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TH REVEALED IN 40 VERSES
40 구절로 표현하신 진리
Sri Ramana Maharshi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한글평역 :푸른글
Forty Verses:
40구절로 된 시에 대해서
One of the devotees of Bhagavan
was the outstanding Tamil poet Muruganar.
He importuned Bhagavan for a cycle of forty verses
giving a succinct synopsis of his teaching.
깨달음의 큰 스승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
'무르가나르'라는 탁월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스승에게 가르침의 큰 줄거리를 담은 간결한 40 수의
연작시를 지어달라고 끈덕지게 졸랐다.
Bhagavan wrote the verses as occasion arose,
and when there were the required number
Muruganar took them and arranged them in continuous form.
Later a supplement consisting of a second forty verses was added.
So indifferent to authorship was Bhagavan
that he did not write all these supplementary verses himself.
그래서 스승께서 시상(詩想)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 두면
한 구절이 완성되는 대로 '무르가나르'는 그 시를 가지고 가서
연작시의 형태로 배열하였다.
훗날 또 다른 40 구절로 구성된 보충 판이 더해졌는데
글에 대해 개의치 않았던 스승께서는
이 모든 보충 구절을 모두 직접 쓰시지는 않으셨다.
When he came upon a suitable one he used it,
mostly translating from Sanskrit, and when not he made one.
In this volume those verses
which he took from older sources are printed in italics.
스승께서는 적절한 글귀가 발견하게 되면 그 글을 사용하였는데,
대개 산스크리트 어로 되어있는 글을 그대로 번역만 하셨고
마땅한 글이 없을 때에는 직접 써내려 가셨다.
이 책의 구절 속에서는 스승께서 옛 자료들에서 발췌한 시 구절은 굵은 활자체로 표기하였다.
These eighty verses are the most comprehensive exposition of the Maharshi's teaching.
A number of translations have been made and commentaries written on them.
They have been published as a separate booklet by the Asramam under the titles 'Ulladu Narpadu', Sad-Vidya' and Truth Revealed'.
이 80구절은 위대한 스승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을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이 글에 대해서는 수많은 번역들과 역자들의 주해가 나와있다.
그 번역본들은 '아스라맘'이 '울라두 나로파두'
'참되고 거룩한 지혜' '드러내 보이신 진리'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소책자로 출간하였다.
INVOCATORY
기원문
If Reality did not exist,
could there be any knowledge of existence?
Free from all thoughts,
Reality abides in the Heart, the Source of all thoughts.
It is, therefore, called the Heart.
How then is one to contemplate it?
To be as It is in the Heart, is Its contemplation.
만일 참다운 실재(實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지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모든 생각들로부터의 자유인,
그 (참다운) 실재는 모든 생각들의 근원인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을 심장(중심)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명상(응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있는 그대로의 본바탕인 참 마음 속에 그냥 머무르는 것
이 상태를 명상이라고 합니다.
Those who know intense fear of death seek refuge
only at the feet of the Lord Who has neither death nor birth.
Dead to themselves and their possessions,
can the thought of death occur to them again?
Deathless are they.
격렬한 죽음의 공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거룩한 주님의 발 아래에서
오직 그 도피처를 찾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에게
다시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도 불멸의 존재인 것을....
1.
From our perception of the world
there follows acceptance of a unique First Principle
possessing various powers.
Pictures of name and form, the person who sees,
the screen on which he sees, and the light by which he sees :
he himself is all of these.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로부터
다양한 힘들을 가진,
유일한 근원적 원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진다.
영상들에 대한 이름과 형상,
보고 있는 사람, 그가 보는 화면,
그가 보는 것에 따라 만들어지는 빛,
바로 이런 모든 것들 그 자신인 것이다.
역자 주)
영화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십시오.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스크린에 나타난 영상,
필름에 빛을 쏘아 영상을 만드는 영사기의 빛줄기.
2.
All religions postulate the three fundamentals,
the world, the soul, and God, but it is only the one Reality
that manifests Itself as these three.
One can say 'The three are really three'
only so long as the ego lasts.
Therefore, to inhere in one's own Being,
where the 'I', or ego, is dead, is the perfect State.
