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문제(분리),
하나의 해법(속죄),
하나의 진리(신과 그의 아들).
진리를 환상으로 가져가
환상의 관점에서,
진리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리는,
허상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리의 의미는
진리 자체가 기준이라야 한다.
진리를 허상으로 가져오려고 할 때
너는 허상을 실재로 만들려는 것이며,
허상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해서
허상을 간직하려는 것이다.
-- T-17.I.5:1-4 --
여기서의 주제는,
마음으로서의 우리가
기적수업을 읽는 것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리의 사고체계,
즉 몸으로서의 개별적인 정체성에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또 하나의 구절을 봅니다.
우리는 기적수업과
용서라는 기적수업 메시지를,
<세상과 몸은 허상>이며,
단순히 허상일 뿐인
<분리와 특별함의 사고체계>가
<투사된 것>일 뿐이라는,
기적수업의
비이원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수업의
비이원적 형이상학의
바탕을 고려해볼 때,
예수와 성령은,
기적수업의 구절에서
우리에게 말하듯,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달리 생각한다면
혼동을 자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리 생각하는 것은,
특별함을 강화할 뿐이며,
기적수업의 목적은
그 특별함을 해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특별함의 꿈은,
꿈 자체의 관점에서는
해제되지도 않거니와,
그 본질 그대로 보일 수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몸은, 오직 몸을 볼 수 있을 뿐,
몸으로 대변되는, 분리가 있다는
마음의 믿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뽑아낸 주제로
특별한 관계를 공식적으로 논의해보죠.
그 주제는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가져온
그림자 인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 교향곡에서 친숙한 주제이죠.
죄는 과거에 속한 것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나쁜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졌다고 믿고,
우리가 타인에게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김으로써,
현재에 그런 일을
계속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가
우리를 사랑했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어른이 되어서 우리는
결백한 희생양이라는 우리의 자아상을
보존하기 위해,
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겠죠.
어린 시절
가혹하고 처벌적이었던 권위를 지각하며,
그들에 반항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는 우리 길을 거스르는,
미래에 권위를 가진 등장물을 모두,
패배시키고 좌절시키려고 할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특별한 그림자 등장물
각각의 뒤에는,
우리가
적으로 만들어낸 에고의 그릇된 신,
위대한 등장물이 서 있습니다.
그것이 특별한 관계의 핵심이며,
거기에서
다른 모든 관계들이 뒤를 잇습니다.
그러나 허상을
진리 앞에 가져가면,
너는 진리로부터
허상이 실재가 아님을 배워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관념을 남김없이
진리 앞에 가져가라.
하나라도 남겨두면
너는 실재의 서열을 세워
너 자신을 가두게 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참이기에,
실재에는 서열이 없다.
-- T-17.I.5:5-7 --
이는 교과서의
시작부분을 상기시킵니다.
기적수업 교향곡의
기반을 형성하는 주제,
즉 기적에는 난이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허상이라면,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이
똑같이 실재가 아니라면,
걱정을 해야 하는 주제에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문제든
그 문제에 대한 교정은,
문제의 형태와 무관하게,
우리의 <투사>를,
<결정을 내리는 마음>에 가져감으로써
신의 진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분리),
하나의 해법(속죄),
하나의 진리(신과 그의 아들).
우리가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여기
모든 허상을 똑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천국의 하나임이라는 진실을 반영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분열된 마음(에고),
바른 마음(성령),
결정권자를
갖고 있음을 보는 겁니다.
속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렇듯 신의 아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에는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ㅡ 케네쓰 왑닉, 기적수업 강해 교과서편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