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의식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의식혁명 04. 인간의 의식수준들
이 연구를 하는 동안 수백만건의 측정을 통해 전자기장이 쇳가루를 모으듯 특정한 끌개 에너지 장들에 의해 자리잡힌, 널리 인정되는 일련의 태도 및 감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가치들의 범주를 정의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에너지 장들이 임상적으로 정확한 것은 물론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그에 관해 다음의 분류를 채택했다. 측정치가 산술급수가 아닌 로그급수를 나타낸다는 것은 기억해야할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300수준은 150이라는 크기의 두배가 아니다. 그것은 10을 300번 거듭제곱한 것이다(10 300승). 따라서 몇점의 증가도 힘의 큰 발전을 나타낸다. 우리가 의식척도를 따라 상승 이동하는 동안 힘의 증가율은 엄청나다.
인간 의식의 다양한 수준들이 그 자체를 표현하는 방식은 심원하고도 광범위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굵직하고도 미묘하다. 200이하의 모든 수준은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생명에 파괴적이고 200이상의 모든 수준은 힘의 건설적 표현들이다. 200이라는 결정적 수준은 위력과 힘의 일반영역을 가르는 지레받침이다. 의식 에너지 장의 감정상의 상관물을 묘사하는데서 그것이 개인에게 순수한 상태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드물다는 것을 유념하라. 의식의 수준들은 항상 혼재되어 있다. 사람은 일정한 삶의 영역에서는 이 수준에서, 또 다른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수준에서 기능할 수 있다. 개인의 전체적 의식수준은 다양한 수준들의 합계 효과이다.
에너지 수준 20 :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하리만큼 죽음에 가깝다. 죽음은 수치심으로 인해 의식적 자살로서 선택될 수 있고, 혹은 삶을 연장하기 위한 조처의 불이행으로 보다 미묘하게 결정될 수도 있다. 이 수준에서는 피할 수 있는 사고에 의한 죽음이 흔하다. 우리 모두는 창피를 당하고, 명예를 잃어버리고, 존재를 무시당한 것같은 고통에 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수치심에서우리는 목을 매달고,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추방은 수치심의 전통적 동행이며, 우리 모두가 기원한 원시사회에서 추방은 죽음과 맞먹는다. 성적학대같은 수치심으로 이끄는 어린 시절의 경험은 치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한평생 성격을 왜곡한다. 프로이드가 단정한 것처럼 수치심은 신경증을 낳는다. 수치심은 감정적 심리적 건강을 무너뜨리며 낮은 자존감의 귀결로 신체질환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수치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성격은 수줍고 위축되어 있으며 내향적이다.
수치심은 학대의 도구로 이용되며 수치심의 희생자는 종종 스스로 잔인해지게 된다. 수치심을 느끼는 아이들은 동물을 그리고 서로를 학대한다. 고작 20대의 의식수준에 있는 이들의 행동은 위험하다. 그들은 피해망상은 물론 비난성 환각을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정신병자가 되거나 기괴한 범죄를 저지른다. 수치심이 바탕에 깔려 있는 일부개인들은 완벽주의와 완고함으로 보상하며 강박적이고 편협해지게 된다. 악명높은 사례는 자경단을 조직하는 도덕적 극단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무의식적 수치심을 타인에게 투사한 다음 타인을 정당하게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연쇄살인자들은 흔히 나쁜 여자를 응징한다는 정당화를 가지고 성적 도덕주의를 행동화했다. 수치심은 성격의 전 수준을 끌어내리기 때문에 다른 부정적 감정에 대한 취약성으로 귀결되며 따라서 그릇된 자부심과 분노, 죄책감을 흔하게 일으킨다.