모든 종교들은 세상과 영혼과 하느님이란 세 가지 토대에
근본 이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참된 실재가
그 자신을 이런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나라는 의식(自我)을 지속하는 동안에만
"이 셋이 실재하는 세 가지 근본원리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생각하는 작은 자아(ego,自我)를 없애고,
자기 자신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참된 나(I)'에
머무는 상태가 온전한 경지인 것입니다.
3.
'The world is real.' 'No, it is a mere illusory appearance.'
'The world is conscious.' 'No.'
'The world is happiness.' 'No.'
What use is it to argue thus?
That State is agreeable to all, wherein,
having given up the objective outlook, one knows one's Self
and loses all notions either of unity or duality, of oneself and the ego.
이 세상은 실재이다.
아니다 이 세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이 세상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행복이다. 아니다
이런 논쟁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참된 경지는 모든 것에 응하는 긍정하는 것이니
그 경지라야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는 외부로 향하는 시각을
거두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참된 자아를 알게 되며,
단일성이나 이원성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 등
모든 견해들을 잃어버린다.
4.
If one has form oneself,
the world and God also will appear to have form,
but if one is formless,
who is it that sees those forms, and how?
Without the eye can any object be seen?
The seeing Self is the Eye, and that Eye is the Eye of Infinity.
만일 어떤 사람이 형상에 집착한다면,
세계와 신 역시 형상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죽어서 형상 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 누가 있어 어떻게 형상을 볼 것이라는 말인가?
눈 없이 어떻게 어떤 대상들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늘 지켜보는 참된 자아가 참된 눈이며
그 참된 눈이 바로 '신성한 영원의 참된 눈(Eye of Infinity)'인 것이다.
5.
The body is a form composed of the five-fold sheath;
therefore, all the five sheaths are implied in the term 'body'.
Apart from the body does the world exist?
Has anyone seen the world without the body?
몸은 다섯 겹으로 이루어진 형상으로,
그 모든 다섯 겹이 몸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분리하여 어떻게 세상이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몸 없이 세상을 본 사람이 그 누가 있었단 말인가?
6.
The world is nothing more than an embodiment of the objects perceived by the five sense-organs.
Since, through these five sense-organs,
a single mind perceives the world, the world is nothing but the mind.
Apart from the mind can there be a world?
세상이란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된 대상들이
구체화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다섯 감각기관은
마음을 통해서 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란 마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 마음과 떨어진 그 어떤 세상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7.
Although the world and knowledge thereof rise
and set together it is by knowledge alone
that the world is made apparent.
That Perfection, wherein the world and knowledge there of rise and set, and which shines without rising and setting, is alone the Reality.
비록 세상과 세상으로부터 비롯한 지식이
함께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출현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에 의해서 인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깨달음(Perfection) 속에서는
세상과 세상으로부터 비롯한 지식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깨달음 그 자체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이 빛나고 있으니,
이 온전한 깨달음만이 오직 진정한 실체인 것이다.
8.
Under whatever name and form one
may worship the Absolute Reality,
it is only a means for realizing It without name and form.
That alone is true realization,
wherein one knows oneself in relation to that Reality,
attains peace and realizes one's identity with It.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든, 그 어떤 형상을 취하든,
사람은 '순수한 참된 실재(Absolute Reality)'에 대해 예배할 수
있으니, 이렇게 명칭과 형태를 취하여 예배하는 것은
단지 명칭과 형태가 없는 진정한 실체를 깨닫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순수한 참된 실재'를 아는 것 그것만이 참된 깨달음이니,
그 속에서 사람은 자신이 진정한 실재와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아, 평화를 얻고, 자신이 참된 실재와 동일한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9.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and the trinity of seer, sight, and seen can exist only if supported by the One.
If one turns inward in search of that One Reality they fall away.
Those who see this are those who see Wisdom.
They are never in doubt.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
그리고 보는 자와 보는 행위, 보이는 것이란 삼원성은
거룩한 하나(One, 道, 聖靈, 眞我)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 때에만 오직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진정한 실재인 이 하나를 발견한다면
그것들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것을 본 사람이 지혜를 찾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게 지혜를 찾은 사람은 절대 의혹에 빠지지 않는다.
10.
Ordinary knowledge is always accompanied by ignorance,
and ignorance by knowledge;
the only true Knowledge is that by which one knows the Self
through enquiring as to whose is the knowledge and ignorance.
일상적인 지식은 언제나 무지를 동반하고 있으며,
무지 또한 언제나 지식을 동반하고 있으니,
유일한 참된 지식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식과 무지가
누구의 것인지 묻고 확인하는 방법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다.
