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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hara meshwar Maharaj

네 가지 몸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08|조회수125 목록 댓글 1

* 네 가지 몸


* 첫 번째 몸 - 거친몸 Gross Body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손, 발, 입, 코, 귀, 눈 등 부위들[사지와 기관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이 모든 부위들의 집합체를 ‘몸’이라고 한다. 이 다양한 부위들 중에서 어는 것이 ‘나’인지 찾아보자. 우리는 손이 ‘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손이 잘려나가면 아무도 “내가 잘려 나갔다”거나 “내가 버려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눈이 멀어졌다고 가정하면 아무도 “내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다. 배가 부어오른다면 아무도 “내가 부어올랐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 대신 우리는 “내 손이 잘렸다”거나 “내 눈이 앞을 못 본다”거나 “내 배가 부었다”고 말한다. 이 모든 부위들은 ‘내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모든 부위들의 집합체인 몸 그 자체도 ‘내 몸’으로 이야기된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지를, 심지어 그 몸 자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은 그가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그 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나’가 어떤 부위나 조대신(Gross Body)의 사지 중 하나가 아니며, 모든 사지가 ‘내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하나의 확립된 일반적 진리 혹은 명제가 있으니,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로부터, 몸과 사지는 실은 ‘내 것’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어떤 ‘나’도 거기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명제가 나의 이웃집에도 적용된다. 만일, ‘나’가 이웃집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그 이웃집 혹은 그 집의 세간이나 관련되는 부분들이 내 것이겠는가? 만일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의 진리성을 입증하고 싶다면, 한 이웃집에 가서 “나는 이 집 주인이고, 이 가정의 부인도 내 것이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족하다. 그리고 그 집 부인이 ‘내 것’이라는 느낌을 보여주려고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하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금방 알 것이다. 그 집의 진짜 주인이 그대를 세게 때려서 그대는 이내 ‘나는 이 집 주인이 아니고, 그녀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을 테니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몸 안의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몸의 사지와 그 몸의 성향들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여전히 그것을 그대의 것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왜 그러는지를 알아보라. 또한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 여기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든 인간들의 조건을 면밀히 살펴보라.
(중략)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5대 원소의 것이며 다른 누군가의 재산임을 분명히 이해하라. 이것을 이해할 때, 그 몸이 소유한 어떤 종류의 속성이라 한들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겠는가? 그러니 육신을 떠나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러나 몸을 떠난다는 것은 그것을 우물에 밀어 넣거나 목에 올가미를 걸어 매달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몸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얻음으로써 그것을 떠난다. 몸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면 그것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가라앉고,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몸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만일 몸을 일부러 물리적으로 파괴한다면, 우리는 분명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몸에 대한 완전한 포기는 실재와 비실재의 분별을 통해서 성취된다. 우리는 사람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분별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포기의 상태에 도달하며, 이때 몸은 환생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사윤회에서 아예 해방시키는 능력을 갖는다.


