various knots

this knot, which binds together what is conscious with what is insentient, is what causes bondage.

 

‘나는 육체다’ 하는 관념을 받아들이면 무수한 자아가 있게 됩니다.

이 관념이 사라진 상태가 진아인데, 이 상태에서는 (자기 아닌) 다른 대상이 전혀 없습니다. 진아를 오직 하나로 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7.

What is the authority for saying that Brahman can be apprehended by the mind and at the same time that it cannot be apprehended by the mind?

 

브라만은 마음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도 하고, 마음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도 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입니까?

 

It cannot be apprehended by the impure mind but can be apprehended by the pure mind.

그것은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이해될 수 없지만, 순수한 마음으로는

이해될 수 있습니다.

 

8.

What is pure mind and what is impure mind?

 

순수한 마음과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When the indefinable power of Brahman separates itself from Brahman and, in union with the reflection of consciousness (chidabhasa) assumes various forms, it is called the impure mind. When it becomes free from the reflection of consciousness (abhasa), through discrimination, it is called the pure mind. Its state of union with the Brahman is its apprehension of Brahman. The energy which is accompanied by the reflection of consciousness is called the impure mind and its state of separation from Brahman is its non-apprehension of Brahman.

 

브라만의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힘이 스스로를 브라만으로부터 분리시켜, 의식의 반사와 결합하여 여러 가지 형상을 취할 때, 그것을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분별을 통해 의식의 반사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것을 순수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브라만과 결합한 상태가 ‘브라만을 이해한 것’입니다. 의식의 반사를 수반하는 에너지를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하며, 그것이 브라만과 분리된 상태가 ‘브라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9.

Is it possible to overcome, even while the body exists, the karma (prarabdha) which is said to last till the end of the body?

 

육체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고 하는 발현업을 육체가 존속하는 동안에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Yes. If the agent (doer) upon whom the karma depends, namely the ego, which has come into existence between the body and the Self, merges in its source and loses its form, will the karma which depends upon it alone survive? Therefore when there is no ‘I’ there is no karma.

 

가능합니다. 만약 발현업이 의존하는 행위자, 즉 육체와 진아 사이에서 생겨난 에고가 그 근원에 합일하여 자신의 형상을 잃으면, 그것에 의존하던 발현업이 남아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가 없으면 발현업도 없습니다.

 

10.

As the Self is existence and consciousness, what is the reason for describing it as different from the existent and the non-existent, the sentient and the insentient?

 

진아가 존재이자 의식인데, 그것을 실재나 비실재, 혹은 ‘의식(지각능력)이 있는 것’이나 ‘의식이 없는 것’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lthough the Self is real, as it comprises everything, it does not give room for questions involving duality about its reality or unreality. Therefore it is said to be different from the real and the unreal. Similarly, even though it is consciousness, since there is nothing for it to know or to make itself known to, it is said to be different from the sentient and the insentient.

 

진아가 실재하기는 하나, 그것은 일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냐

비실재냐 하는 이원성을 띤 질문을 제기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실재나 비실재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의식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아는 자’나 ‘알려지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것’이나 ‘의식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CHAPTER IV

ATTAINMENT (Arudha)

 

제4장 성취(Arudha)


1.

What is the state of attainment of knowledge?

 

지()의 성취란 무엇입니까?

 

It is firm and effortless abidance in the Self in which the mind which has become one with the Self does not subsequently emerge again at any time. That is, just as everyone usually and naturally has the idea, ‘I am not a goat nor a cow nor any other animal but a man’, when he thinks of his body, so also when he has the idea ‘I am not the principles (tatwas) beginning with the body and ending with sound (nada), but the Self which is existence, consciousness and bliss’, the innate self-consciousness (atmaprajna), he is said to have attained firm knowledge.

 

그것은 확고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진아 안주인데, 그 안에서 진아와 하나가 되어 버린 마음은 그 뒤에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생각할 때 누구나 보통 자연스럽게 ‘나는 염소가 아니고, 암소도 아니고,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니고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듯이, ‘나는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소리로 끝나는 원리들이 아니라, 존재, 의식, 지복인 진아이다’라는, 본래적인 진아 의식의 확고한 지(知)를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2.

To which of the seven stages of knowledge (jnana-bhoomikas)*does the sage (jnani) belong?

 

일곱 가지 지의 단계 중에서 진인은 어느 단계에 속합니까?

 

He belongs to the fourth stage.

네 번째 상태에 속합니다.

