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번째 몸 ㅡ 대원인신ᆞ뚜리야
('내가 무지의 주시자이다' 에서)
“나”라고 말하는 자는
실은 "일체를 주시하는 브라만"이다.
그것은
지(知)의 성품을 가진 자인 그이며,
《‘내가 있다’는 느낌》이다.
이 확신이 확립되면
거기서 지복의 물결이
거듭거듭 일어난다.
나중에
이 지복이 잦아들 때
일어나는 기적을 보라.
탐색과 숙고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식에 도달한다.
“나는 지知의 성품으로
되어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내가 무지로 덮여 있는 것과
똑 같이
나는 지(知)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본시
무지나 지(知)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지와 지(知)는
‘나’에게서 태어났는데,
그것을 ‘나’로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러한 숙고의 도움으로,
‘나’ 안에서
무지와 지(知)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것들의 창조자가
‘나’임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知)는 나의 자식이고,
내가 지(知)의 아버지이다.
그것의 아버지로서
나는 그 지(知) 이전이며,
그것과는 다르다.
이 깊은
일련의 분별적 사고가
내면에서 밝아오면
대원인신,
곧 뚜리야 상태 안의 진아지인
‘나는 브라만이다(Aham Brahmasmi)’
하는 느낌도 물러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완전히 뿌리 뽑히고 만다.
그럴 때 ‘나’는
절대적으로 벌거벗어
일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
여기 이 적나라함에 도달하면
이 ‘나’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묘사할 수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여기서 발견되는
‘나’에 대한 묘사를 원한다면,
어떠한 사전에 나오는
어떠한 단어를 말해도
그것은 ‘나’가 아니다.
여기 이 ‘나’는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빛을 던지는 자》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묘사하려고
단어와 문장을 말할지 모르나,
그런 말들은
그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가 나오든
여러분은
그것을 ‘나’에 대한 묘사로 여기지만,
그런 의미들은 그것이 아니다.
만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다면,
말과 개념들을 떠나
깊은 침묵 속에 잠겨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라.
ㅡ '그대가 그것이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