에너지 수준 30 : 죄책감
조종하고 처벌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죄책감은 후회, 자책, 피학성애, 피해자역의 그 모든증상같은 각양각색의 표현으로 그 자체를 나타낸다. 무의식적 죄책감은 심인성 질환, 사고 경향성, 자살행동으로 귀결된다. 수많은 이들이 평생토록 죄책감과 싸우는 반면, 어떤 이들은 도덕관념 없이 죄책감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필사적으로 그것에서 도망치려한다. 죄책감의 지배는 결국 죄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되는데, 죄란 강압과 통제를 위해 죄책감을 이용하는 종교선동가들이 빈번히 남용하는 용서할 줄 모르는 감정적 태도이다. 처벌에 사로잡혀 있는 그러한 죄와 구원의 상인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행동화하거나 타인에게 투사하기 쉽다.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이상행동을 보여주는 하위문화는 공개적 의식으로 치러지는 동물살해 같은 다른 풍토적 형태의 잔학행위를 종종 나타낸다. 죄책감은 분개를 유발하며, 살해는 빈번히 죄책감의 표현이다. 사형은 살해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민을 어떻게 충족시켜 주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예를들면 용서할 줄 모르는 미국사회에서는 언론에서 죄책감의 희생자들을 경멸하고 그 어떤 억제 효과나 교정효과를 갖는다는 것이 입증된 적이 없는 처벌을 내린다.
에너지 수준 50 : 무감정(절망, 희망없음)
이 수준의 특징은 가난, 절망, 희망없음이다. 세계와 미래는 황량해보이고 비애가 삶의 주제다. 무감정은 무력함의 상태다. 모든 면에서 결핍되어 있는 무감정의 희생자들은 자원뿐 아니라 이용가능한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돌보는 이들이 외부 에너지를 공급해주지 않는다면 수동적 자살을 통한 죽음이 초래될 수 있다. 희망없는 이들은 살려는 의지없이 텅빈눈으로 응시하며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눈동자는 대상을 좆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제공된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에너지조차 모자란다. 이것은 노숙자와 사회 낙오자들의 수준이다. 이것은 또한 만성질환이나 진행성 질환으로 고립된 많은 노인과 여러사람의 운명이기도 하다. 무감정에 빠진 사람은 의존적이다. 이들은 주변사람들에게 버겁고 짐스럽게 느껴진다. 너무도 흔하게 사회는 이 수준에 있는 문화에 대해 그 어떤 실제적 도움을 주려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이나 문화는 자원의 유출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켈커타 거리의 수준인데 오직 마더 테레사와 그 추종자들 같은 성스러운 이들만이 감히 그 딴을 밟을 용기를 냈다. 그것은 희망을 포기한 수준이며, 그것의 얼굴을 정말로 들여다 볼 용기를 가진 이들은 극히 적다.
에너지 수준 75 : 슬픔
이것은 비애,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일정기간 슬픔을 경험하지만 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지속적 후회와 우울의 삶을 산다. 이것은 한탄, 애도, 과거에 대한 후회의 수준이다. 이것은 또한 습관적 패배자들의 수준이며, 실패를 자신의 생활양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상습적 노름꾼들의 수준이다. 그런 삶은 돈과 건상의 상실은 물론이고 직업, 친구, 가족, 기회의 상실로 귀결된다. 생애 초기의 큰 상실은 나중에 슬픔을 순순히 후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마치 슬픔은 삶에 치르는 값인 것 같다. 슬픔에 빠져 있는 이는 모든 곳에서 비애를 본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비애, 삶 자체에 대한 비애, 이 수준은 존재에 대한 사람의 시각전체를 물들인다. 슬픔 증후군의 일부는 잃어버린 것이나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특수한 것의 일반화로 하여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사랑 그자체의 상실과 동등해진다. 이 수준에서 그와 같은 감정적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유발할 수도 있다. 비록 슬픔은 삶의 무덤이지만 그래도 이것은 무감정에 비하면 많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적 외상을 입은 무감정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가 좋아지리라는 것을 안다. 일단 울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먹을 것이다.
에너지 수준 100 : 두려움
100 수준에는 이용할 수 있는 생명에너지가 더욱 많은데, 위험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하다. 두려움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적, 노화나 죽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다수의 사회적 두려움과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서 기본적 동기유발 요인이다. 이 수준의 관점에서 볼때 세상은 위험해보이며 함정과 위협으로 가득한 듯하다. 두려움은 억압적인 전체주의 기관에서 애용하는 공식적 통제수단이고 불안감은 시장의 큰손 시세조작자들의 장사밑천이다. 대중매체와 광고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두려움에 영합한다. 두려움은 인간의 상상력만큼이나 무한히 증식한다. 사람이 일단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면 끝없이 이어지는 걱정스러운 세상사들이 그것에 연료를 공급한다. 두려움은 강박적으로 되며 어떠한 형태라도 취할 수 있는데, 예를들어 어떤 인간관계를 상실하는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와 만성적으로 높은 스트레스 수준으로 인도한다. 두려운 생각은 점점 부풀어 올라 피해망상이 되거나 신경증적인 방어구조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지배적이 사회적 경향이 된다. 두려움은 인격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으로 인도한다.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억눌린 자는 도움없이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두려움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두려움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강한 지도자를 구한다.
