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th of The Mystic
깨달은 후 살아남는 사람은 드물다
Existentially, to be enlightened is to go beyond the capacities of body and brain. You are bringing something into your body and brain for which they have not been made, for which they are not ready.
So this new penomenon... and the new phenomenon is so powerful that it is going to create many kinds of disturbances. Particularly sleep can be disturbed;
most often it will be disturbed, because enlightenment has brought so much awareness that you cannot exhaust it during the day, you cannot exhaust it whatever you do.
존재적으로 말해서 깨달음은 육체와 마음의 능력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뇌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현상은 너무나 강해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야기한다.
특히 잠자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잠을 자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너무나 많은 각성을 가져와 그대는 낮 동안에 그 각성을 모두 소진시켜 버릴 수 없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 각성을 모두 소모할 수는 없다.
Just as for the ordinary man it is difficult to be awake – the sleep is so strong, and the gravity of sleep drowns all his efforts to be awake – he tries for a moment and forgets;
sleep takes over. Just the opposite is the case when enlightenment happens: there is so much awareness that
it is impossible for sleep to enter your body. At the most your body can relax – it can relax more than ever, it can
rest more than ever – but sleep has disappeared.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깨어 있는 것이 어렵다. 잠의 힘은 너무나 강해서 깨어 있으려는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든다. 잠시 노력해 보지만 곧 잊고 만다. 잠이 그를 밀친다. 깨달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정반대이다. 각성은 너무나 커서 잠이 육체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육체가 이완하는 정도이다.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완된다. 전에 없이 휴식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잠은 사라진다.
It is recorded that Buddha never changed his posture in sleep; he would sleep in the same posture the whole night. His disciple, Ananda, was puzzled. Many times he would wake up and look, and he could not believe how Buddha managed. In sleep you cannot manage to keep the same posture.
People cannot even manage the same posture while they are awake; there is so much restlessness that they have to turn this way and that. But in sleep you are unconscious...
붓다는 잠을 자는 동안에 한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온 밤 내내 한 자세로 잠을 잤던 것이다. 그의 제자 아난다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는 도중에 여러 번 일어나서 살펴보았지만 그 때마다 붓다는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자는 동안 한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깨어 있을 때에도 한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 끊임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디질 못한다. 게다가 잠을 자는 동안에는
무의식 상태에 있다.
One day Ananda finally asked, ”How do you manage the same posture the whole night long?”
Buddha said, ”You will understand one day when you become enlightened. I will give you the answer
but it will be difficult for you to grasp it. I simply rest,
I don’t sleep.
Since the day I became awakened, sleep has disappeared.”
마침내 어느 날 아난다가 물었다. 어떻게 온 밤 내내 한 자세로 주무실 수가 있습니까? 붓다는 대답했다. 언젠가 그대가 깨닫게 되는 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대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쉬고 있다.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달음에 이룬 그 날 이래로, 잠은 사라져 버렸다.
Other things may be disturbed in the bodies of different persons for different reasons, but the idea that enlightenment will bring better health is absolutely wrong. It will bring a wholeness of your consciousness, which is tremendously fulfilling. But just as the bird in the egg one day has to leave the egg behind... and it has been its protection, its life. Without it, it could not have survived. But the bird doesn't look backwards. It opens its wings and finds that the whole sky is his.
사람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문제들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깨달음은 그대 의식의 완전함을 가져온다. 그것은 무한한 충족감이다. 그러나 알 속의 새가 언젠가 알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듯이.. 알은 새의 보호물이었다. 생명이었다. 알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날개를 펼치고 하늘 전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날아간다.
The body is also a certain kind of egg, in which the ultimate potential of enlightenment can happen - and unless it happens you will continue to have new bodies - but the moment it happens, the body becomes useless.
육체 역시 일종의 알이다. 깨달음이라는 궁극이 가능성을 담고
있는 알이다.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새로운 몸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
육체는 쓸모 없어진다.
Most of the people who become enlightened die instantly. They simply cannot breathe anymore.
There is no reason why they should breathe.
