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시자가 되십시오.
그 주시하기가 <앎>입니다.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의식은
무수한 형상을 통해
작용하지만,
의식이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공간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지만
공간 자체는
동일하지 않습니까?
의식은
여러 형상을
통해서
작용하지만
의식 자체는
<동일>합니다.
두 개의 상이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가
생기는 것은,
서로
다른 형상들과,
(의식)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
입니다.
어떤 경험,
즉 어떤 지각 혹은 인식에서도,
이 지각이나 인식을
<지켜보며> 앉아 있는
누구 혹은 무엇이 있습니다.
만약
육신과의 동일시가 없다면,
이 들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이 들음을 인식하는
저 <지켜보는 원리>가 먼저입니까?
탄생, 죽음,
환생 등의 관념은
모두 개념이며,
개념화된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의 뿌리,
그 모든
개념화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어느 단계에서는,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각>도 없고
<의식>도 없었습니다.
몸과 의식이
이 모든
지각과 인식을
하게 되면서,
개념화가
시작되었고,
이 의식, 욕망이
점차 물러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면
개념화도
정지됩니다.
일어난
어떤 이야기도
자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만약
질문이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없을 것입니다.
몸과 의식 간의
관계를
이해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즉 '내가 있다.
내가 살아 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확신은
의식에서 비롯되며,
<몸>이 없으면
이 <의식>이 그 자신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떤 관계입니까?
의식은
몸 형상의 맛인데,
그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려면
하나의
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음식물에 의해
부단히
조화가 유지될 때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음식 기운에 지나지 않고,
의식은, 그 몸 형상의
<기운>이요 <성품>입니다.
만약
<태양>과 그 <빛>을
둘로 본다면,
이 <의식=태양>과,
<그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는 것=빛>도
둘이겠지요.
그 둘은
똑같은 것입니다!
형상이 없으면,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
하지 못합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려면
그 자신을
형상으로
나투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이 무수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무수한 형상을 통해서
작용하고,
한 형상이
창조되었다가 파괴되면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된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어디 있습니까?
의식은
그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동일시의
본질입니다.
의식은
그 자신을 나투어
하나의
형상을 갖자마자
그 형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그 동일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몸이 있는 한,
그것이
항상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의식이, 일단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여
보편적으로 되면,
현상계의
특정한 형상과의 동일시를
상실하고,
전체 나툼과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형상과의 동일시를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라는
개인적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세간적인 일이나
업무를
이행하게 됩니다.
한 개인적
형상이 있는 한
그것은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를
영위하게 되는 것이
<의식의 성품>
이기 때문입니다.
이 형상이
일어날 때까지는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이 형상이
일어난 뒤부터입니다.
그래서
의식과 특정 형상 간에
그렇게 친밀한 연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동일시가
일어납니다.
누구도 세계를
창조한 적은 없고,
세계는 의식 안에
자발적으로 존재합니다.
의식 때문에
세계가 인식됩니다.
개인이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개인도 없습니다.
개인들이란
<상상적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현현된 의식이고,
그 안에
세계가 있습니다.
세계는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사건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대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시자>일 뿐입니다.
그 상태
안에만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의 몸 안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저 '내가 있다'라는
가장 힘 있고 강력한
<앎>을
전적으로 끌어안고,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그 확신과 더불어
그대의 모든 무지,
모든 몸 동일시들은
떨어져 나갑니다.
그대가 의식일 때, 그대는
아무런 의심도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욕망들과 씨름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점은
욕망들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 욕망의 주시자인 한
그것을
충족시키느냐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대의 실체,
곧
지켜보는 자,
주시자입니다.
주시자가 되십시오.
그 주시하기가 <앎>입니다.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욕망은
습관 때문인데,
습관이 강할수록
욕망이 강합니다.
습관이 없으면
욕망도 적어집니다.
그대가
그 앎이지만,
지금은
몸과의 연관 때문에
자신이
하나의 몸일 뿐
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있다'는 앎을
<자기>로 보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나는
몸 형상이 아니다'라는
그러한 확신입니다.
(89-1)
ㅡ 의식을 넘어서ㆍ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