에너지 수준 125 : 욕망
이 수준에는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한층 더 많다. 욕망은 경제를 포함하는 인간활동의 방대한 분야에 동기를 부여한다. 광고인들은 본능적 욕구와 연결되어 있는 필요재로 우리를 프로그램하기 위해 욕망을 이용한다. 욕망은 우리를 움직여 목표달성이나 보상획득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게 한다. 돈과 명망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삶의 유력한 동인으로서의 두려움을 넘어선 많은 이들의 삶을 지배한다. 욕망은 또한 중독의 수준이기도 한데, 중독수준에서 욕망은 생명자체보다 더 중요한 갈망이 된다. 욕망의 희생자들은 사실상 자신의 동기 밑바닥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주목받으려는 욕망에 중독되어 끊임없는 요구로 타인들을 쫒아버린다.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소망은 화장품 산업과 패션산업 전체를 창출해낸다.
욕망은 축적 및 탐욕과 관련된다. 그러나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진행중인 에너지 장이기 때문이다.그리하여 한가지 욕구의 충족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만족을 모르는 갈망으로 대체될 뿐이다. 예를들면 백만장자들은 더욱더 많은 돈을 모으는 일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다. 명백히 욕망은 무감정이나 슬픔보다는 훨씬 높은 상태이다. 얻기 위해서는 먼저 원하려는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TV는 수많은 억눌린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무감정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시작할 정도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심어주었고 동경에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다. 원하는 것은 성취의 길위에 우리를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은 앎의 한층 더 높은 수준들을 향한 도약대가 된다.
에너지 수준 150 : 분노
비록 분노는 살인과 전쟁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하나의 에너지 수준으로서의 분노는 그 밑에 있는 것들에 비해 죽음에서훨씬 멀어져 있다. 분노는 건설적 행위에도 혹은 파괴적 행위에도 이를 수 있다. 사람들이 삶의 방식으로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감정과 슬픔에서 빠져나올때 그들은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로 인도하고 좌절은 차례로 분노로 인도한다. 그래서 분노는 억눌린 이들이 그것을 딛고 결국 자유를 향해 도약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사회적 불의, 피해자화,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는 사회구조의 큰 변화로 이어진 대대적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분노는 가장 흔히 분개와 복수심으로 그 자체를 표현하며 따라서 불붙기 쉽고 위험스럽다.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분노는 "성질 더러운" 격한 사람들을 통해 예시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무시당하는 것에 과민하며, 논쟁적이고 호전적인 혹은 소송하기 좋아하는 불의 수집가가 된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비롯되므로 분노의 바탕에는 그 밑의 에너지 장이 있다. 좌절감은 욕망의 중요성을 과장한 귀결이다. 분노한 사람은 욕망을 좌절당한 유아처럼 격하게 날뛸 수도 있다. 분노는 쉽게 증오에 이르는데, 증오는 개인 삶의 모든 영역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
에너지 수준 175 : 자부심
175로 측정되는 자부심은 미 해병대를 움직이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는다. 자부심은 오늘날 인류 대부분이 동경하는 수준이다. 사람들은 그 밑의 에너지 장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수준에 도달할때 긍정적으로 느낀다. 그런 자존감 상승은 낮은 의식수준들에서 경혐되는 모든 고통에 대한 진통제이다. 자부심은 괜찮아 보이며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안다. 자부심은 삶의 퍼레이드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뽐낸다. 자부심은 수치심, 죄책감, 혹은 두려움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예컨대 빈민가의 절망에서 해병대원이라는 자기존중으로 올라가는 것은 엄청난 도약이다. 자부심은 그 자체로는 일반적으로 좋은 평판을 누리며 사회적으로 장려된다. 하지만 의식수준에 관한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임계수준 200이하에 잔류하리만큼 충분히 부정적이다. 자부심이 그보다 낮은 수준과 대비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괜찮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자부심에는 멸망이 따른다"는 것이다. 자부심은 방어적이고 상처받기 쉬운데, 왜냐하면 자부심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고 있어서 그런 조건이 없이는 더 낮은 수준으로 갑자기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팽창된 에고는 공격받기 쉽다. 자부심은 발판에서 떨어져 수치심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약하다. 이는 자부심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불댕기는 위협이다. 자부심은 분열시키고 파벌주의를 발생시킨다. 그런 귀결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인간은 습관적으로 자부심을 위해 죽었으며 군대는 민족주의라는 자부심의 한 측면을 위해 여전히 정기적으로 서로를 살육한다. 종교전쟁, 정치테러, 정치적 열광, 중동과 중부유럽의 무시무시한 역사, 이 모두는 전 사회가 자부심에 치른 값이다. 자부심의 그늘은 오만함과 부정이다. 이런 특징은 성장을 가로막는다. 자부심안에서는 중독에서 회복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자부심은 감정상의 문제나 성격 결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정의 문제 전체가 자부심의 문제다. 그래서 자부심은 진짜 힘의 획득을 가로막는 육중한 장애물인데, 진짜 힘은 진정한 위상과 위신으로 자부심을 대체한다.
