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인격적 존재> 안에서는
<보는 자>도 없으며,
<보이는 대상>도 없다.
V(방문자):
마하라지님을 친존하는 동안
저는 신체적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M(마하라지):
체험을 이해하려 할 때,
그대가 말과 개념으로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대는 (그 체험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知)가 아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사람들에게 기간을 연장하여
더 머물도록 부탁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리 오래 머문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와서
처음 8일 내지 10일 사이에
다소 이해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우선
바르게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
그는 이곳을 떠난 뒤에
혼자 오랫동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성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갈구한다.
그는 영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논의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매우 불행하다고 느낀다.
만약 그대가
다른 수행자들(sadhakas)을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행복과 만족을 느낄까?
(통역자를 통해)
질문하기를,
진지한 구도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공유하는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이
불필요한지를 물었다.
나의 답은, 이것은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해
토의하고 견해를 나누는
이런 '욕망'이
그쳐져야 한다.
저 최고의 상태는
<태어나지 않은 상태>로,
거기에는
<어떤 체험도 없다>.
[통역자가 말한다,
오늘 마하라지님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당신은 매우 허약하며
거의 멍한(daze) 상태에
있습니다.]
이 병이,
즉 현재의 나의 건강 상태가
있기 전에, 나는 이미 있었다.
이 병은 일시적인
단계로서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더 앞에
존재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병이 찾아오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병이다.
만약
병든 사람이
이러한 원리를
기억한다면,
다시 말해,
병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이미 있었고,
그의
참된 본성은
그 병보다
늘 앞서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가 정말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그러면
그 병의 영향력도
더 약해질 것이다.
반면에 소위
‘총명한’ 사람들은
아프게 되면,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고 상상함으로써
그들의 죽음을 앞당길 것이다.
그대가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대는 무엇을 이해하는가?
그대는 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꿈은, 드라마나
연극 같은 것이 아닌가?
<의식의 빛> 안에
<온갖 종류의 연극>이 일어난다.
<꿈>도 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결국 꿈은, 점차
의식 속으로 합일된다.
이 의식이
그의 존재를 가리키는
표시이고,
의식이, 사실 의식적 존재
- 내가 의식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모든 당혹감이 끝나게 된다.
따라서
그 존재 그 자체 내에서는
무언가를 보는,
존재하는 개인이 전혀 없다.
<비인격적 존재> 안에서는
<보는 자>도 없으며,
<보이는 대상>도 없다.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비인격적 존재>라 함은
어떤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보증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여기서 말한 내용을
이해한 사람에게,
꿈이란
(생시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둘 다(꿈과 생시)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빛> 때문에
우리는 하나를 '생시'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둘 다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며,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이 <비인격적 존재> 그 자체 내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형태나 모양이 없는 <의식의 빛>이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빛' 안에서 보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연극에서 행위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오직 의식의 빛이,
다양한 것들의
일어남을 보여 줄 뿐이다.
V:
배우는 연극의
일부분이 아닙니까?
M:
왜 무언가가 우리에게
실제적이거나(actual)
실재하는 것으로(real)
보이는가?
우리가 매일
혹은 자주 보는 것이,
실재(reality)나
실제(actuality)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꿈속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더 실제적이며
더 실재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꿈과 생시는 동일한 것>이다.
즈나니는 어떤가?
즈나니는 불꽃이 없는
담배 라이터와 같다.
라이터 불이 켜지면,
의식이 들어온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의식의 빛 안에서 보인다.
그러나
의식의 빛이 있든 없든 간에,
즈나니는 항상 있다.
'깊은 잠' 속에서
우리는, 불이 켜지지 않은
라이터의 상태와 같다.
빛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상태에서
빛이 나타날 수 있다.
약한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꿈이 나타나고,
우리는 그 꿈속에서
그 꿈의 일부분으로
행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어떤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오직
전체 현상계에 대해,
그리고 그 현상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인격적 의식> 때문에
<비인격적 존재>가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발생한다.
(5원소에 불과한) '몸'과
'생명의 호흡'과 '의식'으로
구성된 복합체는,
모양이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세 가지 모두를
몸으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해진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의 <토대>를 깨닫게 되면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게 된다.
즉, '전 현상계'는 오직
'비인격적 의식' 안에 존재하며,
그 비인격적 의식은
보편적 존재(Presence),
비인격적 존재이다.
