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몸 – 미세신 Subtle Body
이제 우리는
생각(분별)에 의한 해체라는
동일한 과정을 이용하여
미세신(微細身, 미세한 몸, Subtle Body)
안의 ‘나’를 추적해 보겠다.
이 ‘나’라는 도둑이
미세신 안의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지 탐색해 보자.
먼저 미세신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미세신은
열일곱 명의 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1. 다섯 가지 행위 감각기관
[손, 발, 입, 생식기, 항문]
2. 다섯 가지 지식 감각기관
[눈, 귀, 코, 혀, 살갗]
3. 다섯 가지 생기(생명 기운)
4. 마음(manas)
5. 지성(buddhi)
미세신의 이 위원회가
어떤 명령을 발하든
조대신은 그것을 수행한다.
미세신의 ‘권한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고,
그래서 철저히 탐색하면서
저 포착하기 힘든 ‘나’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권한을 주장하려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세신에 대한
탐색을 시작해 보면,
‘나’가 여기에도
‘내 것’이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뭐든
‘내 감각기관’
‘내 생기’
‘내 마음’
‘내 지성’과 같은 명칭이 붙는다.
그러나 더 면밀히 조사해 보면
“나는 지성이다” 같은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저 ‘나’가
여기 미세신 안에서도
‘임자’로 행세하고 다니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서 사용한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론에 따르면,
미세신은 물론이고
그것의 구성원
[감각기관, 생기, 마음, 지성] 중
어느 것도 ‘나’일 수가 없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논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 있다.
예를 들어, 조지 5세 왕은
숄라뿌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숄라뿌르는
그의 소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적어도 조지 5세라고 불리는
한 개인이 있고,
설사 그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숄라뿌르에
소유권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가 현재 그곳에
있지 않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나’는
‘비실재물’이고,
앞에서 본
‘고마지 가네쉬’의 예에서처럼
그것의 오만과 무지의 확산이
조사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 ‘나’가
여기 미세신 안에서도
권한을 주장하고 있다.
그 ‘나’를 추적해서
발견할 수 없다면,
미세신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지해야 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미세신은
미세한 비단 묶음과 같다.
비록 생각으로
그 미세한 비단 매듭을 풀기가
조대신을 해체할 때보다
더 어렵다 하더라도,
구도자는 여전히
그것을 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단 그 묶음이 풀리고 열려서
철저한 조사를 할 수 있게 되면
미세신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미세신 그 자체가
'탄생과 죽음의 씨앗'이고,
그 씨앗은
'욕망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씨앗을 단 한 번이라도
지(知)의 불길에 구워버리면,
겉보기에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그것을 파종했을 때
싹이 틀 가망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조대신과 미세신
둘 다 포기되고
‘나’와 ‘내 것’과 같은
자부심의 태도도 사라진다면,
그 몸의 행위들이
중단되거나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의문은 이와 같이 불식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금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믿고
보관함에 넣어 두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어느 때에
그것이 금이 아니라
실은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보관함에 그대로 두든지
아니면 끄집어내어
밖에다 두든지 선택할 수 있다.
그 물건에 대한
그의 집착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을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자부심을 무시해 버린다 해도,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자 뚜까람은 말했다.
“육신이 살든 죽든,
나는 나의 진아 성품에 대해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어떤 구도자가
이러한 확인의 수준에 도달하면
이런 마음자세가 일어난다.
“브라만의 지복을 체험할 때,
누가 육신에 신경쓰겠는가?”
이런 마음자세가 일어나면
그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다.
한번은 어떤 개가
성자 까비르의 종아리 근육을 물어
살점을 뜯어냈다.
성자 까비르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개가 알거나, 아니면 살이 알겠지.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대단한 헌신자였던 성자 까비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구도자는 성자 까비르가 도달한
포기의 수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자는,
영향을 받은 것은 살점이지
자신의 참된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진아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성자 까비르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성자 뚜까람이
전 가족을 잃었을 때도 그러했다.
구도자가 처음으로
‘나’에 대한 탐색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황홀경의 느낌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만일, 신의 은총에 의해
그러한 지복이
정말 여러분을 집어삼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세간적 소유물이
결국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내 집은 제대로 운영될 것인가?”와 같은
쓸데없는 질문을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워낙 무관심한 태도가 배양되어,
“무슨 일이든 일어날 테면 일어나고,
무엇이든 사라질 테면 사라져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가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진아를 체험하는 것보다 쉽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진아지를 성취한 뒤에도,
그리고 몸과 마음에 대한
소유적 자부심을 뒤로했을 때도
여전히 우리의 세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그를 달래기 위해
참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다.
몸과 마음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갖고,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에 대한
자부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사실 그런 일들을
매우 잘 돌볼 수 있게 된다.
이전에 하던 모든 세간적 임무를
여전히 부지런히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은가?
이런 예를 들면 이해할 것이다.
엄마 없는 아이를 돌보는
유모의 행동을 보라.
그녀는 아이를 보살피고,
데리고 다니고,
아이가 울면 어르고,
병이 나면 보살펴
건강을 회복시킨다.
마치 자신이 진짜 엄마라면
그렇게 했을 것처럼 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면
사랑스럽게 뽀뽀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지만,
만일 아이 아빠가 자신을 해고하면
즉시 짐을 꾸려 그 집을 나간다.
그 지위를 떠나면
그녀는 아이가 체중이 늘 거라고 해서
기쁘지도 않고
아이가 죽을 거라고 해도
슬프지 않다.
그런 태도를 갖는 이유는
그 아이에 대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책임 이행은
‘내 것’이라는 느낌 없이
성취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그 몸이 살이 찌든 야위든,
혹은 살든 죽든,
신나할 것도 없고 한탄할 것도 없다.
영적인 수행의 경우
'몸과의 동일시'는
'진아를 잊어버리는 것',
혹은 '진아를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몸이라는 관념에
속박되는 사람에게는
해탈의 희망이 멀어진다.
실은 그가
진아일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몸과 마음이 해야 할
보통의 의무와 행위는
제대로 수행되어야 하고,
그와 관련하여
‘소유’의 느낌 혹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확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모가
자기 책임을 수행하는 동안
해야 할 의무는
그녀에게
어떤 소유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의 임무는
아주 정상적으로 수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임무들은
육신이나 미세신과 관련하여
소유감이나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고서도 수행될 수 있다.
ㅡ 그대가 그것이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