11.
Is it not, rather, ignorance to know all else
without knowing oneself, the knower?
As soon as one knows the Self,
which is the substratum of knowledge and ignorance,
knowledge and ignorance perish.
아는 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이,
다른 모든 것 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무지인 것이다.
사람이 지식과 무지의 기초토대인,
진정한 자신(眞我)을 마주하여 알게 되는 순간,
지식과 무지는 무너져 내린다.
12.
That alone is true Knowledge
which is neither knowledge nor ignorance.
What is known is not true Knowledge.
Since the Self shines with nothing else to know or to make known,
It alone is Knowledge. It is not a void.
지식이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아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지혜이다.
(그 어떤 대상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모두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알아야 할 아무 것도 없고 (대상으로) 알려질 것도 없이
스스로 홀로 빛나고 있는 참된 자아만이 참된 지혜이다.
참된 지혜는 공허하지 않다.
13.
The Self, which is Knowledge, is the only Reality.
Know ledge of multiplicity is false knowledge.
This false knowledge, which is really ignorance,
cannot exist apart from the Self,
which is Knowledge-Reality,
The variety of gold ornaments is unreal,
since none of them can exist
without the gold of which they are all made.
진정한 자아, 이것이 신성한 지식이며
이것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수많은 지식의 광맥(鑛脈)들은 거짓된 지식인 것이다.
이 거짓된 지식들은 실제로는 무지인 것이며,
실재하는 참된 지혜인,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의 다양성이 실재같이 보이지만
그것들의 만드는 재료가 되는 금이 없다면
그 다양성도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4.
If the first person, I, exists, then the second and third persons, you and he, will also exist.
By enquiring into the nature of the I, the I perishes.
With it you and he also perish.
The resultant state, which shines as Absolute Being,
is one's own natural state, the Self.
만일 제일먼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면
두 번째로 너라는 사람이 존재하게 될 것이고
세 번째로는 그 외에 다른 사람(he)들이 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본질 속을 파고들어 내가 누구인지 물음으로써 나는 사라집니다.
그렇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너와 다른 사람도 역시 사라집니다.
이런 결과로서 생기는 순수한 존재만이 빛나는 상태,
이것이 사람 자신의 본성의 상태이며 '참 나(眞我)'인 것입니다.
15.
Only with reference to the present
can the past and the future exist.
They too, while current, are the present.
To try to determine the nature of the past and the future
while ignoring the present is like trying to count without the unit.
오로지 현재와 관련이 있을 때에만 과거와 미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역시 지금 이 순간에는 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소홀히 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속성을 측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측정 단위를 정하지 않고 셈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16.
Apart from us where is time and where is space?
If we are bodies, we are involved in time and space,
but are we?
We are one and identical now, then, and forever,
here, there, and everywhere.
Therefore we, timeless and spaceless Being, alone are.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단순히 육체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라면
시간과 공간 속에 포함되겠지만,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이며 지금이나 그때나 그리고 영원히,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일무이한 실재입니다.
17.
To those who have not realized the Self,
as well as to those who have, the word 'I 'refers to the body,
but with this difference, that for those who have not realized, the 'I' is confined to the body
whereas for those who have realized the Self
within the body the 'I' shines as the limitless Self.
참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자신(自我)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라는 말은 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라는 말은 그 말이 자신의 몸에 한정되어 말해지는 것이지만
참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 라는 말은
자신의 몸 속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한 참 자아인 '나'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8.
To those who have not realized (the Self)
as well as to those who have realized, the world is real.
But to those who have not realized,
Truth is adapted to the measure of the world,
whereas to those that have realized,
Truth shines as the Formless Perfection,
and as the Substratum of the world.
This is all the difference between them.
참된 자신(自我)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참된 자신(自我)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세상의 척도에 맞추어 적용되지만,
참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무형의 완전함이자 세상의 기초로써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점의 모든 것입니다.
19.
Only those who have no knowledge of the Source of destiny
and free will dispute as to which of them prevails.
They that know the Self
as the one Source of destiny and free
will are free from both.
Will they again get entangled in them?
운명과 자유의지의 근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그 둘 중 어느 것이 우세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된 사람은 운명과 자유의지가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에
운명에도 자유의지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그 둘에 얽히겠습니까?