반면에,
남성이나 여성의 몸을
갖고 있다는 이러한 부담이
비인격적 존재로부터
제거되지 않는 한,
고통은 계속될 것이고
불행도 지속될 것이다.
몸과 생명의 호흡과
지각성(knowingness, 의식)으로
구성된 이 복합체는,
‘내가 있다’는 앎이 없을 때는
그 자신을
‘내가 있다’로서 알지 못한다.
생명력도
우리 자신이다.
그것은 형태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각성도 형태가 없다.
이제 이 생명력은
음식의 정수인
몸에 의존하여
그 자체를 유지시킨다.
그리고 생명력이
마나스(manas)에
의존해 있을 때,
그것은 마음이다.
그래서 그 생명력도
마음에 매달려 살아간다.
이 생명력이
모든 활동의 행위자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이 앎은
단순한 주시자에 불과하지만
(주시하려면)
이 전체적인 복합체가 있어야만 한다.
거듭 말하지만,
저 생명력은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있다’는 앎이 없으면,
행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앎은 오직 유지되는
몸이 있을 때만 이용될 수 있다.
이제 그대가
몸과의 관계 때문에
이 생명력과
‘내가 있다’는 앎을
남자 혹은 여자라고 여기는
그 짐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대는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내가 든 예들이
다소 저속할지 몰라도,
나의 의도는
오로지 더 강한 충격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즈나니가 몸을 버리면
그는
어떤 느낌을 가지겠는가?
어떤 종류의 기쁨이나
지복을 체험하겠는가?
방금 결혼한
부부를 상상해 보라.
그들이 첫날밤에
얻는 기쁨은
즈나니가 자기
몸이나 생명력을
버릴 때 얻는
최상의
지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최고의 날’
(보통 영적인 말로
사용되는 용어)에
최고의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최상의 지복이라고 부른다.
결혼 첫날밤의
사랑의 유희와 비교할 때,
두 부부가 합체를 통하여
어떤 기쁨을 실현하든지,
즈나니가
생명의 호흡과 지각성과의
분리를 통하여, 얻는 행복은
수천 배나
더 크다고 하겠다.
그들(부부)은
한 몸으로 합쳐지지만,
그는
분리되고 있지 않는가!
이 담배 라이터의 예를 보자.
라이터는 니르구나라자스
(nirgunarajas)와 같은 것이다.
즉, ‘열이 있는 상태’이다.
나의
원래의 참된 상태는
니르구나라자스이다.
이제
라이터 위에,
라이터 때문에
불꽃이 나타난다.
그 불꽃 속에
‘내가 있다’는 앎이 있고,
마음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
<생명력>이
모든 활동을 수행한다.
<마음>은
의사소통을 하고,
<‘내가 있다’는 앎>은
단순한 주시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불꽃이
있어야만 한다.
즉, ‘내가 있음’과
생명의 호흡과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나의 상태는
니르구나라자스이다.
나는 단지
저 라이터와 같다.
불꽃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나는 니르구나이고,
니르라자스이다.
나에게는
어떤 속성도 없다.
나의 상태에서는
존재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어떤 라자스도 필요하지 않다.
그 말은
내가 어떠한 오락 활동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참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성(knowingness)
혹은
‘내가 있음’의 상태가 있고,
또한
생명의 호흡과 마음도
존재해 있을 때,
이것은 라이터의
니르라자스 상태와
비교하면
라자스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직업이나
오락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서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할 일 없이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이런 저런 일에
몰두해야 한다.
생명의 호흡이
몸을 떠날 때,
‘내가 있음’도
또한 사라진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니르라자스 - 니르구나
상태뿐이다.
나는 전자(前者)를
불꽃 상태 즉, ‘내가 있음’
이라고 부른다.
앞서 나는 그것이
사구나브라만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몸이 있고,
생명의 호흡이 있고,
마음이 있다.
그리고 저 지각성
혹은 ‘내가 있음’이 있다.
그 모든 것이
마야에 의해 환대받고 있다.
이 존재성이나
마야가 없는 상태가 바로
니르구나-니르라자스 상태,
즉 (마야보다 앞서 있는)
마야띠따, 곧 절대적 상태이다.
백 년 전에 그대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때 그대는
‘내가 있다’는 앎을
갖지 못했다.
그대가 존재한다는
기억이 없었다.
