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몸 - 거친몸 Gross Body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손, 발, 입, 코, 귀, 눈 등 부위들
[사지와 기관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이 모든 부위들의 집합체를
‘몸’이라고 한다.
이 다양한 부위들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인지 찾아보자.
우리는 손이 ‘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손이 잘려나가면 아무도
“내가 잘려 나갔다”거나
“내가 버려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눈이 멀어졌다고 가정하면
아무도 “내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다.
배가 부어오른다면 아무도
“내가 부어올랐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 대신 우리는
“내 손이 잘렸다”거나
“내 눈이 앞을 못 본다”거나
“내 배가 부었다”고 말한다.
이 모든 부위들은
‘내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모든 부위들의 집합체인
몸 그 자체도 ‘내 몸’으로 이야기된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지를,
심지어 그 몸 자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은 그가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그 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나’가
어떤 부위나
조대신(Gross Body, 거친 몸)의
사지 중 하나가 아니며,
모든 사지가 ‘내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하나의 확립된
일반적 진리 혹은 명제가 있으니,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로부터,
몸과 사지는 실은
‘내 것’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어떤 ‘나’도
거기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명제가
나의 이웃집에도 적용된다.
만일, ‘나’가
이웃집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그 이웃집 혹은 그 집의 세간이나
관련되는 부분들이 내 것이겠는가?
만일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의 진리성을 입증하고 싶다면,
한 이웃집에 가서
“나는 이 집 주인이고,
이 가정의 부인도 내 것이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족하다.
그리고 그 집 부인이
‘내 것’이라는 느낌을 보여주려고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하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금방 알 것이다.
그 집의 진짜 주인이
그대를 세게 때려서
그대는 이내
‘나는 이 집 주인이 아니고,
그녀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을 테니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몸 안의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몸의 사지와
그 몸의 성향들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여전히
그것을 그대의 것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왜 그러는지를 알아보라.
또한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 여기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든 인간들의 조건을 면밀히 살펴보라.
ᆞᆞᆞᆞᆞᆞ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몸은 5대원소(지수화풍공)의 것이며
다른 누군가의 재산임을
분명히 이해하라.
이것을 이해할 때,
그 몸이 소유한
어떤 종류의 속성이라 한들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겠는가?
그러니 육신을 떠나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러나 몸을 떠난다는 것은
그것을 우물에 밀어 넣거나
목에 올가미를 걸어 매달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몸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얻음으로써
그것을 떠난다.
몸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면
그것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가라앉고,
우리는 몸을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몸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만일 몸을 일부러
물리적으로 파괴한다면,
우리는 분명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몸에 대한 완전한 포기는
실재와 비실재의
분별을 통해서 성취된다.
우리는 사람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분별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포기의 상태에 도달하며,
이때 몸은
환생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사윤회에서
아예 해방시키는 능력을 갖는다.
다섯 가지 해체가 있다.
두 가지는 몸의 수준에서이고,
두 가지는 우주의 준에서이다.
하나는 분별을 통해서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매일 일어나는 해체, 곧 깊은 잠 속의 해체
2) 죽음을 통한 해체
3) 창조주와 창조계의 해체 (Brahma Pralaya)
4) 한 겁(劫)[1천 유가]이 끝날 때 일어나는 해체
(Kalpa Pralaya)
5) 생각, 곧 분별에 의한 해체
이 다섯 가지 유형의 해체 가운데
1) 누구나 몸과 관련되는 해체,
즉 매일 일어나는 해체인
깊은 잠(Deep Sleep)과는 친숙하다.
깊은 잠 속에서는
우리의 몸을 포함한
전 세계가 해체된다.
그러나 깨어나면
몸과 세계가
우리가 잠들기 직전과
똑같이 존재하고,
모든 행위가
이전과 똑같이 다시 시작된다.
2) 죽음을 통한 해체는
깊은 잠을 통한 해체와 동일하다.
그러나
진아에 대한 앎이 없으면
그 존재는 죽은 뒤에
자신의 업(karma)과
마음의 성향에 따라
새로운 몸을 취해야 한다.
그 새로운 몸 안에서,
먹고, 자고, 짝짓기를 하는
등의 행위와
어떤 두려움이,
전생부터 남아 있는
인상들(습기, 習氣)에 따라서
일어난다.
3) 브라마 해체(Brahma Pralaya)는
그런 많은 창조주(브라마)들과
그들의 창조계가 오고간 뒤의
어느 시점에서
4) 한 겁이 끝날 때
일어나는 해체이다.
이 두 가지 유형(3, 4)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창조주
혹은 새로운 겁이 시작되고,
한동안 잠재되어 있던 창조가
새로워진 활력과 움직임으로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그 바퀴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일어나고 스러지며 계속 돌아간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네 가지 유형의 해체에 대한
묘사를 통해,
몸들은 그 모든 해체 속에서도
최종적으로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분별, 곧 생각에 의한
해체의 결과는
아주 강력하고 비할 바가 없다.
이런 유형의 해체에서는 몸이 살아 있는 동안 해체될 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해체되며, 그것이 최종적으로 해체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무로 만든 장난감 뱀이
주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그 뱀이
고무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는
그 뱀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거나
그 뱀을 바구니에 담아 치워버려도
공포가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눈을 뜨는 즉시,
혹은 바구니를 다시 여는 즉시
공포가 되살아난다.
누군가가 고무뱀을 던져 버렸는데
어떤 장난기 있는 사람이
다시 그것을 겁내는 사람 앞에
던진다고 가정하자.
그는 다시 몸을 떨 것이다.
뱀을 피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진다 해도,
깨어나는 즉시 뱀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뱀을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술에 취하거나,
클로로포름으로 의식을 잃어 본다고
가정하자.
역시, 술이나 마취제의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뱀이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위에서 묘사한
어떤 수단으로
뱀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뱀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뱀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고무로 만들어졌을 뿐임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일단 이 앎이 다가오면
설사 눈으로 그 뱀을 본다 해도,
혹은 어떤 사람이 그것으로
그에게 겁을 주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면
몸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지고,
몸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이것이
‘생각에 의한 해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확실함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나고 죽음의 순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생각 없이’ 죽는 사람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을 뿐인데,
이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것이다.
‘생각에 의한 해체’ 덕분에,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든 않든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유형의 해체에서는
설사 사물이 시야에서
감춰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마르타 람다스는,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면서
그를 삶의 성취에 이르게 하는 것은
‘생각 깊음(thoughtfullness)’
즉, '탐구'뿐이라고 주장한다.
철저한 탐구 끝에
‘생각에 의한 해체’의 절차로서
육신을 해부하면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ㅡ '그대가 그것이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