에너지 수준 200 : 용기
200 수준에서 처음으로 힘 power 이 나타난다. 200이하의 모든 에너지 수준에 있는 대상을 테스트할때는 누구나 약해진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는 쉽게 검증할 수 있다. 누구나 200이상의 생명을 지지하는 장들에 대한 반응으로 강해진다. 200은 생명에 대한 긍정적 영향력과 부정적 영향력을 구별해주는 임계선이다. 용기 수준에서 참된 힘의 달성이 일어나고 따라서 이것은 힘이 부여되는 수준이기도 하다. 이것은 탐험, 성취, 불요불굴, 결단의 지대다. 낮은 수준들에서 세상은 희망없고 슬프고, 겁나고 혹은 좌절을 안겨주는 곳으로 보이지만 용기수준에서 삶은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자,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용기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는 그리고 삶의 변화와 도전에 대처하는 자발성을 의미한다. 힘이 부여되는 수준에서 사람은 삶의 기회에 대응할 수 있고 그러한 기회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 예컨대 200수준에는 새로운 직업기술을 배울 가용 에너지가 있다. 성장과 교육은 달성 가능한 목표가 된다. 두려움이나 인격적 결함을 직시할 수 있고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진화의 낮은 단계들에서 그렇듯 불안이 노력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의식이 200이하인 이들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장애가 참된 힘의 첫번째 수준으로 진화해온 이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만큼의 에너지를 세상에 돌려준다. 낮은 수준에서는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은 보답하지 않으며 사회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들이기만 한다. 성취는 긍정적 피드백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자기 보상과 자존감은 점차 강화된다. 이곳이 생산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류의식의 집단적 수준은 여러세기 동안 190에 머물러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지난 10년간 현재 수준 207로 뛰어올랐다.
에너지 수준 250 : 중립성
우리가 중립으로 명명한 수준에 이를때 에너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된다. 그것은 중립은 낮은 수준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위치성들에서의 해방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250이하에서 의식은 양분을 보고 고정된 위치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단색조가 아닌 복잡하고 다원적인 세상에서 하나의 걸림돌이다. 고정된 위치를 갖는 것은 극성을 창조하고 극성은 차례로 대립과 분할을 창조한다. 무술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정된 위치는 허점이 된다. 휘어지지 않는 것은 부러지기 쉽다. 사람의 에너지를 흩어 놓는 장벽이나 대립은 넘어서면서 중립상태는 유연성을 그리고 문제에 대한 비분별적이고 현실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중립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결과에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더이상은 패배, 끔찍한 일, 혹은 좌절을 안겨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중립수준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글쎄, 이일을 못잡으면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뭐" 그것은 내적 자신감의 시작이다. 자신의 힘을 느낄때 사람은 쉽사리 겁먹지 않으며 뭔가를 증명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삶에서 펀치가 날아올 때 잠깐 뒤로 물러설 줄 안다면 삶은 기본적으로 괜찮을 거라는 기대, 이것이 바로 250수준의 태도다. 중립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지낸다는 느낌이 있다. 이 수준의 표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 넘치는 능력이다. 이것은 안전의 수준이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과는 잘 지내기가 쉽고 안전하게 교체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갈등, 경쟁, 혹은 죄책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편안하며 기본적으로 감정이 차분하다. 그런 태도는 비분별적이며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그 어떤 필요에도 이르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중립적인 백성은 자유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렵다.