 

*The seven jnana bhoomikas are:-

1. subheccha (the desire for enlightenment).

2. vicharana(enquiry).

3. tanumanasa (tenuous mind).

4. satwapatti(self-realization).

5. asamsakti(non-attachment).

6. padarthabhavana(non-perception of objects).

7. turyaga(transcendence).

 

 

3.

If that is so why have three more stages superior to it been distinguished?

 

만약 그렇다면 그보다 높은 세 단계를 왜 구분합니까?

 

The marks of the stages four to seven are based upon the experiences of the realized person (jivanmukta). They are not states of knowledge and release. So far as knowledge and release are concerned no distinction whatever is made in these four stages.

 

Those who have attained the last four bhoomikas are called brahmavit, brahmavidvara, brahmavidvariya and brahmavid varistha respectively.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 단계의 특징들은 그 생존해탈자의 체험에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그들의 지와 해탈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와 해탈에 관한 한, 이 네 단계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4.

As liberation is common to all, why is the varistha (lit. the most excellent) alone praised excessively?

 

해탈은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인데, 왜 바리쉬타[문자적으로는 ‘가장 뛰어난’]만을 극히 찬양하는 것입니까?

 

So far as the varistha’s common experience of bliss is concerned he is extolled only because of the special merit acquired by him in his previous births which is the cause of it.

 

바리쉬타의 통상적인 지복 체험을 놓고 본다면, 그는 자신이 전생에 쌓은

특별한 공덕 때문에 찬양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한 체험을 하는 원인입니다.

 

5.

As there is no one who does not desire to experience constant bliss what is the reason why all sages (jnanis) do not attain the state of varistha?

 

항상적인 지복의 체험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모든 진인들이 바리쉬타의 상태를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It is not to be attained by mere desire or effort. Karma (prarabdha) is its cause. As the ego dies along with its cause even in the fourth stage (bhoomika), what agent is there beyond that stage to desire anything or to make efforts? So long as they make efforts they will not be sages (jnanis) . Do the sacred texts (srutis) which specially mention the varistha say that the other three are unenlightened persons?

 

그것은 바란다거나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업[발현업]이 그

원인입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도 에고는 그것의 원인과 함께 죽는데, 그 단계 너머에 무엇을 바라거나 노력을 할 무슨 행위자가 있단 말입니까? 노력을

하는 한 그들은 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리쉬타를 특별히 언급하는

경전(srutis-베다)에서 다른 세 가지 단계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던가요?

 

6.

As some sacred texts say that the supreme state is that in which the sense organs and the mind are completely destroyed, how can that state be compatible with the experience of the body and the senses ?

 

어떤 경전에서는 지고의 상태란 감각 기관과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상태가 육체나 감각의 경험과 양립할 수 있습니까?

 

If that were so there would not be any difference between that state and the state of deep sleep. Further how can it be said to be the natural state when it exists at one time and not at another? This happens, as stated before, to some persons according to their karma (prarabdha) for some time or till death. It cannot properly be regarded as the final state. If it could it would mean that all great souls and the Lord, who were the authors of the Vedantic works (jnana granthas) and the Vedas, were unenlightened persons. If the supreme state is that in which neither the senses nor the mind exist and not the state in which they exist, how can it be the perfect state (paripurnam)? As karma alone is responsible for the activity or inactivity of the sages, great souls have declared the state of sahaja nirvikalpa (the natural state without concepts) alone to be the ultimate state.

 

만약 (지고의 상태가) 그렇다면 그 상태와 깊은 잠의 상태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겠지요. 더 나아가, 그것(마음과 감각 기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

어떤 때는 존재하고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본래적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업[발현업]에 따라서 일어나는데, 한 동안만 그러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그러기도 합니다. 그것을 최종적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고의 상태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베단따적 저작들(jnna granthas)이나 베다서를 지은 저 모든 위대한 영혼들과 하느님(the Lord)이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지고의 상태가 감각도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하면, 어떻게 그것을 원만실재[완전한 상태]라고 하겠습니까? 진인들이 행위하거나 행위하지 않는 것은 오직 업(발현업)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성인들은 본연무상삼매 의 상태야말로 궁극적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7.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ordinary sleep and waking sleep (jagrat sushupti)?

 

보통의 잠과 생시-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In ordinary sleep there are not only no thoughts but also no awareness.

In waking sleep there is awareness alone. That is why it is called awake while sleeping, that is the sleep in which there is awareness.

 

보통의 잠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지만 아무런 자각도 없습니다. 깨어있는 잠에서는 자각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고 있으면서도 깨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각하는 잠입니다.

