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수업 : 텍스트 7장
5. 진리의 인식
1 신의 의미가
왕국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곳이 바로 신께서, 당신의
의미를 두신 곳이기 때문이다.
신의 의미는
시간 안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왕국 안에서 쉬고 있을 뿐이니,
그대와 마찬가지로, 신의 의미도
본래 왕국에 속하기 때문이다.
정녕
신의 의미인 너희가, 어떻게 자신을
왕국에 없다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오직 너희 자신을, 실재가 아닌 것으로 경험함에 의해서만, 너희 자신이 너희의 의미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에고가
제정신이 아닌 이유이다.
에고는 그대가,
그대의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너무도
모순되므로,
명백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가
실제로 배울 수 없는 레슨이며,
따라서 그대가 실제로
가르칠 수 없는 레슨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늘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비록 에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에고는
항상 무효화되고 있으며,
그대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은, 에고에 대한
충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데,
마음은, 본래 에고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고에게 ‘반역하는’ 것은
실로 평화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적’은
그대의 친구이다.
우리는 앞에서 에고의 친구는
그대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에고는
자신이 전쟁 중에 있고,
따라서 동맹자들이, 필요
하다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있지 않은 그대는,
형제들을 찾아보아야 하며,
그대가 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동등한 자들만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3
신의 동등한 아들들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서로 경쟁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형제 중의 누구라도,
그들과 완벽하게 동등한 자라고 보지 않는다면,
경쟁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침투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에 맞서
경계해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의 모든 갈등은
그 아이디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충하는 이해관계들
(interests)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그대는
이미 불가능한 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대가,
그대 자신을 비실재라고
지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4
왕국 안에 있음은
단지 그대의 모든 주의를
왕국에 기울이는 것이다.
그대가
진리가 아닌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믿는 한,
그대는 갈등을
그대의 선택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선택 대상이겠는가?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보이는 것과
실재는 전혀 같지 않다.
정녕 왕국 자체인 그대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재는
그대의 것이니,
그대가 정녕
실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왕국이 아니라
너희 마음 안에서,
소유하기와 존재하기가
궁극적으로 일치되는 방법이다.
너희 마음 안에 있는
제단이, 유일한 실재이다.
그 제단은 생각에 있어서
완벽하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제단은
완벽한 생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 제단은
오직 형제들만 본다.
왜냐하면, 그 제단은
오직 그 자신의 빛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5
신께서 직접
너희 마음을 밝혀 주셨고,
당신의 빛으로 너희 마음을
밝게 유지시켜 주신다.
왜냐하면, 신의 빛이 바로
너희 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에 대해 질문했을 때,
너희는 정녕 응답받았다.
그 답은,
실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확립함으로써,
그저 질문
자체를 무효화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결코 질문하지 않는 이유이다.
성령의 유일한 기능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들을 무효화함으로써,
확실성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확신하는 자들은 의심하지
않기에, 완벽하게 평온하다.
그들은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을 완벽한
평정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동안 빈번히 언급했듯이, 치유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과학>이다.
치유는 우리가 이미
사용했던 의미에서의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하기에, 예술이다.
영감은 낙심하게 만들기(dispiriting)의 반대이며, 따라서 기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낙심한 자들은 문자 그대로
‘영(靈)이 없다고(without the spirit)’
믿기 때문에 우울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영감을 줄 때, 그대는 그들 안에 영(Spirit)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마법일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치유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이미 그들 안에 있는 영을 정녕 인식하며, 그럼으로써 영을 다시 깨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치유사가
부활과 생명의 일부인 까닭이다.
병자들의 마음 안에서
영이 잠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서,
영을 지각하고 기뻐할 수 있는
부분이 잠든 것이다.
7
치유는 또한 과학이다.
왜냐하면, 치유는
신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분의 법칙들은 진리이다.
그것들은 진리이기에
완벽하게 의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적용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과학의 진정한 목적은
예측이나 통제가 아니라,
오직 이해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것이 구하는 법칙들을
확립하지도 않고,
예측을 통해 그것들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그것들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단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접근법일 뿐이다.
영감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마법으로 오해될 수 있으며,
과학이 이미 있는 것과
분리된 것으로서 수행되어,
그것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지각될 때마다,
과학은 반드시
마법으로 오해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것은,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에고의 음성일 뿐이다.