20.
He who sees God without seeing the Self sees only a mental image.
They say that he who sees the Self sees God.
He who, having completely lost the ego, sees the Self,
has found God,
because the Self does not exist apart from God.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 채,
하느님(神)을 보고 있는 사람은
단지 자신이 만들어 낸 마음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자신(眞我)'를 보아야만 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몸이 나라는 생각(ego)'을 완전히 버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본 사람은 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나'는 하느님(神)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
What is the Truth of the scriptures
which declare that if one sees the Self one sees God?
How can one see one's Self?
If, since one is a single being, one cannot see one's Self,
how can one see God? Only by becoming a prey to Him.
사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보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경전들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사람이 홀로 떨어진 존재라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스스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느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역자주)
여기서 prey를 직역하면 하느님의 밥(희생물)이 되어야 한다
또 약간 의역하면 '나'라는 작은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만 하느님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밥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평역하였습니다.
22.
The Divine gives light to the mind and shines within it.
Except by turning the mind inward and fixing it in the Divine,
there is no other way to know Him through the mind.
신성(神性)은 마음에 빛을 주고 마음 속에서 빛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으로 향하여
신성(神性)속에 마음을 붙들어 매어두지 않는 한,
마음을 통하여 거룩한 성령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23.
The body does not say "I".
No one will argue that even in deep sleep the 'I" ceases to exist.
Once the 'I' emerges, all else emerges.
With a keen mind enquire whence this 'I' emerges.
몸이 스스로 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깊은 잠 속에서조차 '나'라는 이 생각이
멈추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이 '나'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다른 모든 것들도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진 마음으로
이 '나'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떠오르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24.
This inert body does not say "I".
Reality-Consciousness does not emerge.
Between the two, and limited to the measure of the body,
something emerges as 'I'.
It is this that is known as Chit-jada-granthi
(the knot between the Conscious and the inert),
and also as bondage, soul, subtle body, ego, samsara, mind, and so forth.
자기 스스로의 동력을 가지지 못한 몸을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몸은 스스로 실재 - 의식을 떠오르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 몸이라는 제한된 한계 안에서
무엇인가가 '나'라고 하면서 떠오릅니다.
이것이 바로 치트 - 자다-그란디
(의식과 스스로는 동력이 없는 의타적인 것 사이의 매듭)로,
우리에게 속박, 영혼, 유체(幽體), 에고(小我), 윤회, 마음 등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역자주)
여기서 자력이라 함은 사람의 의지 없이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소화기관같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활동은
몸의 자력(自力)이 아니냐고 한다면 말장난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몸이 자신 스스로 움직인다면 사람이 죽은 후에
왜 몸이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5.
It comes into being equipped with a form,
and as long as it retains a form it endures.
Having a form, it feeds and grows big.
But if you investigate it this evil Spirit,
which has no form of its own,
relinquishes its grip on form and takes to flight.
마음이 형상을 갖추게 되면 존재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지탱됩니다.
형상을 가지게 된 마음은 먹이를 먹고 점점 크게 자랍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되면
자기 힘으로는 어떠한 형상도 가질 수 없는 악령(惡靈)인 마음은,
형상에 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짓을 그만두고 달아나 버립니다.
26.
If the ego is, everything else also is.
If the ego is not, nothing eke is.
Indeed, the ego is all.
Therefore the enquiry as to what this ego is,
is the only way of giving up everything.
'나라는 생각(ego, 小我, 假我)'가 있다면 모든 것 또한 있고,
'나라는 생각(ego)'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 역시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ego)'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계속 묻고 찾는 것만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역자주)
나를 버리면 얻을 것이며 죽어야 살 것이다.
27.
The State of non-emergence of 'I'
is the state of being THAT.
Without questing for that State of the non-emergence of 'I'
and attaining It, how can one accomplish one's own extinction, from which the 'I' does not revive?
Without that attainment how is it possible to abide in one's true State, where one is THAT?
'나' 라는 것이 출현하지 않은 상태
바로 이 상태가 그것(THAT)의 '경지'입니다.
'나' 없는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전혀 없어,
그것(It)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을 완수하여
그 '나' 라는 생각이 다시 살아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머물러
자신이 바로 그것(THAT)이 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역자주)
여기서 THAT은 참된 자아(眞我), 성령(聖靈), 하나님,
신(神), 도(道), 깨달음, 부처를 이룸, 견성(見性), 성불, 해탈,
여여(如如)등 이 모든 것을 모두 포함하는 표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다.
