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는
죄책감의 투사를
해제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매우 총명합니다.
성령은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에고보다
언제나 한 발짝
앞서 있습니다.
성령은
에고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투사>를 역으로 이용해서,
에고와의 전세를 뒤집어 놓습니다.
투사를
<영사기>라 하고,
내가 바로
그 영사기라고
가정해봅시다.
나라는 영사기는
나의 <죄책감이라는 필름>을
항상 상영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이 세상을
나의 죄책감으로
가득 채운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필름>에서
<상대방이란 스크린>에
이 죄책감을 투사하여,
모든 사람안에서
죄와 죄의 책임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죄책감을 없애는 길이라는
에고의 논리를
내가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 혼자서는
나의 죄책감을
다룰 길이 없습니다.
죄책감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죄책감을
놓아주는 척 하다가
오히려
죄책감을 강화함으로써,
나를 공격하는데
에고가 사용해온
바로 그것이,
즉
나의 죄책감을
바깥에 둔다는
그 작용 기전이,
죄책감을
놓아줄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것이
순수하고 완전한
용서입니다.
용서는
<죄책감의 투사를
해제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고
놓아주지 못하는
죄의 책임을
당신이라는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이
나에게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입니다.
내가 당신 안에서
넘겨보고 용서하는
죄와 죄책감은
사실 내가
나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죄와 죄책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죄의 내용이 같다는 것이지,
형태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형태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죄를 용서하면,
사실
나 자신 안에서,
그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수업
전체의 핵심입니다.
기적수업에
실린 모든 내용은
사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책감을
다른사람에게 투사하고,
따라서 우리가
성령이 권하는 대로
그 사람을 본다면,
즉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어둠을
당신에게 투사하여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어둠에 있지 않다고,
당신은
사실은 빛 속에 있다고
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것은
내가 네 안에 둔 어둠을
놓아 보내주는 결정입니다,
나는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빛이
당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도 빛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같은 빛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는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장 힘들었던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우리가 가장 불쾌하게 여겼던 사람,
같이 있기가 가장 거북했던 사람,
그들이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보낸"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비록
처음에는 우리의 죄책감을
투사하고 싶어했지만,
그들에 대하여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성령이
그 사람들을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삶이라는 스크린과 필름>
속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죄책감이 사실
우리 안에 있었음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죄의 책임을
놓아 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지요,
오직
다른 사람 안에서 본
죄의 책임을 용서해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책감을 용서하여,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 안에서
용서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몇 줄 안되는 글에
기적수업의 내용 전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ㅡ 케네스 왑닉 박사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