다섯 가지 해체가 있다. 두 가지는 몸의 수준에서이고, 두 가지는 우주의 준에서이다. 하나는 분별을 통해서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매일 일어나는 해체, 곧 깊은 잠 속의 해체
2) 죽음을 통한 해체
3) 창조주와 창조계의 해체 (Brahma Pralaya)
4) 한 겁(劫)[1천 유가]이 끝날 때 일어나는 해체 (Kalpa Pralaya)
5) 생각, 곧 분별에 의한 해체
이 다섯 가지 유형의 해체 가운데 누구나 몸과 관련되는 해체, 즉 매일 일어나는 해체인 깊은 잠(Deep Sleep)과는 친숙하다. 깊은 잠 속에서는 우리의 몸을 포함한 전 세계가 해체된다. 그러나 깨어나면 몸과 세계가 우리가 잠들기 직전과 똑같이 존재하고, 모든 행위가 이전과 똑같이 다시 시작된다. 죽음을 통한 해체는 깊은 잠을 통한 해체와 동일하다. 그러나 진아지가 없으면 그 존재는 죽은 뒤에 자신의 업(karma)과 마음의 성향에 따라 새로운 몸을 취해야 한다. 그 새로운 몸 안에서, 먹고, 자고, 짝짓기를 하는 등의 행위와 어떤 두려움이, 전생부터 남아 있는 인상들(습기習氣)에 따라서 일어난다. 브라마 해체(Brahma Pralaya)는 그런 많은 창조주[브라마]들과 그들의 창조계가 오고간 뒤의 어느 시점에서[한 겁이 끝날 때]일어나는 해체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창조주 혹은 새로운 겁이 시작되고, 한동안 잠재되어 있던 창조가 새로워진 활력과 움직임으로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그 바퀴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일어나고 스러지며 계속 돌아간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네 가지 유형의 해체에 대한 묘사를 통해, 몸들은 그 모든 해체 속에서도 최종적으로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분별, 곧 생각에 의한 해체의 결과는 아주 강력하고 비할 바가 없다. 이런 유형의 해체에서는 몸이 살아 있는 동안 해체될 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해체되며, 그것이 최종적으로 해체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무로 만든 장난감 뱀이 주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그것은 고무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는 그 뱀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거나 그 뱀을 바구니에 담아 치워버려도 공포가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눈을 뜨는 즉시, 혹은 바구니를 다시 여는 즉시 공포가 되살아난다. 누군가가 고무뱀을 던져 버렸는데 어떤 장난기 있는 사람이 다시 그것을 겁내는 사람 앞에 던진다고 가정하자. 그는 다시 몸을 떨 것이다. 뱀을 피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진다 해도, 깨어나는 즉시 뱀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뱀을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술에 취하거나, 클로로포름으로 의식을 잃어 본다고 가정하자. 역시, 술이나 마취제의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뱀이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위에서 묘사한 어떤 수단으로 뱀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뱀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뱀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고무로 만들어졌을 뿐임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일단 이 앎이 다가오면 설사 눈으로 그 뱀을 본다 해도, 혹은 어떤 사람이 그것으로 그에게 겁을 주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면 몸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지고, 몸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이것이 ‘생각에 의한 해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확실함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나고 죽음의 순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생각 없이’ 죽는 사람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을 뿐인데, 이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것이다. ‘생각에 의한 해체’ 덕분에,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든 않든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유형의 해체에서는 설사 사물이 시야에서 감춰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마르타 람다스는,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면서 그를 삶의 성취에 이르게 하는 것은 ‘생각 깊음(thoughtfullness)’[탐구] 뿐이라고 주장한다. 철저한 탐구 끝에 ‘생각에 의한 해체’의 절차로서 육신을 해부하면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두 번째 몸 – 미세신 Subtle Body


이제 우리는 생각에 의한 해체라는 동일한 과정을 이용하여 미세신(微細身Subtle Body) 안의 ‘나’를 추적해 보겠다. 이 ‘나’라는 도둑이 미세신 안의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지 탐색해 보자. 먼저 미세신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미세신은 열일곱 명의 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1. 다섯 가지 행위 감각기관
[손, 발, 입, 생식기, 항문]

2. 다섯 가지 지식 감각기관
[눈, 귀, 코, 혀, 살갗]

3. 다섯 가지 생기

4. 마음(manas)

5. 지성(buddhi)

미세신의 이 위원회가 어떤 명령을 발하든 조대신은 그것을 수행한다. 미세신의 ‘권한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고, 그래서 철저히 탐색하면서 저 포착하기 힘든 ‘나’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권한을 주장하려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세신에 대한 탐색을 시작해 보면, ‘나’가 여기에도 ‘내 것’이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뭐든 ‘내 감각기관’, ‘내 생기’, ‘내 마음’, ‘내 지성’과 같은 명칭이 붙는다. 그러나 더 면밀히 조사해 보면 “나는 지성이다” 같은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저 ‘나’가 여기 미세신 안에서도 ‘임자’로 행세하고 다니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서 사용한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론에 따르면, 미세신은 물론이고 그것의 구성원[감각기관, 생기, 마음, 지성] 중 어느 것도 ‘나’일 수가 없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논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 있다. 예를 들어, 조지 5세 왕은 숄라뿌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숄라뿌르는 그의 소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적어도 조지 5세라고 불리는 한 개인이 있고, 설사 그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숄라뿌르에 소유권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가 현재 그곳에 있지 않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나’는 ‘비실재물’이고, 앞에서 본 ‘고마지 가네쉬’의 예에서처럼 그것의 오만과 무지의 확산이 조사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 ‘나’가 여기 미세신 안에서도 권한을 주장하고 있다. 그 ‘나’를 추적해서 발견할 수 없다면, 미세신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지해야 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미세신은 미세한 비단 묶음과 같다. 비록 생각으로 그 미세한 비단 매듭을 풀기가 조대신을 해체할 때보다 더 어렵다 하더라도, 구도자는 여전히 그것을 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단 그 묶음이 풀리고 열려서 철저한 조사를 할 수 있게 되면 미세신은 자동적으로 포기된다.