 

8.

Why is the Self described both as the fourth state (turiya) and beyond the fourth state (turiyatita)?

 

왜 진아를 뚜리야[네 번째 상태]라고도 하고, 뚜리야띠따[네 번째 상태를

넘어선 것]라고도 합니까?

 

Turiya means that which is the fourth. The experiencers (jivas) of the three states of waking, dreaming and deep sleep, known as visva, taijasa and prajna , who wander successively in these three states, are not the Self. It is with the object of making this clear, namely that the Self is that which is different from them and which is the witness of these states, that it is called the fourth (turiya). When this is known the three experiencers disappear and the idea that the Self is a witness, that it is the fourth, also disappears. That is why the Self is described as beyond the fourth (turiyatita).

 

뚜리야는 네 번째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슈와, 따이자사, 쁘라냐라고 하는

생시, 꿈, 깊은 잠의 세 가지 상태의 경험자는 이 세 가지 상태를 연속적으로 왔다갔다하지만 진아가 아닙니다. 이 점, 즉 진아는 그것들과 다르며 이 세 가지 상태의 주시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것을 뚜리야[네 번째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세 가지 경험자들은 사라지고, 진아가 주시자라는 생각, 그것이 네 번째 상태라는 생각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진아를 뚜리야띠따[네 번째

상태를 넘어선 것]라고 하는 것입니다.

 

9.

What is the benefit derived by the sage from the sacred books (Srutis)?

 

진인이 경전에서 얻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The sage who is the embodiment of the truths mentioned in the scriptures has no use for them.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진리의 화신인 진인에게는 경전이 아무 필요

없습니다.

 

10.

Is there any connection between the attainment of supernatural powers (siddhis) and Liberation (mukti)?

 

싯디(초능력)와 해탈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Enlightened enquiry alone leads to Liberation. Supernatural powers are all illusory appearances created by the power of maya (mayashakti). Self-realization which is permanent is the only true accomplishment (siddhi). Accomplishments which appear and disappear, being the effect of maya, cannot be real. They are accomplished with the object of enjoying fame, pleasures, etc. They come unsought to some persons through their karma. Know that union with Brahman is the real aim of all accomplishments. This is also the state of Liberation (aikya mukti) known as union (sayujya).

 

탐구의 지智만이 해탈을 가져다 줍니다. 싯디라고 하는 것은 모두 마야의

힘이 창조한 환상적인 겉모습들이며, 영원한 진아 깨달음만이 진정한 싯디(성취)입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싯디들은 마야의 작용이며,

실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명성, 쾌락 등을 누릴 목적으로 그것을 성취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라지 않아도 그들의 발현 업에 따라 그것이 찾아옵니다. 브라만과의 합일이 모든 성취의 진정한 목적임을 아십시오. 이것이 합일해탈이라고

하는 수승한 합일의 상태입니다.

 

11.

If this is the nature of Liberation (moksha) why do some scriptures connect it with the body and say that the individual soul can attain Liberation only when it does not leave the body?

 

만약 그것이 해탈의 본질이라면, 왜 어떤 경전에서는 그것을 육체와 연관

지어 개아(個我)는 육체를 떠나지 않을 때에만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It is only if bondage is real that Liberation and the nature of its experiences have to be considered. So far as the Self (Purusha) is concerned it has really no bondage in any of the four states. As bondage is merely a verbal assumption according to the emphatic proclamation of the Vedanta system, how can the question of Liberation, which depends upon the question of bondage, arise when there is no bondage? Without knowing this truth, to enquire into the nature of bondage and Liberation, is like enquiring into the non-existent height, colour, etc., of a barren woman’s son or the horns of a hare.

 

속박이 실제적인 성품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때에만 해탈과 그 체험의 본질을 고려해야겠지요. 그러나 영혼에 관한 한, 실제로 네 가지 상태의 어디에서도 아무런 속박이 없습니다. 속박이란, 베단따 체계에서 힘주어 선언하고 있는 것에 따른 하나의 언어적인 가정에 불과한데, 아무런 속박이 없다면 속박의 문제에 의존하고 있는 해탈의 문제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진리를 모른 채 속박과 해탈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석녀의 아들’이나 ‘토끼의 뿔’을 두고, 그것의 키나 색깔 따위를 탐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12.

If that is so, do not the descriptions of bondage and release found in the scriptures become irrelevant and untrue?

