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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sar gadatta Maharaj

<경계선이 없는 것>은 그 말의 통상적 의미에서 체험될 수 없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1.01|조회수116 목록 댓글 1

* <경계선이 없는 것>은 
그 말의 통상적 의미에서 
체험될 수 없다. 



있음 없이 
없음이 있을 수 없다. 


무(無)란 관념이다. 


무(無)는 
어떤 것(있음)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


'내가 있다', 마음, 의식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주시하기, 의식>은
<마음을 주시하는 것>이다. 


주시자는 
주시되는 것(마음)에 
부속된다. 

(화가가 그림 안에 있음)



존재-의식-지복은 
서로 상대적이며 
서로에게 의존한다. 


실재는 
자신의 표현들로부터 
자유롭다.


움직임이 있으면 
현현자이고, 

움직임이 없으면 
미현현자이다. 


그러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음일 뿐이다.


지각할 수 있거나
관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일 수 없다.


매 순간 그대에게 
원치 않게 닥쳐오는 
그 어떤 일도 

신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라.


삶을 오는대로
받아 들여라. 


그러면 삶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놓아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모험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일체를 놓아버려서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규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라.


독립성을 
깨닫게 되려면 

그대가
의존하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그것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삶에 대해서 
완전히 열려 있어서 

삶을
일어나는대로 
받아 들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상태에 머무르라. 


주의를 주지 말고 
사물들이 오든 가든
내버려 두라. 


《욕망과 생각들》도 《사물》이다. 
《욕망과 생각들》을 《무시하라》.


《그대는》 
기억들 외에는 보지 못한다.》 


먼지가 
앉을 겨를이 없이 

그것(기억)을 
털어버려라. 


그러면 
예전의 층들이 
드러날 것이다. 


기억과 기대에서 
벗어난 단순한 자각, 

이것이 바로 
<발견>이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마음이라는 거울> 안에서 

<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거울>은 그대로 남는다. 


움직이는 것 속의 
움직이지 않는 것, 

변하는 것 속의 
변치않는 것을 

식별하는 법을 배워라.


그대가
해야할 일은, 

기억과 기대를
버리는 것이
전부이다.


스스로 
발견하지 않으면 
자신의 길이 아니며,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경험에 
아무 가치도 부여하지 말고, 

그 경험이 
끝나는 대로 잊어버려라. 


순수한 '무욕'의 삶을 살아라. 


그뿐이다.


마음 자체가 
(환의) 창조주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그다지 참되지 않다. 


왜냐하면 
창조된 것(환)과

창조주(마음)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세계는 
별개가 아니다. 


그대가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라. 


모든 
공간과 시간은 
마음 안에 있다. 


마음을 넘어서는 세계를 
어디서 발견하려고 하는가?


마음에는 
많은 수준들이 있고, 

그 각각이 
자기 나름의 세계를
투사한다.


자기 자신을 
'지금 여기 있는 자'로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지가 끝이 나면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때가 되면 사물들이 
는 그대로 보이는데, 
모두 훌륭하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대는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꿈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어떤 댓가라도 치르려고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고요히 있으려고 
애쓰지 마라. 


'고요히 있음'을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
삼지 마라.


그대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그대가 발견한 것만이 

그대에게 영구적으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쓸모 있고 
얻는 바가 있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의
'느낌'과 '이해'뿐이다.


'나'의 
자기동일시 범위가 
좁으면 좁을수록 

욕망과 두려움에 
기인하는 고통은
더 격심하다.


실재는
어느 한 순간에도 
'기억'되지 않는다. 


실재는 실재한다. 


실재를 
독특하게 하는 것은 

그대가 
현존한다는 느낌이다.


그대가 
'자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늘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은 안다'
고 말할 수 있고, 

'나는 없다'라는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


묘사될 수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일 수 없고, 

본래의 그대는 
묘사할 수 없다. 


자기 규정이나 
자기 묘사를 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그대 자신이 존재함으로써만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다.


지각할 수 있거나 관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대가 아니라는 것, 


의식의 장 안에 나타나는 그 무엇도 

그대 자신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라.


몸과 마음을 
지각하기는 하되, 

그대가 
'몸' 안에 있지도 않고, 

'마음' 안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참나-앎(진아지)이다.


그대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앎으로 여긴다. 


하지만,
참된 앎은 

내면으로부터 
솟구쳐 오른다. 


그대가
본래의 그대를 알 때, 

<그대>는 또한 
<그대가 아는 대상>
이기도 하다. 


지(知)와 
존재(物) 사이에는 
아무 간격이 없다.


알려지는 것과 
별개의 '아는 자'로서의 
그대 자신을 만나라. 


순수한 존재로서의 
그대 자신을 알게 되라.


마음을 이해하라. 


그러면 그대에 대한 
마음의 지배가 단절될 것이다. 


욕망과 두려움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라. 


알려지는 것을 '아는 자'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라.


《시간과 공간》은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고, 
영원하며, 도처에 있다.


그대가 무엇을 보든 
그것은 늘 
그대 자신의 존재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는 
그대가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상계에서
완전함이란 없다.


경계선이 없는 것은 
그 말의 통상적 의미에서 
체험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오직 그것이 
<될 수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연코, 
늘 움직이고 있는 의식의 
전체 내용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실재는
의식 안에 있지만, 

실재는
의식도 아니고 

그 의식의
내용물 중의 
어느 것도 아니다. 


그대의 
지(知, 의식) 바깥에 
세계가 있는가? 


작은 것이 전체를
'투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를
'포함'하지는 못한다.


그대의 세계가 
아무리 대단하고
완전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모순적이고, 

찰나적이며, 
모조리 환이다. 


성실성, 

예리한 지각성, 

열성적인 탐구, 

깊은 탐색을 통해, 

이해하라! 


가차없이 노력하라!  



ㅡ 아이 앰 댓(I AM THAT)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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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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