에너지 수준 310 : 자발성
매우 긍정적인 이 에너지 수준은 더 높은 수준들에 이르는 관문으로 비칠 수 있다. 예를들면 중립수준에 있는 이들은 일을 적당히 하지만 자발성 수준에 있는 이들은 일을 잘하고 또 모든 노력에서 성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성장은 빠르다. 그들은 발전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다. 자발성은 사람이 삶에 대한 내적 저항을 극복했다는 것과 참여에 몰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이라는 측정치 이하에서 사람들은 마음이 닫혀 있는 경향이 있지만 310 수준에 도달할 무렵까지는 마음에 커다른 틈이 생긴다. 이 수준에서 사람들은 진정으로 우호적이 되고,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 자동적으로 뒤따르는 듯하다. 자발적인 이들은 실업으로 곤란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어떤 직업이라도 가질 것이고 또는 경력을 쌓거나 자영업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서비스직에 종사한다거나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해서 품위가 떨어진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남을 도우며 사회에 기여한다. 그들은 또한 자발적으로 내면의 문제를 직시하며 큰 학습장애가 없다.
이 수준에서는 자존감이 높은데 그것은 인정, 공감, 보상의 형태로 사회로부터 받는 긍정적 피드백에 의해 강화된다. 자발성은 타인의 필요에 동정적이며 반응한다. 자발적인 사람들은 사회의 건설자이며 기여자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능력과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으로 자가교정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부심을 놓았으므로 기꺼이 자신의 결함을 보고 타인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 자발성의 수준에서 사람들은 뛰어난 학생이 된다. 그들은 가르치기 쉬우며 사회에 대한 힘의 상당한 근원을 대표한다.
에너지 수준 350 : 수용
앎의 이 수준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 경험의 근원이자 창조주라는 이해와 더불어 큰 변형이 일어난다. 그러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진화 정도에 특유한데 이 단계의 특징은 삶의 위력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다. 200이하의 수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삶에 휘둘리는 채로 무력한 경향이 있고 자신을 피해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행복의 근원이나 자신의 문제의 원인이 저 밖에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근원이 자기안에 있다는 각성과 더불어 자신의 힘을 되찾는 엄청난 도약이 이수준에서 완성된다. 보다 진화된 이 단계에서는 저밖에 있는 것 중에서 사람을 행복하게만들 능력이 있는 것은 없으며, 사랑은 제 3자한테서 받거나 빼앗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창조되는 것으로 존재한다.
이 수준을 무감정의 증상인 수동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수용은 삶을 어떤 일정에 끼워 맞추려하지 않고 그것 자체의 조건에 따라 삶에 참여하도록 해준다. 수용과 더불어 감정적 평온이 찾아오고 부정을 넘어섬에 따라 지각은 확장된다. 사람은 이제 왜곡이나 그릇된 해석없이 세상을 바라본다. 경험의 맥락이 확장되어 그림전체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수용은 본질적으로 균형, 비례, 적절함과 관련된다. 수용 수준에 있는 개인은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데 관심이 없는 대신, 쟁점 해결에 전념하고 문제 처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데 전념한다. 힘든 일이 불편함이나 낙담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장기적 목표가 단기적 목표보다 우선한다. 자기규율과 통달이 두드러진다. 수용의 수준에서 우리는 갈등이나 대립에 의해 양극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걸 알며, 평등을 존중한다. 낮은 수준들은 경직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이 수준에서는 문제 해결의 한 형태로서 사회적 다원성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수준은 차별성이나 편협성에서 자유롭다. 여기에는 평등성이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앎이 있다. 수용은 거부하기보다 포용한다.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지성과 합리성은 낮은 수준들의 감정주의가 초월될 때 전면으로 부상한다. 이성은 대량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고, 신속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여러 관계와 점진적 변화, 미세한 구별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추상적 개념이 중요성을 더해감에 따라 능숙하게 상징을 조작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의학의 수준이며, 전반적으로 높아진 개념화 능력 및 이해능력의 수준이다. 지식과 교육은 여기서 하나의 자본으로 추구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주요도구이며, 400수준의 특색이다. 이것은 노벨 수상자, 위대한 정치가, 대법관의 수준이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그밖의 역사의 다른 많은 사상가들 역시 이 수준으로 측정된다. 