현재,
일시적인 단계에서,
그대는
‘내가 있다’는 앎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앎'을 가지기 위한
선행조건은 무엇인가?
(음식의) 정수,
사뜨와 구나가 필요하다.
이것은 ‘내가 있음’
혹은 이 존재성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음식 기운의 정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수는
다시 음식으로 된 '몸'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즉
음식 몸의 정수,
‘내가 있다’는 앎,
생명의 호흡과 마음,
이 모두가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음식의 정수가
유용할 수 있는 한,
지각성이
지속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앎이,
그 자체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그 자체를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그것은 이 상태를 떠나,
절대적인 상태,
곧 앎이 없는 상태에
거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 속에,
즉 앎의 상태에
거주해야만 한다.
좌선을 할 때마다 그대는
자신이 남자 혹은 여자라는
형상의 개념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 개념들을 버려라!
그런
명상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희유한 자만이
몸-마음과의
그런 동일시 없이
명상을 할 것이다.
V:
저는 당신의 상태를,
본래의 당신에 대해
일견했습니다.
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저는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아내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저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긴장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긴장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M:
간단히 말하겠다.
그대가
이 시체라는 생각을 없애라.
몸은
항상 죽어 있다.
몸은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그대가 가지고 있는
‘내가 있음’에
의해서만 살아 있다.
그대는 몸이 아니다.
확고하게
이 개념을 붙들고 있어라.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질문하고
싶어 못 견디고 있군. [웃음]
V:
그 상태와
저의 현재 상태 사이에는
아주 큰 간격이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습니다.
저는 수행을 해야 하고,
저 자신과 그 모든 것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분주한 생활 속에서
이 모든 종교적, 세속적 의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M:
자연요법에 의지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이득이 되게 한다.
각종 사회사업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많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이 깨어 있는 상태와
수면 상태 전체에 질려 버렸다.
이 두 상태가 없을 때
나는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 있었다.
그대는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상태가 없을 때
‘슬픔’과 ‘불행’이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있다’는 앎은
5원소의 상태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대는 그것이 아니다!
절대자로서의 그대는
‘내가 있다’는 앎이 아니다.
V:
대부분의 우리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신물이 났습니다.
어떤 충동이 있습니다만,
이 일상적인 힘든 일로부터
물러설 만큼
충분히 강하지도 않습니다.
M:
그대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이 몸이고,
자신이 마음이고,
자신이
이 사뜨와-구나라는
사실에 분개해야 한다.
‘나는 몸이 아니다’라는
관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몸과 몸 안에....
그것은 동전과 같다.
한 면에는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호흡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내가 있다’는 앎이 있다.
생명의 호흡이 있을 때만
‘내가 있다’는 앎도 존재한다.
생명의 호흡이 몸을 떠나면
‘내가 있다’는 앎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 둘은
음식의 정수로 된
'몸의 소산'이다.
나는 그것이 아니다.
이 전체 복합체는 내가 아니다.
이것을 그대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대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들은 음식의 분자들,
저 음식의 정수이다.
저 음식의 정수들이
그대의 진짜 조상이다.
지상에는 생장하는
생장물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바나스빠디(vanaspati)
라고 부른다.
그 바나스빠띠의
가장 순수한 형체가
바로
음식의 정수이다.
거기에서부터
바차스빠띠(vachaspati)가
성장한다.
후자는
곤충, 벌레, 벌, 포유류 등
모든 종류의 동물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러한
바나스빠띠의
정수를 먹고 산다.
이제
그 바나스빠띠 주스 속에
즉 그 가장 순수한 형체의
식물 주스 속에
과립이라는 분자도 있는데,
거기에는
사뜨와-구나, 라자스-구나,
따마스-구나가 들어 있다.
가장 순수한
형체인 분자 속에는
세 가지 모든
특성이 다 들어 있다.
<사뜨와-구나>는
단순한 주시자, 존재성,
‘내가 있음’의 감촉이다.
<라자스-구나>는
활동성이다.
이 구나가 있어서
그대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따마스-구나>는
그 활동에 대한
원작자의 권리나
공로의 인정을 나타낸다.
우리가 경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과는 달리,
그대의 조상은 이러한
밀과 쌀의 낟알 속에 있으며,
그런 것의 정수 속에
우리의 조상이 있다.
그 안에, 우리 세계의
참된 정수가 있다.
ㅡ 《공의 경험》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