8
진리는 단지 인식될 수 있을 뿐이며,
단지 인식되어야 할 필요만 있다.
신의 법칙에 따르면,
<영감>은 <영의 것>이며
<확실성>은 <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영감과 확실성은
둘 다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영감>은
<신을 대신하는 음성>에서 비롯되고,
<확실성>은
<신의 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치유는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들이
완벽하게 온전하다고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치유는
여전히 <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치유는 <신의 음성>과
<그분의 법칙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치유는
이것들의 결과로서,
신을 알지 못하는
마음 상태 안에서 일어난다.
이 상태는
신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자는 자들은
얼이 빠졌다(stupefied).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unaware) 있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9
성령은,
성령이 그대 안에 있음을
그대에게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그대를 통해 일해야 한다.
이것은 그대가
신의 일부이므로,
신 안에
있다는 앎을 향한
<중간 단계>이다.
성령이 고취시키는 기적에, 난이도가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창조의 모든 부분은 한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뜻이며
또한 그대의 뜻이다.
<신의 법칙>이
이것을 확립하고,
<성령>은
그대에게 그것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그대가 치유할 때,
그대는 신의 법칙들을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이며,
에고의 법칙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잊기(forgetting)는,
단지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적절하게 지각된다면,
잊기는
기억하기의 반대가 아니다.
모든
부정확한 지각이 늘 그러듯이,
부적절하게 지각되었을 때
잊기는 다른 것과 갈등한다는
지각을 유발할 수 있다.
한편 모든 적절한 지각과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지각되었을 때, 잊기는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10
그렇다면, 모든 능력을
성령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성령은 그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
성령은 그것들을 오직
치유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대를 오직
온전하다고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치유를 통해 그대는
온전성에 대해 배우며,
온전성에 대해 배움을 통해,
신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
그대는 이미 신을 잊어버렸지만,
성령은 여전히 그대의 잊기는, 반드시
기억하는 방법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반대편을, 반대하는 분리된
능력으로, 지각되지 말아야 함을 안다.
이렇게
반대편을 반대하는 것이, 바로 에고가
모든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에고의 목표는
언제나 그대가 대립 상태에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에고의 목적 또한, 성령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통합되어 있다.
그리고
에고와 성령의 목적이 어떤 방식으로든, 혹은 어느 정도로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고는 언제나 가르고 분리시키려 한다.
성령은 언제나 통합하고 치유하려 한다.
그대가 치유할 때, 그대가 정녕 치유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치유에서
아무런 순서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치유는,
차이에 대한 믿음 없이
온아들을 지각하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차이에 대한 믿음을
무효화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각은 신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마음 상태에서조차,
신의 법칙들과 일치한다.
바른 지각의 힘은
너무도 거대해서,
마음을 신의 마음과
일치 상태로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바른 지각은
너희 모두 안에 있는,
신의 끌어당기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12
신의 끌어당기심 혹은
신의 뜻에 대항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엄청난 망상이다.
에고는 자기가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그대에게 그런 능력을
선물로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신께서는 그대에게,
그대가 소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대의 존재인
선물을 주셨다.
그대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지 못함으로써,
그대는 그대가 참으로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치유는, 신의
법칙들과 일치되게 생각하고,
그것들의
보편성을 인식함으로써,
앎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인식 없이,
그대는 신의 법칙들 자체를
그대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 법칙들은 무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는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13
먼저 천국을 구하라.
왜냐하면 그곳이야말로
신의 법칙들이 참되게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법칙들은
진리의 법칙들이기 때문에,
오직 참되게만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직 천국만을 구하라.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는
정녕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께서는 아주 엄밀하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
(All in all)이시다.
모든 존재는,
정녕
모든 존재이신
그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신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존재는
정녕 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그대 형제들 안에서,
에고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에고가
그대 안에 들여놓은,
위험하다는
느낌을 잊는 방법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것이기에,
그대와 형제
모두 안에서
성령을 강화시킨다.
사랑은 오직
이런 초대만 필요로 한다.
사랑은,
온아들의 참된 존재이기에,
온아들
전체에게 자유로이 온다.
그대가
사랑으로 깨어남에 의해,
그대는
단지 그대의 존재가
아닌 것을 잊을 뿐이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참된 존재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ㅡ 기적수업 밴드ㆍ텍스트 7장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