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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hara meshwar Maharaj

지(知)와 무지를 넘어선 비지(非知)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0.07|조회수139 목록 댓글 1

* 지(知)와 무지를 넘어선 비지(非知)


진아를 아는 헌신자가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해탈이라는 충만한 즐거움을
즐기는 방식이 그런 것이다.

이제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진아지와
진아지 이후의 헌신에 대해
설명했다.

구도자가
'진아를 아는 지자(知者)'가 된
단계에
우리는 도달한 것이다.

대원인신에 대한
모든 지(知)의 끝은

전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보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것은 맞지만,
성자 람다스는 여전히
이 대원인신에 대한 지(知)를

빠라마트만의 그것에 비해
'불안정한 브라만'이라고 불렀다.

빠라마트만은 안정되어 있다.

빠라마트만은
형상있는 브라만이나

네 가지 몸과 연관된
형상없는 브라만과는 다르고,

따라서 빠라마트만은
[비지(非知)]이다.

그래서 베다는
최종적으로
'네띠, 네띠(Neti, Neti)',

곧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빠라마트만이

지(知)도 아니고,
무지도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부동'의 빠라마트만은
유일한 진리이며, 본질이다.

다른 어떤 것도 참되지 않다.

성자 사마르타 람다스는
<다스보드>에서
이 결론을 아주 멋지게 설명했다.

이 지(知)는 왜 불안정한가?

왜냐하면 거기에
많은 이름과,
남성, 여성, 중성의 속성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트치트아난다,
이스와라, 온까르, 세사,
나라야나, 원초적 존재, 시바
등으로 불린다.

이것들은 남성적인 이름이다. ​

또한 삭띠, 쁘라끄리띠, 스루띠,
샴브하비, 찌뜨깔라, 나라야나
등으로 불리며,

이것들은 여성적인 이름이다.

그것을
본래성품, 대원인신, 순수한 지(知),
브라만, 지복의 제국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중성적인 이름이다.

이 중성적 이름들이
이 진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닌
일자(the One)는

안정자,
부동자,
본질,
실재하는 브라만이다.

대원인신에 대한
지(知)의 위대한 성질은

조대신 안에서의
지(知)에 비해 훨신 위대하다.

소거과정에 의해
그것을
건져낼 수 있는데,

그것이 연역된 뒤에는
다시 한 번
(대상들과) 혼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에 편재하므로)

그러나 소거과정과
다시 한번 의식적으로
편재한 것에 대해 잘 안다고 해서

그 구도자가
빠라브라만의 단계를
성취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빠라브라만은
누구도

거기서
되돌아 올 수 없는 그것이다.

지(知)를
'지(知)'라고 불러 왔지만,
브라만은
실은 어떤 이름도 없다.

'내가 있다'는 지(知)에는
세계라는 형상 속에서의
활동 혹은 변화들의 혼합이 있다.

'찌따'라고 불리는
'마음'이
이런 모습 변화를 겪으면서,
지(知)도
모습변화를 겪는다.

변상(변화된 모습)들은
하나의 상태, 혹은 단계이다.

빠라브라만은
모든 변상을 넘어서 있다.

그래서
진아지 혹은 '내가 있다'​(知)와

절대자(완전지, 빠라브라만)

사이에는 ,

어둠과 빛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다.

"안정된 것과 불안정한 것의
접촉이 있는 곳에서는
지성이 미혹된다"고
스리 사마르타 람다스는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마지막 오해는 여기서 생긴다.

지(知, 내가 있다)​가
밝아오기 전에는

망각(원인신)이
지(知)로 오해된다.

마찬가지로,
지(知)가 덜 계발 될 때는

그것이 완전지,
곧 '변상부재'의 마지막 단계인
빠라브라만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구도자가
진아지, 곧 '내가 있다'를
완전지로 오해할 때

그의 진보는
거기서 정체된다.

사마르타 람다스는
이런 유형의 덜 개발된 지자(知者)를,

꿈 속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여전히 꿈 속에서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생시라고 생각하지만,
그대의 환(幻)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스리 사마르타가
이런 유형의 지자에게 주는
경고이다.

대원인신,
곧 뚜리야 상태 안에서는

조대신과 미세신이
하나의 꿈과 같지만,

대원인신 그 자체는
완전지 속에서는
하나의 꿈과 같다.

무지 속에 속박이 있고,
지(知) 속에 해탈이 있지만,

지(知)와 무지
둘 다가
없을 때는

속박이니 해탈이니 하는
관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베다와 경전들은
대원인신 지점까지 이야기한다.

그때까지는 그것이
1차적 전제 또는 이론이다.

대원인신을 넘어선
지(知)의 영역 안에
증명된 최종결론이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취소된다.

모든 현상이
소멸 혹은 절멸될 때,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성품이다.

그것은
말로 묘사할 수 없다.

'말의 지(知)'도
무지로 증명되는 곳,

'의식'이 《비의식》으로 되는 곳,

경전들이 권장하는
모든 '치유책'이
'장애'일 뿐인 곳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그 최고의 지점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

참스승은 여러분을
그 문턱까지 데려다
안으로
밀어 넣지만,

참스승도 여러분에게
그 속의 아름다움이나
파노라마를 보여줄 수 없다.

여러분이
그 보물, 그 전리품을
직접 붙잡아야 한다.

모든 것을 말하고 난
지금,

말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여러분에게 맡겨졌다.

우리는 여러분을 고무하여
구도자가 되게 할 수 있을 뿐이고,

여러분 자신이
싯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책의 끝에 이르렀다.

말은 군더더기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표명되니,

그것은
참스승(사두 구루)에 대한
찬양이다.
                                      
하리 옴 따뜨 사뜨(Hari Om Tat Sat) 


ㅡ 스리 싯따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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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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