그것은 도(道)나 깨달음으로 표현하면
얻거나 구해야 한다는 집착이 생기고
신(神)이나 성령(聖靈)이라고 표현하면
자신이 상상하는 형상에 집착하게 될까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그것(THAT)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28.
Just as a man would dive in order to get something
that had fallen into the water, so one should dive into oneself, with a keen one-pointed mind, controlling speech and breath, and find the place whence the 'I' originates.
물 속에 빠진 것을 건지기 위해 물 속에 뛰어 들 듯,
그렇게 사람은 모진 마음을 먹고 한 곳에 집중된 마음으로
자신의 말과 숨결을 조절하며 자기 자신 속으로 뛰어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29.
The only enquiry leading to Self-realization is
seeking the Source of the I with in-turned mind
and without uttering the word 'I'.
Meditation on 'I am not this;
I am That' may be an aid to the enquiry but it cannot be the enquiry.
진정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물음은
자신의 안으로 향한 마음으로, '나' 에 대해 이런저런 말없이,
'나'라는 것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30.
If one enquires 'Who am I?' within the mind,
the individual 'I' falls down abashed
as soon as one reaches the Heart
and immediately Reality manifests itself spontaneously as "I-I".
Although it reveals itself as "I",
it is not the ego but the Perfect Being, the Absolute Self.
만일 구도자가 마음속으로
자신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보면,
개인적인 '나' 는 당황하여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그 순간 구도자는 마음의 중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실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진정한 나인 '참 나'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1.
For Him who is immersed in the bliss of the Self,
arising from the extinction of the ego,
what remains to be accomplished?
He is not aware of anything (as) other than the Self.
Who can apprehend his State?
'나라는 생각(ego)'이 소멸하자 나타난,
'참 자아(Self)'의 축복 속에 온전히 젖어 있는 사람에게
더 이상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으니, 그 누가 그 사람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2.
Although the scriptures proclaim 'Thou art That',
it is only a sign of weakness of mind
to meditate 'I am That, not this',
because you are eternally That,
What has to be done is to investigate what one really is
and remain That.
모든 경전들이 '네 자신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다'라고
명상하는 것은, 단지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히 그것(That)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찾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뿐입니다.
33.
It is ridiculous to say either
'I have not realized the Self or 'I have realized the Self;
are there two selves,
for one to be the object of the other's realization?
It is a truth within the experience of everyone
that there is only one Self.
'나는 참된 나를 깨달았다' 라고 말하거나
'나는 아직 참된 나를 깨닫지 못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자아가 있어,
하나가 다른 하나의 깨달음을 위한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인가요?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체험으로 알고 있듯이
오직 하나인 '참된 자아(Self)' 이것이 진리입니다.
역자주)
내가 이렇게 살지 말고 깨달음을 얻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하려면 도를 닦든지 뭔가를 해야만 할 텐데.
난 바빠서 그리고 집안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이런 생각들이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구도자의 생각입니다.
스승이란 제자의 헌신에 답하여 참 자아를 보는 법을
알려주는 분으로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들이지
형상을 가진 것이나 형상을 가지지 않은
무엇인가를 주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34.
It is due to illusion born of ignorance
that men fail to recognize
That which is always and for everybody the inherent Reality
dwelling in its natural Heart-center and to abide in it,
and that in stead they argue
that it exists or does not exist,
that it has form or has not form,
or is non-dual or dual.
무지로부터 비롯된 환상(未忘) 때문에
인간은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늘 지니고 있는,
하늘의 심장 중심에 거주하고 있는 '참다운 실재'를
인식하여 그 속에 머무르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형태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것은 이원적인가 아니면 비이원적인가 따위의
쓸데없는 논쟁들을 늘어놓으며 날마다 떠들고 있습니다.
역자주)
여기서 심장이란 마음의 근원이 머무는 중심이라는 뜻이지
우리 몸 왼쪽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백날 그 맛에 대해 이야기한들 소용없습니다.
음식을 먹어야 맛을 알고 배가 불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책으로 배운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35.
To seek and abide in the Reality that is always attained
is the only Attainment.
All other attainments (siddhis) are such as are acquired in dreams.