The experience is so big that the heart stops.
They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it, it is so unknown.
It takes their breath away – literally.
깨달음을 얻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즉시 죽어버린다.
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을 쉬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경험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 즉시 심장이 멎어 버린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했던,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숨이 막혀 버린다.
Very few people survive enlightenment, and the reason why these people survive is strange: people
who have been adventurous, people who have enjoyed taking risks, who have lived like a tightrope
walker, whose lives have been on a razor’s edge, may survive. The shock will be there, but they
are accustomed to smaller shocks. They have never had
such a big shock, but smaller shocks have
prepared them to accept even this enormous phenomenon. They still continue to breathe; their heart
still continues to beat. But still the body suffers in many ways because something has happened
that the body cannot understand.
매우 드문 사람들만이 깨달음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참 이상한 것이다. 모험 속에 살았던 사람들. 위험을 즐기고, 줄타기 곡예사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 면도날 위를 걷는 듯한 위험 속을 살아왔던 사람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깨달음이 충격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은 수많은 작은 충격들에 익숙해져 있다. 이처럼 큰 충격은 물론 없었지만 수많은 작은 충격들이 이처럼 거대한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시켜 준 것이다. 그들은 계속 숨을 쉰다. 그들의 가슴은 여전히
박동을 계속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육체는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는다. 육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The body has its own wisdom, it has a certain kind of understanding. It functions well within its limits.
But enlightenment is not within its limits, it is too far away. It is stretching the body’s capacities too
much. So anything that is weak in the body is going to break – and because this is going to be the
last body, it will never be needed again. It has fulfilled its function. It has done the miracle. So if you
think of the ratio... out of ten enlightened persons at least nine die immediately. And out of ten who
do survive, nine remain silent. They lose their grip on the brain.
육체는 스스로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다.
육체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는 완벽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저 멀리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용량을 너무나 초과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약한
부분은 어디든 터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마지막 육체가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육체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 기적을 이룬 것이다. 비율을 묻는다면, 열 명의 깨달은
사람 중에 적어도 아홉 명은 그 즉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열 명 중에서 아홉 명은 침묵을 지킨다.
그들은 뇌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다.
This has never been said. Many things have never been said, because nobody has asked, nobody
has bothered, nobody has enquired. So there are a thousand and one things which are worth taking
note of, but nobody has ever talked about them.
이것은 이제까지 말해진 적이 없었다. 이제껏 많은 것들이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다.
For example, why do nine people out of ten die immediately? No scripture of the world discusses
it. The question of discussion does not even arise – no scripture even mentions it, and it has
been happening for centuries. Perhaps they were afraid that if they say it... People are already not
interested in enlightenment, and if you tell them that this is going to be the reward – that you become
enlightened and your fuse goes off – this may prevent even those few who might try. They will say,
”What nonsense it is. You work hard to attain enlightenment and what do you get as a reward? –
that you are finished! You are not even going to see yourself enlightened. So what is the point? It is
a strange game.”
예를 들어, 왜 열 사람 중 아홉 명은 깨닫자마자 죽는가? 세상의
어떤 경전도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생겨나지 않았었다. 어떤 경전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 직후의 죽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것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깨달음에 별 관심이 없는데, 깨달음을 추구했던 보상이 죽음이라고 말한다면... 깨달음을 얻자마자 퓨즈가 끊겨 버리는 것이 그 보상이라고 말한다면, 몇 안 되는 구도자들마저도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이야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보상이 죽어 버리는 것이라고? 자신이 깨달은 모습을 한 번
보지도 못하고?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이런 법이 어디 있나!"
Perhaps that’s why it was never mentioned. No scripture mentions that enlightenment disturbs the
body and the brain. But I want to say everything exactly as it is, because my understanding is that those who are not interested are not going to be interested, and those who are interested are not
going to be prevented by any truth. And in fact it will be good for them to know it ahead of time.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경전도
깨달음이 육체와 뇌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다. 왜냐 하면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들로서도 그 때가 되기 전에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Enlightenment certainly disturbs much psychosomatic health, because it is something for which the
body is not ready or prepared. Nature has not built in anything in the body so that enlightenment
can be absorbed. Suddenly a mountain falls on you – you are bound to be crushed.