이 수준의 결함은 상징과 그 상징이 나타내는 것 간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고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기 쉬우며, 개념과 이론에 심취하게 되어 결국 핵심을 놓치기 십상이다. 지식화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이성은 어떤 복잡한 쟁점의 본질 혹은 임계점을 식별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진실의 길잡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성은 막대한 분량의 정보와 문서를 생산해 내지만, 데이터와 결론의 불일치를 해결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모든 철학적 논증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이성은 논리의 방법론이 지배하는 기술 세계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모순되게도 이성 자체는 의식의 높은 수준에 이르는데 큰장애다. 이 수준의 초월은 우리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드물다.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대중매체에서 그리는 사랑은 이 수준에 있는 그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사랑이라 말하는 것은 신체적 매력, 소유욕, 통제, 중독, 성욕, 신기함과 결합하는 어떤 격렬한 감정상태다. 그것은 덧없고 동요하며 달라지는 조건에 따라 차고 이지러진다. 좌절당할때 그 감정은 흔히 그것이 감추고 있던 저변의 분노와 의존성을 드러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수 있다는 것은 흔한 지각이지만 거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중독을 일으키는 감상성이기 쉽다. 그런 관계에서는 십중팔구 진짜 사랑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랑이 아닌 자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500수준은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으며 영속적인 한 사랑의 발달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한 사랑은 동요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 근원이 외적요소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함은 존재의 상태다. 그것은 용서하고 양육하며 지지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맺는 것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랑은 가슴에서 흘러나온다. 사랑은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하여 타인을 고양시키고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이 발달 수준에서는 본질을 식별하는 능력이 우세해져서 쟁점의 핵심이 초점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성을 우회함에 따라 문제 전체의 즉각적 인지 능력이 생겨나고 특히 시간과 과정 및 관련된 맥락이 크게 확장된다. 이성은 단지 특수를 다루는 반면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흔히들 직관 덕분으로 돌리는 그 능력은 연쇄적 상징처리에 기대지 않는 즉각적 이해능력이다. 그러한 현상은 겉보기에 추상적이지만 사실상 대단히 구체적이어서 뇌속의 계량 가능한 엔도르핀 분비가 그것에 동반된다.
사랑은 위치를 점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분리를 넘어서 전역적이다. 그 다음에는 더이상 어떤 장벽도 없기 때문에 다른 것과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포용하며 점진적으로 자기감을 확장시킨다. 사랑은 갖가지로 표현되는 생명의 선함에 초점을 맞추고 긍정적인 것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부정성을 공격하기보다는 그것을 재맥락화함으로써 녹여낸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수준이다. 비록 세상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홀려있고 모든 생명력있는 종교는 500이상이나 그 이상으로 측정되지만 세계 인구의 4%만이 의식진화의 이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에너지 수준 540 : 기쁨(무조건적 사랑)
사랑이 점점 더 무조건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그것은 내면의 기쁨으로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는 사건들의 만족스러운 전환에 대한 갑작스러운 기쁨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대한 항상적 반주이다. 기쁨은 그 어떤 다른 근원에서가 아닌 존재의 매 순간에 내면에서 솟아오른다. 540은 또한 치유의 수준이자 영성에 기초한 자조 모임들의 수준이다. 540 수준이상부터는 성인, 앞선 영적 제자와 치유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 장의 특징은 엄청난 인내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 및 기나긴 역경속에서도 긍정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상태의 특징은 연민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이들은 남들에게 괄목할만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들은 한동안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데, 그 응시는 사랑과 평화의 상태를 유도한다.