 

만약 그렇다면 경전에 나오는 속박과 해탈에 관한 설명들은 쓸데없고 참되지도 않은 것 아닙니까?

 

No, they do not. On the contrary, the delusion of bondage fabricated by ignorance from time immemorial can be removed only by knowledge, and for this purpose the term ‘Liberation’ (mukti) has been usually accepted. That is all. The fact that the characteristics of Liberation are described in different ways proves that they are imaginary.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헤아릴 수 없는 옛적부터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속박의 망상은 지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고, 이 목적을 위해서 ‘해탈’이라는 용어를 보통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해탈의 특징들이 여러 가지로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상상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13.

If that is so, are not all efforts such as study (lit. hearing) reflection, etc., useless?

 

만약 그렇다면 청문이나 성찰과 같은 모든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까?

 

No, they are not. The firm conviction that there is neither bondage nor liberation is the supreme purpose of all efforts. As this purpose of seeing boldly, through direct experience, that bondage and liberation do not exist, cannot be achieved except with the aid of the aforesaid practices, these efforts are useful.

 

소용이 있습니다.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확고한 인식이 모든 노력의

최고 목적입니다.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을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과감하게 보려고 하는 이러한 목적은 앞에서 말한 수행법들의 도움 없이는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들은 유용합니다.

 

14.

Is there any authority for saying that there is neither bondage nor Liberation?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말씀에는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This is decided on the strength of experience and not merely on the strength of the scriptures.

 

그것은 체험의 힘에 의해 판정되지, 단지 경전의 힘에 의해서만 판정되지는 않습니다.

 

15.

If it is experienced how is it experienced?

 

만약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체험합니까?

 

‘Bondage’ and ‘Liberation’ are mere linguistic terms. They have no reality of their own. Therefore they cannot function of their own accord. It is necessary to accept the existence of some basic thing of which they are the modifications. If one enquires, ‘for whom is there bondage and Liberation?’ it will be seen, ‘they are for me’. If one enquires, ‘who am I?’, one will see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I’. It will then be as clear as an amalaka fruit in one’s hand that what remains is one’s real being. As this truth will be naturally and clearly experienced by those who leave aside mere verbal discussions and enquire into themselves inwardly, there is no doubt that all realized persons uniformly see neither bondage nor Liberation so far as the true Self is concerned.

 

‘속박’과 ‘해탈’은 단지 언어적인 용어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실재성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제 스스로 작용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변상이 되어 나오는 어떤 기본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속박과 해탈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답은 ‘그것은 나에게 있다’가 됩니다. (여기서) 만약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나’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존재라는 것을, 마치 손 안에 든 아말라까 열매처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언어적 토론에 불과한 것은 젖혀두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분명하게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진아)에 관한 한,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속박도 해탈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16.

If truly there is neither bondage nor Liberation what is the reason for the actual experience of joys and sorrows?

 

만약 진실로 속박도 해탈도 없다면, 기쁨과 슬픔을 실제로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They appear to be real only when one turns aside from one’s real nature. They do not really exist.

 

그것들은 우리가 자신의 참된 성품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Is it possible for everyone to know directly without doubt what exactly is one’s true nature?

 

모든 사람이 직접,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참된 성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Undoubtedly it is possible.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가능합니다.

 

18.

How?

 

어떻게 말입니까?

 

It is the experience of everyone that even in the states of deep sleep, fainting, etc., when the entire universe, moving and stationary, beginning with earth and ending with the unmanifested (Prakriti), disappear, he does not disappear. Therefore the state of pure being which is common to all and which is always experienced directly by everybody is one’s true nature. The conclusion is that all experiences in the enlightened as well as the ignorant state, which may be described by newer and newer words, are opposed to one’s real nature.

 

May this book consisting of the words of experience, which have come out of the lotus heart of Bhagavan Sri Ramana Maharshi, shine as a lamp of true knowledge to illuminate the true minds of those who have renounced (the world).

 

깊은 잠이나 기절 등의 상태에서와 같이,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는 전체 우주, 지구를 위시하여 ‘드러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전우주가 사라지는 때에도, 자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공통되며 모든 사람이 항상 직접 체험하는 순수 존재의 상태가 자신의 참된 성품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즉, 깨달은 상태이든 무지한 상태이든, 갈수록 더 새로운 언어로 묘사되는 모든 체험(대상적인 체험)은 자신의 참된 성품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BLESSINGS

May the world be blessed for long with the feet of Guru Ramana who abides as that silent principle which absorbs all of us and remains by itself as the root of the three principles (soul, world and Isw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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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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