깨달음은 틀림없이 심신의 건강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 하면 깨달음은 육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육체에 깨달음을 받아들일 만한
아무런 장치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 순식간에 산이 그대를 덮친다. 그대는 깔려 죽을 수밖에 없다.
Why do nine persons out of ten remain silent?
At the most it has been said, ”Because truth cannot
be said.” It is true, but there is a far more important thing which has not been mentioned. Out of ten
people, nine people’s brains get disturbed. They are no longer able to use the brain mechanism for
speaking, so it is better, they feel, to remain silent.
그러면 왜 살아남은 열 사람들 중에 아홉 명은 침묵하게 되는가?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진리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도가
그 대답이었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열 명의 사람들 중 아홉 명은 뇌에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하는 쪽으로 뇌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낀다.
They can see perfectly that their brain mechanism is no longer in a functioning state. And naturally...
the brain is a very subtle phenomenon; in the small skull of man almost seven million small nerves
create your brain. They are so small and so delicate that any small shock can disturb them, can
destroy them – and enlightenment is a tremendous lightning shock. It goes through the brain
disturbing many cells, many nerves.
그들은 자신의 뇌 구조가 더 이상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물론, 뇌는 매우 섬세한 현상이다. 인간의 작은 두개골 속에는 거의 7백만 개나 되는 작은 신경들이 뇌를 이루고 있다. 그 신경들은 너무나 작고 섬세해서 아무리 작은 충격에도
방해를 받고 파괴된다. 그리고 깨달음은 번개와 같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것은 수많은 세포들, 신경들을 파괴하면서 그대의 뇌를
통과해 간다.
Only one person out of ten can save his brain, and that is the person who has used his brain so
much that by sheer use it has become stronger and stronger. If he had not become enlightened, he
would have been a great philosopher, a great logician, a great mathematician or a great physicist.
He had a strongly built machine which could have been a Bertrand Russell or an Albert Einstein –
or a Gautam Buddha.
열 사람 중 한 사람만이 그의 뇌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 즉, 평소에 뇌를 극도로 많이 사용해서 뇌가 매우 강해진 사람이다. 만약
그가 깨닫지 않는다면 그는 위대한 철학자나 논리학자, 수학자
또는 물리학자가 될 것이다. 그는 버트란트 러셀이나 알버트
아인슈타인 혹은 붓다가 될 수도 있는 강인한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But ordinarily, people don’t use the brain so much.
For ordinary work it is not needed. Only five
percent of your capacity – the average human being uses
five percent of his brain. And the people
you call very great geniuses use only fifteen percent.
But if a person has used his brain to at
least one-third of its capacity – that is, thirty-three percent – then it has strength enough to survive enlightenment.
Not only can it survive enlightenment, it can serve it too.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뇌를 그처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일을 하는 데는 그럴 필요가 없다. 뇌 전체의 5퍼센트, 평균적인 인간은 자기 뇌의 5퍼센트만을 사용한다. 그리고 위대한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도 고작 15퍼센터 정도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뇌의 삼분의 일을 사용했다면, 33퍼센트를 사용했다면, 그 때 그는 깨달음을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뇌를 가진 것이다. 그러한 뇌는 깨달음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깨달음에 도움을 준다.
Out of ten persons whose brains survive, nine never become masters; only one becomes a master.
The nine can at the most be teachers.
They can talk about their experience. They can quote
scriptures. They can be very famous teachers.
People can mistake them for masters; they will have
many followers – but they are not masters,
because the quality of the master is missing in them
뇌를 보존한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스승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스승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를 스승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다. 스승이 지녀야 할 중요한 질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The master is not only a teacher but a magnet.
To teach is one thing, but to teach with a magnetic
force so that just by hearing it you are transformed... then there is a master. The teacher can give you words, but he cannot give you life. The teacher can give you explanations, but he cannot give you experience. The teacher can approach your mind, but he cannot reach your heart
스승은 단지 선생일 뿐이 아니라 하나의 磁力이다. 그냥 가르치는 것과 자력과 같은 힘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 그대는 변형된다... 그것이 스승이다.