미세신 그 자체가 <탄생과 죽음의 씨앗>이고, 그 씨앗은 <욕망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씨앗을 단 한 번이라도 <지(知)의 불길>에 구워버리면, 겉보기에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그것을 파종했을 때 싹이 틀 가망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조대신과 미세신 둘 다 포기되고 ‘나’와 ‘내 것’과 같은 자부심의 태도도 사라진다면, 그 몸의 행위들이 중단되거나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의문은 이와 같이 불식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금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믿고 보관함에 넣어 두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어느 때에 그것이 금이 아니라 실은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보관함에 그대로 두든지 아니면 끄집어내어 밖에다 두든지 선택할 수 있다. 그 물건에 대한 그의 집착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을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자부심을 무시해 버린다 해도,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자 뚜까람은 말했다. “육신이 살든 죽든, 나는 나의 진아 성품에 대해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어떤 구도자가 이러한 확인의 수준에 도달하면 이런 마음자세가 일어난다. “브라만의 지복을 체험할 때, 누가 육신에 신경쓰겠는가?” 이런 마음자세가 일어나면 그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다. 한번은 어떤 개가 성자 까비르의 종아리 근육을 물어 살점을 뜯어냈다. 성자 까비르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개가 알거나 아니면 살이 알겠지.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대단한 헌신자였던 성자 까비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구도자는 성자 까비르가 도달한 포기의 수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자는, 영향을 받은 것은 살점이지 자신의 참된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진아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성자 까비르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성자 뚜까람이 전 가족을 잃었을 때도 그러했다. 구도자가 처음으로 ‘나’에 대한 탐색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황홀경의 느낌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만일, 신의 은총에 의해 그러한 지복이 정말 여러분을 집어삼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세간적 소유물이 결국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내 집은 제대로 운영될 것인가?”와 같은 쓸데없는 질문을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워낙 무관심한 태도가 배양되어, “무슨 일이든 일어날 테면 일어나고, 무엇이든 사라질 테면 사라져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가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면―이것은 진아를 체험하는 것보다 쉽지만―이런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진아지를 성취한 뒤에도, 그리고 몸과 마음에 대한 소유적 자부심을 뒤로했을 때도 여전히 우리의 세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그를 달래기 위해 참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다. 몸과 마음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갖고,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에 대한 자부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사실 그런 일들을 매우 잘 돌볼 수 있게 된다. 이전에 하던 모든 세간적 임무를 여전히 부지런히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은가? 이런 예를 들면 이해할 것이다. 엄마 없는 아이를 돌보는 유모의 행동을 보라. 그녀는 아이를 보살피고, 데리고 다니고, 아이가 울면 어르고, 병이 나면 보살펴 건강을 회복시킨다. 마치 자신이 진짜 엄마라면 그렇게 했을 것처럼 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면 사랑스럽게 뽀뽀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지만, 만일 아이 아빠가 자신을 해고하면 즉시 짐을 꾸려 그 집을 나간다. 그 지위를 떠나면 그녀는 아이가 체중이 늘 거라고 해서 기쁘지도 않고 아이가 죽을 거라고 해도 슬프지 않다. 그런 태도를 갖는 이유는 그 아이에 대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한 미성년자의 수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의 경우를 들어 보자. 그에게는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임무 수행이 방해받지 않으며, 그는 그 미성년자의 재산을 아주 효율적으로 관리해 왔다. 만일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 재산관리인에게 책임이 있고, 그는 분명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재산관리인은 그 재산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고, 따라서 그 재산의 가치가 증가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설사 법정 소송에서 그 재산이 실은 그 미성년자의 것이 아니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의 임무는 그 재산이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동안 그것을 주의 깊게 돌보는 것이다. 요컨대 그가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 또는 ‘내 것’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대신과 미세신은 5대 원소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묶음이며, 그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의 ‘기념품’인 것이다.

여러분은 재산관리인으로서 그 묶음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돌보아야 한다. 만일 그 책임을 소홀히 하면, 몸과 마음의 건강 상실이라는 형태로 분명히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재산관리인이 미성년자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 그리고 그 유모가 아기를 아주 잘 돌보면, 그들은 그 보답으로 급료를 받게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돌보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면, 기쁨이라는 형태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건강한 몸은 분명 궁극적 진리의 탐색에 유용하다.

이 모든 책임 이행은 ‘내 것’이라는 느낌 없이 성취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그 몸이 살이 찌든 야위든, 혹은 살든 죽든, 신나할 것도 없고 한탄할 것도 없다. 만일 미성년자의 재산관리인이 ‘내 것’이라는 느낌으로 인해 딴 마음을 품고 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재산을 착복하면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영적인 수행의 경우 몸과의 동일시는 진아를 잊어버리는 것, 혹은 진아를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몸이라는 관념에 속박되는 사람에게는 해탈의 희망이 멀어진다. 실은 그가 진아일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몸과 마음이 해야 할 보통의 의무와 행위는 제대로 수행되어야 하고, 그와 관련하여 ‘소유’의 느낌 혹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확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산관리인과 유모가 자기 책임을 수행하는 동안 해야 할 의무는 그들에게 어떤 소유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의 임무는 아주 정상적으로 수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임무들은 육신이나 미세신과 관련하여 소유감이나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고서도 수행될 수 있다.




