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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묵상집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탄생입니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4.03|조회수109 목록 댓글 1

[1월 25일] 알렌의 워크북 친구 25과



나는
어떤 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I do not know
what anything is for.



실습 지시사항


목적

당신이
어떤 것에 부여한
목적이

완전히
의미 없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함. 


이것은 당신이
그런 목적들을

포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연습: 

여섯 번, 각 2분 동안.


◉ 
오늘의 아이디어를
천천히 반복하세요.


◉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길을 끄는 대상에
충분히 머물면서,

“나는 _____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라고
아주 천천히 말하세요. 


그리고
다음 대상으로 옮겨가세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사람이든 아니든
구별하지 말도록 하세요.


주의 사항: 

대상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반복할 때, 

당신이 얼마나
그 대상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지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몸과 같은 살아 있는 것은 물론
무생물들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이 분리된 자아
섬기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것들의
진정한 목적일 수 없습니다.



해설


권장되는 실습의 속도가
얼마나 빨라지고 있는지
알아채셨나요? 


어제 우리는
1분씩 다섯 번의
실습으로부터, 

2분씩 다섯 번으로
옮겨왔습니다. 


오늘은 2분씩
여섯 번으로 증가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시사항을 따르려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요? 


워크북은
서문에서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믿거나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환영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심지어 적극적으로
저항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디어들을 사용”
(5문단) 하는 것이며,

“그 아이디어들을
지시 받은 대로 적용하는”
(5문단) 것입니다. 


그 아이디어들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그 밖에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디어들이

우리 삶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을 지시된 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그 목적을 모릅니다. 


명백한 질문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입니다. 


오늘 레슨은
그 질문에 답합니다.


“모든 것은
너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1:5) 


이것은
분명히 어제의 레슨,

“나는
나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지각하지 못한다.”

와 관련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모르지만, 
그렇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에고 목표들의 관점에서”
(2:1)에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에고는
네가 아니기 때문에”(2:2),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자아(Self)가 아닌, 

자신의 에고를
지원해 줄 것들을
고르고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에고는 네가 아니다.”
라는 말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듣지 않고서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에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는
대상들에게 어떤 목적, 


우리의 에고를 지원할
목적을 “부여”합니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우리는 속상해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목표들은 

“개인적인” 이해들과
관련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개인적인(personal) 이해
없기 때문에

그 목표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3:2)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때 생각하는 

“개인(person)”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개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공유하지 않는

어떤 실제적인 목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공유가 바로
그 목표들을

실제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유된 목표들은
우리의 정체의 실재성을
인식합니다. 


에고의 목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물의 목적에 대해서
너무나 혼동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레슨은, 우리가
표면적인 수준에서는

사물의 목적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전화기가
물리적으로 곁에 없는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는
목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4:3).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왜 전화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책을 주문하려고
서점에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왜 그 책을 원하지요? 


왜 지금, 정확하게 바로
이 순간에 전화를 할까요? 


모든 것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 깊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의식적인 목적들이

실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위해 
[우리가] 정해 놓은 목표들을

기꺼이
포기하려 해야” 합니다.

(5:1)


우리의
판단의 토대 전체가
썩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대상들”이
우리 밖에 있다는

아이디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우리의 부분입니다. 


우리가
그런 거짓 전제에
근거하는 한, 

우리의 목표들은
왜곡될 것이며

우리의 판단은
불완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그것의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전화가 와서 
“나쁜 뉴스”를 전해
준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수업은 우리가 완전히
무지하다고 주장합니다.


“신에 의한 너의 창조와 
네가 창조하는 것 사이의
혼동이 너무도 심해서, 

네가 무엇이든
아는 것이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T,3:53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요?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이것은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른다면,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에고와
혼동하므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몸에 자리 잡은, 
분리된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 뒤에 있는
핵심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에고의 목표와 관련지어
평가합니다.

(2:1)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평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그것은 다른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전제로부터, 
어떤 것을 알거나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분입니다.


요람에
누운 갓난아기는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의 부분임을
배우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기는 처음에는
그것을 모릅니다. 


잘 관찰해
본 적이 있다면, 

아기들이
자신의 발을

마치 낯선 대상처럼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생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볼 때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이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치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판단들은
단지 과장되었거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들은
너무나도 빗나가서, 
터무니없습니다.


세상의 목적에 대한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도
기억하지 말자. 

우리는 알지 못한다. 

(T,31:12)


우리가
어떤 것의 목적을 모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목적을 모르므로,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결핍된
이런 모든 앎을 습득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고요해져서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기억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T,31:20


텍스트는
세상이 가장 두려워할 말은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나는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혹은
세상이나 나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T,31:60)


텍스트는 이어서
이것을 배우는 것이

구원의 탄생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판단할 수 없는지
받아들이기, 

이곳이 바로 구원이
탄생하는 곳입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탄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앎을 차단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이 지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따라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네가 지각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믿는
잘못을 범하지 마라. 


왜냐하면 너는 그것의
의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네가 지각하는 것의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는 한, 

너는 성령에게 부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지각하는

어떤 것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네가
가진 단 하나의 생각도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탄탄한 첫걸음이다. 

(T,10:75-76)



원문 출처:
http://www.circleofa.org/library/acim-commentary/workbook-companion/lesson-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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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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