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Nisar gadatta Maharaj

'내가 있다''를 착파ᆞ앎ᆞ내려놓음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0.08|조회수105 목록 댓글 1

* '내가 있다''를 착파ᆞ앎ᆞ내려놓음


질문자 :

저는 오직 저 자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마하라지 :

하지만 그대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까?

질문자 :

당신께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마하라지 :

제 앞에 그대의 정체성을 놓아 보십시오.
그러면 축복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이가 자신의 시작도 모르는데
어떻게 누구에게 간청할 수 있습니까?​

그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데,
왜 아직도 이런 것들을 다 끌어 안습니까?

질문자 : ​

그것은 본능입니다.
저희는 아직도 이런 것들을 다 끌어안습니다.

마하라지 :

그 본능적 반란이 무엇입니까?
태어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은
그런 충동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깊은 충동을 가지고 있을 때,
오직 그럴 때만
깨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까지는
온갖 노력을 다 하게 되겠지만,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이익을 취하겠지요.

장님이 맷돌을 갈고 있으면
개가 밀가루를 먹어 버리듯이 말입니다.

질문자 :

이 장님 상태를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 :

꾸준히 진아 안에 안주하면 됩니다.
진아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진아에 대해 완벽한 앎을 얻으려면
'꾸준함'이라는 하타요가를 얻어야 합니다.

질문자 :

그런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습니까?

마하라지 :

예, 아주 드물게
천만 명에 하나정도지요.

그대는
이런 수학적 계산을 하고 나서
탐구를 포기한 것입니까?

질문자 :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

마하라지 :

귀를 잡아당겨 보고나서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했습니까?

질문자 :

계속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하라지 :

그대가 가진 개념들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인은 개념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는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아무런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질문자 :

그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고
과거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모르시고요.

라마크리슈나 빠라마한사는 어머니(깔리여신)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오, 어머니,
저를 '생각과 앎' 너머로 데려다 주십시오.
저는 그것들로 미쳐 있으니까요"
라고 말입니다.

마하라지 :

그대 자신도
생각과 앎을 넘어서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남을 왜 들먹거립니까?

질문자 :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마하라지 :

그 방법을
자신에게 써 보지 않았다면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왜 남의 판단을 끌어 옵니까?


말이 없이
그대가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말이 없이
어떻게 그대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대가 태어난 역사를 압니다.

그대가 왜 어떤 사람을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대 자신의 자아에
신경쓰지 않고
​라마크리슈나나 빠라마한사와 같은
남들에 대해 신경을 씁니까?

그대가 무지하다면
남들에 대해서 무방하겠지만,

그대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해서만
물으십시오.

제가

1.
'내가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기쁘게 해 주었을 때
(즉, '내가 있음'을 착파했을 때),

2.
그때서야
저는 이 '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3.
그 과정에서
나, 절대자는

그 '내가 있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모든 지식을 수집했으면
홀로 물러나
그것을 참구하십시오.

질문자 :

마하리지께서
저를 축복해 주시면
제가 깨달음을 얻을 겁니다.

마하라지 :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축복해 주기만 하면
어떤 부부가 자식을 얻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 :

'내가 있다'는 앎은
하나의 저주입니다.

마하라지 :

'내가 있다'는 앎은
우연적이고 자발적입니다.

1.
'내가 있다'의 시작은
'내가 있다'는
전화 메세지를 받을 때입니다.

2.
그리고
['내가 있다'는 정보를 내가 가질 때],

그것이
가네샤 상태입니다. ​

질문자 :

왜 가네샤는
태초의 음(音)인 쁘라나바, 즉 '옴'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까?

마하라지 :

가네샤는
생기(prana)의 앎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생기의 산물인
쁘라나마로부터
음성언어가

네 단계
ㅡ 빠라, 빠시얀티, 마드햐마, 바이카라 ㅡ
를 거쳐 발전합니다.

빠라는,
근원이자
가장 미세한 단계인 반면,

바이카라는,
가장 거친 단계로서
음성언어가
발화(發話)되는 것을 대표합니다.

빠라 이전의 상태는
'존재애', 사랑의 느낌인데,

그것이
모든 활동을 일으킵니다.

그 상태가
가네샤입니다.

                        
ㅡ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ㅡ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0.09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