선생은 그대에게 단어들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줄 수는 없다. 선생은 그대에게 설명들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을 주지는 못한다. 선생은 그대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가슴에 도달하지 못한다.
Why does it happen to only one person in ten?
Before enlightenment, if a man has been a teacher
already... if, although he has not experienced, his intelligence is so comprehensive that he can understand what has happened to others, he need not have to commit mistakes to learn. He can see others committing mistakes, and that is enough for him to learn.
왜 열 명 중에 한 사람에게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깨달음 이전에 이미 선생이었던 적이 있다면, 혹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깨달은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지성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실수를 볼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 충분히 배울 수 있다.
And if he has been articulate from his very birth, has enjoyed the very sound of words – their music,
their poetry – if he has been expressive, has never found himself in any difficulty as far as expression is concerned, and his expression has been convincing... not that his argument was greater than your argument, but the way he managed to express himself, the poetry of his expression,
the argument of his expression, the music of his expression is convincing, and yet he has not experienced himself...
그리고 만약 그가 처음부터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단어들의 음(音)을, 그 음악, 그 시를 즐길 수 있었다면,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표현에 관한 한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매우 설득력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단지 자신의 주장이 남의 주장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그의 표현이 지닌 시와 음악, 그 주장들이 지닌 설득력이 너무나 뛰어났다면...
If this kind of man happens to become enlightened,
then he is coming with the skill of being very
articulate. His enlightenment will add something to his articulateness. It will make it authoritative;
it will give it magnetism. It will make it a presence to be felt, a presence to be overpowered by, a presence in which you easily fall into love, into trust.
이런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는 완벽한 표현의 능력을 지니게 된다. 깨달음은 그의 표현 능력에 무언가를 더할 것이다.
깨달음은 그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 자력을 줄 것이다.
느낄 수 있는, 압도될 수 있는, 쉽사리 사랑에, 신뢰에 빠지게 되고 마는 기품을 지니게 해 줄 것이다.
The teachers who start teaching after their enlightenment remain amateur. But this man, who has been a teacher already, is immensely enriched by enlightenment as far as being a master is concerned.
깨달은 후에 가르치기 시작하는 선생들은 아마추어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이미 선생이었던 사람은 깨달음과 동시에
스승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게 된다. [...]
So it is a very rare phenomenon: first to be enlightened, then to survive enlightenment, then to save
your brain so that you can be a master. And that depends on whether you exercised your brain
before enlightenment to at least one-third of its potential. Less than that won’t do.
따라서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먼저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스승이 되려면 뇌를 다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뇌를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깨달음 이전에 적어도 뇌의 삼분의 일을 사용했느냐에 달려 있다. 그 이하로는 안 된다.
Hence my insistence: Don’t believe.
Doubt, think, enquire.
그 때문에 나는 강조하는 것이다.
믿지 말라. 의심하라. 생각하라. 탐구하라.
Sharpen your intelligence, at least to one-third of its potential. And meanwhile meditate, so the day
you become enlightened, you can say something to the world. You owe it.
그대 잠재력의 삼분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지성을 발달시켜라. 그리하면 명상을 통해서 언젠가 그대가 깨닫게 되는 그 날, 그대는 세상을 향해 뭔가를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Existence waits millions of years for somebody to become enlightened, and when someone
becomes enlightened existence wants him to share,
to spread the word, whatsoever the cost, to
all those who are fast asleep. They are not all going to awake, but somebody may hear the call.
Even if a few hear the call, that is enough reward.
존재는 누군가의 깨달음을 얻기를 기다리며 수백만 년을 기다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존재는 그가 그의 깨달음을 나누기를,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말을 펼치기를 바란다. 그들이 모두 깨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 그 부름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을 듣는다 해도 그것은 그에게 충분한 보상이다.
- 오쇼: The Path of The Mystic 23장 Fall into tru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