500대 후반에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절묘한 아름다움과 창조의 완벽함으로 빛비춰진다. 일체는 공시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며 세상과 그 속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으로 보인다. 개인의 의지는 신성의 의지와 융합된다. 어떤 현존이 느껴지는데, 그것의 힘은 실상에 대한 관습적 기대를 벗어난 보통의 관찰자가 기적적이라고 칭하는 현상을 촉진한다. 그러한 현상은 개인의 힘이 아닌 에너지 장의 힘을 나타낸다. 이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낮은 수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성질을 띤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식상태를 특별한 개인보다는 생명자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욕구가 있다. 많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이 능력에 동반되는 것이 사람은 사랑할 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는 발견이다. 사람들은 변형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임사체험을 통해 540에서 600사이의 에너지 수준을 체험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에너지 수준 600 : 평화
이 에너지 장은 초월, 참나 각성, 신의식 같은 용어가 지시하는 경험과 관련된다. 이것은 지극히 드물어서 천만명 중 단 한명이 거기 도달한다. 이 상태에 이를때 주체와 객체간의 구별은 사라지고 지각에는 특정한 초점이 없다. 이 수준에 있는 개인들은 왕왕 세상에서 물러나는데, 그것은 뒤이어 일어나는 지복상태가 일상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영적 스승이 되고, 또 어떤 이는 이름없이 인류의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몇몇은 각자의 분야에서 위대한 천재가 되어 사회에 크게 기여한다. 그들은 성인같고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될 수 있는데, 하지만 이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형식적 종교는 초월되며 모든 종교가 그 속에서 기원하는 순수한 영성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600과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지각은 슬로모션으로 일어나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멎어 있다는 보고가 이따금씩 흘러나온다. 아무것도 죽어있지 않으며 전부가 살아있고 광채를 발한다. 비록 세상은 남들이 보는 것과 같지만 그것은 절묘하게 조율된 진화의 춤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진화하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의의와 근원은 압도적이다. 그 인싱적 드러남은 비합리적으로 일어나서 마음은 무한한 침묵에 잠기고 그로 인해 개념화는 멈춘다. 목격하고 있는 것과 목격되는 것은 정체가 동일하다. 관찰자는 풍경속으로 녹아들어 동시에 관찰되는 것이 된다. 일체는 어떤 현존에 의해 다른 일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현존의 힘은 무한하며 절묘하게 부드럽지만 바위처럼 단단하다. 600에서 700사이로 측정되는 미술, 음악, 건축물의 걸작품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의식의 높은 수준으로 데려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시간적인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다.
에너지 수준 700-1,000 : 깨달음
이것은 역사속의 위대한 이들의 수준이다. 이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전 시대를 통해 뒤따른 영적 패턴의 기원이 되었다. 모두가 신성과 결합되어 있으며 흔히 신성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강력한 영감의 수준이다. 이 존재들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끌개 에너지 장을 자리잡아 놓았다. 이 수준에는 타인과 분리된 개별적인 사적 자기의 경험은 더이상 없고 오히려 참나는 의식 및 신성과 동일시 한다. 나타나지 않은 것은 마음 너머에 있는 참나로 경험된다. 에고의 이러한 초월은 그런 상태가 결국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사례로도 기여한다. 이것은 인간계에서 의식진화의 정점이다.
위대한 가르침은 대중을 향상시키고 전 인류의 앎의 수준을 높여준다. 그러한 시야를 갖는 것은 은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정의내릴 수 없으며 언어 너머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무한한 평화이다. 각성의 이 수준에서 사람의 존재감각은 모든 시간과 모든 개별성을 초월한다. 육체와 나의 동일시는 더이상 없으며 따라서 육체의 운명은 관심사가 아니다. 육체는 마음의 개입을 통한 의식의 도구일뿐으로 보이는데, 육체의 주된 가치는 의사소통의 도구로서의 가치다. 자기는 도로 참나와 융합된다. 이것은 비이원성 또는 완전한 하나임의 수준이다. 의식의 국소화는 없다. 앎은 어디에나 동시에 현존한다. 깨달음의 수준에 이른 개인을 묘사한 미술의 걸작품은 특징적으로 무드라라는 특정한 손모양을 한 스승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인류의식에 깨달음의 에너지 장을 전달하는 행위다. 이 신성한 은총의 수준은 최대 1,000으로 측정되며, 그것은 기록된 역사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이제껏 도달한 최고의 수준이다. 그 수준에 도달한 이들은 말하자면 주라는 호칭이 적당한 -주 크리슈나, 주 붓다, 주 예수 그리스도- 위대한 화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