Can they appear real to someone who has woken up from sleep?
Can they that are established in the Reality
and are free from maya, be deluded by them?
참다운 것을 찾아
항상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 참다운 실재 속에 머무는 것,
오직 이것만을 성취(成就)라고 합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성과(siddhis)는 꿈속에서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에게 꿈속의 그 일들이 현실이겠습니까?
참다운 실재 속에서 굳건히 머물러 평안을 얻고
환상의 그림자(maya, 幻影)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그것들에 의해 미혹되어 망상에 빠지겠습니까?
36.
Only if the thought 'I am the body' occurs
will the meditation 'I am not this,
I am That help one to abide as That.
Why should we forever be thinking, 'I am That'?
Is it necessary for man to go on thinking 'I am a man'?
Are we not always That?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라는 명상은
오직 '이 육체가 나이다'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에만,
'참된 본성인 그것(That)'으로 머무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늘 '나는 그것이다' 라고 생각해야만 합니까?
인간이 '나는 인간이다' 라고 계속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는 언제 그것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요?
37.
The contention 'Dualism during practice,
non-dualism on Attainment is also false.
While one is anxiously searching,
as well as when one has found one's Self,
who else is one but the tenth man?
'수행하는 동안에는 이원론이지만,
성취했을 때는 비이원론이다' 라는 주장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구도자는 그 자신은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에도
그 자신이 참된 자아를 발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열 번째 사람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닌 것입니다.
역자주)
이원론과 비이원론에 대해서는
성철스님이 頓悟漸修와 頓悟頓修에 대해 강의한
禪門正路(장경각. 성철스님 법어집 1집 3권)에 잘 나와있다.
This refers to a traditional story of a party of ten fools
who were traveling together
They had to cross a river and on reaching the other shore
wanted to check up whether all of them had got safely across.
Each one counted in turn,
but each one counted the nine others and forgot himself.
So they thought the tenth man had been drowned
and began to mourn him. Just then a traveler came past
and asked them what was the matter.
He at once saw the cause of their mistake
and in order to convince them lie made them
walk past him one by one,
giving each one a blow as he passed
and telling them to count the strokes.
열 번째 사람(tenth man)이란
바보들 열 사람이 사람 수를 세면서 자신을 빼고 헤아려
항상 한 사람이 모자란 아홉 사람이라고 하며 그 사람을 찾다가,
어느 날 자신을 빼고 센 것을 알게 되어
없어진 한 사람에 대한 걱정을 버리게 되었다는
전래민담을 인용하신 것이다.
38.
As long as a man is the doer,
he also reaps the fruit of his deeds,
but as soon as he realizes the Self
through enquiry as to who is the doer
his sense of being the doer falls away
and the triple karma is ended.
This is the state of eternal Liberation.
인간이 그 자신이 행위자인 한,
자기 행동에 대한 열매를 거두어 들여야 하지만,
누가 진정한 행위자인가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진정한 자신(眞我)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자신이 행위자라는 존재의식은 떨어져 나가고
삼중으로 겹겹이 싸여있던 업보(karma, 業報)가 끝납니다.
이것을 일컬어 영원한 해탈(解脫)의 경지라 합니다.
39.
Only so long as one considers oneself bound,
do thoughts of bondage and Liberation continue.
When one enquires who is bound the Self is realized,
eternally attained, and eternally free.
When thought of bondage comes to an end,
can thought of Liberation survive?
사람이 자기 자신 스스로 속박되어 있다고 여기는 한,
속박과 해탈에 대한 관념들은 계속 유지되어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물어
'참된 나'를 인식하게 되면, 온전한 지혜를 얻게 되어
완전한 자유를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속박이라는 생각이 끝났을 때
해탈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40.
If it is said that Liberation is of three kinds,
with form or without form or with and without form,
then let me tell you
that the extinction of the three forms of Liberation
is the only true Liberation.
만일 해탈을 세 종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상이 있는 해탈(有相解脫),
형상이 없는 해탈(無相解脫),
그리고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해탈(有無相解脫)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이 세 종류 해탈을 소멸시켜 넘어선
그 해탈만이 유일하며 참된 해탈이라고.
THE END
Excerpt from the Collected Works of Ramana Maharshi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모음집에서 발췌
The Collected Works of Ramana Maharshi
Edited by Arthur Osborne - 6th Revised Edition,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