* 세 번째 몸 – 원인신 Causal Body


우리가 조대신과 미세신에 대한 소유 개념을 잃어버리고, 그 묶음은 어떤 낯선 자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어디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이제 원인신(原因身, Causal Body)의 정의로 넘어가 보자.

원인신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도처에 '칠흑 같은 어둠'이 있다. 이 '어두운 무지'가 ‘나’의 거주처일 수 있을까? 이곳은 확실히 그의 주된 본부인 것처럼 보인다. 무지는 그의 주된 재산 혹은 성질인 듯하다. 확실히 여기서는 저 포착하기 힘든 ‘나’를 발견한 다소의 희망이 있다. 어디 한 번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마치 두 눈을 가린 채 그것을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나’는 원인신 속의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심지어 ‘내 것’이라는 느낌마저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일체가 절대적으로 고요한 것같이 보인다. 조대신과 미세신 안에서는 그토록 오만하게 ‘나, 나’라고 선언하는 ‘나’가 여기서는 완전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나’는 숨바꼭질을 하듯이 그것을 찾는 자에게 붙잡히지 않는다. 원인신 안에서는 ‘나’가 어둠의 참호를 파고 들어가 버린 것처럼 보여, 그것을 찾는 자에게 추락하게 되고, 탐색을 끝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친애하는 구도자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참스승이 여러분의 앞은 물론이고 뒤에도 서서 여러분이 안전하게 이 어둠의 참호를 건너가게 해줄 것이다. 많은 학자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등을 돌리고 탐색을 포기한 채 참스승의 지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처럼 탐색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에게는 매우 유능한 스승, 사마르타 사드구르(Samartha Sadguru)라는 안내자가 있다.

원인신의 이 어둠 속에서 안정을 찾아
한동안 자신의 두 발을 그 안에 확고히 디디고 있다 보면,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무지의 주시자이다.”>
이 말을 들으면 ‘나’라는 도둑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어떤 용기가 일어난다.

자신이
<무지의 주시자>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인식함과

동시에
이런 생각도 일어난다.

<‘이 도둑은 여기 어딘가에 있다.
근처에, 어쩌면 조금 더 앞쪽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근처 어딘가에서 무지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탐색은
꾸준한 주시하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겠다.

현재 진행되는 그 주시하기는
원인신의 공(空) 너머에서,


대원인신(大原因身, Great-Causal Body)
안의 위치, 혹은 뚜리야(Turiya)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나’는 자기 자신을 찾은 것에 대해
이내 몹시 기뻐한다.

그 환희를 누가 묘사할 수 있을까?
그 환희 속에서

그 ‘나’는
“나는 브라만이다. 나는 진아지이다”
라고 소리친다.



* 네 번째 몸 ㅡ 대원인신ᆞ뚜리야


('내가 무지의 주시자이다' 에서)

“나”라고 말하는 자는
실은
"일체를 주시하는 브라만"이다.

그것은
지(知)의 성품을 가진 자인
그이며,

《‘내가 있다’는 느낌》이다.

이 확신이 확립되면
거기서 지복의 물결이
거듭거듭 일어난다.

나중에
이 지복이 잦아들 때
일어나는 기적을 보라.

탐색과 숙고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식에 도달한다.

“나는 지知의 성품으로
되어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내가 무지로 덮여 있는 것과
똑 같이
나는 지(知)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본시
무지나 지(知)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지와 지(知)는
‘나’에게서 태어났는데,
그것을 ‘나’로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러한 숙고의 도움으로,
‘나’ 안에서
무지와 지(知)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것들의 창조자가
‘나’임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知)는 나의 자식이고,
내가 지(知)의 아버지이다.

그것의 아버지로서
나는 그 지(知) 이전이며,
그것과는 다르다.

이 깊은
일련의 분별적 사고가
내면에서 밝아오면

대원인신,
곧 뚜리야 상태 안의 진아지인

‘나는 브라만이다(Aham Brahmasmi)’
하는 느낌도 물러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완전히 뿌리 뽑히고 만다.

그럴 때 ‘나’는
절대적으로 벌거벗어
일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

여기 이 적나라함에 도달하면
이 ‘나’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묘사할 수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여기서 발견되는
‘나’에 대한 묘사를 원한다면,

어떠한 사전에 나오는
어떠한 단어를 말해도
그것은 ‘나’가 아니다.

여기 이 ‘나’는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빛을 던지는 자》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묘사하려고
단어와 문장을 말할지 모르나,

그런 말들은
그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가 나오든
여러분은
그것을 ‘나’에 대한 묘사로 여기지만,
그런 의미들은 그것이 아니다.

만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다면,

말과 개념들을 떠나
깊은 침묵 속에 잠겨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라.


ㅡ '그대가 그것이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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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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