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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묵상집

<앎>이 <존재>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4.15|조회수108 목록 댓글 1

기적수업  : 텍스트 8장


8. 수단이나 목적으로서의 몸


1

몸에 대한 태도는
공격에 대한 태도이다.


모든 것에 대한
에고의 정의는 유치하며,

항상 어떤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에고의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에고가
진정한 일반화를 할 수 없으며,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이 그것에 부여하는 기능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것의 정체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에고에게,
몸은 공격의 수단이다.


그대를 몸과 동일시하는
에고는

그대가
공격의 수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믿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의 건강은
몸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몸의 상태는
오직 몸의 기능에 대한
그대의 해석에 달려있다.


2

기능의 측면에서 내리는
정의가 열등한 이유는,

그 정의가
정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능
존재에서 비롯되므로
존재의 일부이지만,

그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


전체는
정녕 부분을 정의하지만,

부분은
전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각만큼이나
앎에서도 진실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전체적으로
아는 것인 이유는,

앎과 지각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지각의 경우,
전체는 부분들로 구축되며,

부분들은 분리되어
다른 배열로 재조립될 수 있다.


앎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앎의 배열은 영구적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갖는

유일한 영역은
변화가 가능한 영역이다.


변화가
불가능한 곳에서는

부분과 전체 사이에
정녕 아무런 차이도 없다.


3

몸은
마치 몸의 소유권을 두고

두 음성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존재한다.


이렇게
지각되는 배치상태에서는,

몸은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한 음성으로부터
다른 음성으로 옮김으로써

건강과 병의 개념 둘 다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에고는, 늘 그러하듯이,
수단과 목적을 근본적으로
혼동한다.


몸을
목적으로 여기는 에고는

몸에 대한
진정한 용도를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몸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동안 에고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모든 목적의
현저한 특징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대가
그런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것은 결코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에고가 끊임없이

한 목적에서 다음 목적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에고가 그대에게 여전히

뭔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4

그동안 목적으로서의
몸에 대한 에고의 믿음

극복하기가
특히 어려웠는데,

이것은
목적으로서의

공격에 대한 믿음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병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아프다면,

그대는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에고의 확고한 믿음에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에고의 관점에서
아주 매력적인 주장이니,

이 주장은
병 밑에 깔린 명백한 공격
감춰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그대는
에고를 변호하기 위해

병이라는 거짓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5

그대는 병이
그대가 원하는 것과

완전히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병을 거짓 증거로
지각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병은
결백하고 믿을 만한
증거로 보이는데,

이는 그대가
철저하게 반대심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해본다면,

그대는 병을
에고의 관점을 위한

그토록 강력한 증거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6

더 정직한 진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에고를 원하는 자들은
에고를 변호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택한 증거들은

처음부터
의심해 봐야 한다.


에고는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증인은 부르지 않는데,

이 점은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앞에서
판단은 성령의 기능이며,

성령이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준비된 기능이라고 말했다.


재판관으로서의 에고는
어떤 것에든 오직 편파적인
판결만 내릴 뿐이다.


에고가 증인을 부를 때는,
이미 에고가 그 증인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이다.


7

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여전히 진실이니,

몸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고는
몸을 목적으로 확립하는데,

그러면 몸은
자신의 진정한 기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다.


에고의 유일한 목적은
모든 것의
기능을 보지 않는 것이다.


아픈 몸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이
의미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몸은 병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이 의미 있는 경우는 오직
몸에 대한 에고의 해석이 근거하는

두 가지
전제들이 참일 때이다.


그 전제들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몸은 <공격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와,

<그대는 정말로 몸>이라는 전제이다.


이 전제들 없이는, 병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8

병은 그대가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병은
그대의 허약함과 취약함,

그리고
외적인 안내에 의존해야 하는

그대의 극단적인
필요성에 대한 증거이다.


에고는
에고의 안내에 대한
그대의 필요를 옹호하는

최고의 논거로
병을 사용한다.


에고는
파멸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한
처방전을 끊임없이 내린다.


성령은
똑같은 데이터에 대해
완벽하게 자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분석조차 하지 않는다.


그 데이터가
무의미하다면

그것을 검토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진리(truth)의 기능은
진실한(true)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데이터를 가지고,
이치에 맞게 만들려는 시도는
소용없는 일이다.


그대가 그 데이터를
다루는 어떤 방법도,
무(nothing)를 낳는다.


그 결과들이
복잡해질수록

그 데이터가
무임(nothingness)을
인식하기가 더 어렵겠지만,

전제들이 초래할, 모든
가능한 결과들을 검토해야만,

그 전제들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9

학습 도구는 교사가 아니다.


학습 도구는
그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그대에게 말해줄 수 없다.


그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대가
에고의 혼동을
받아들였으며,

그대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학습 도구가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병은 다만 그대가
답을 모르는 교사의 안내를

고집스럽게 요청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에고는 그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에고에 관해,
전적으로 진실인 유일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가 더 있다:

<앎>이 <존재>라면,

그리고
에고는 <앎>을
갖고 있지 않다면,

에고는
아무런 <존재>도
갖고 있지 않다.


10

그대는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의
음성이

어떻게 그렇게 끈질길 수
있느냐고 물을 만하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의

- 비록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닐지라도 -

왜곡시키는 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이
어떻게 그대가 보고 듣는 것을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를 많이 갖고 있다.


아무도
거짓 사례들을 축적하는

에고의 기술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그대가 오직
진리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아무도 에고에게 귀 기울이려는
그대의 용의를 의심할 수 없다.


그대가
에고를 내려놓을 때,
에고는 사라질 것이다.


성령의 음성은
그대가 들으려는
용의만큼만 크게 들린다.


성령의 음성은
그대의 뜻을 침범하면서까지
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


성령은
자유를 추구할 뿐
결코 지시하지 않는다.


11

성령은
오직 그대의 형제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만

몸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으로써
성령은 <그대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을 치유할 것이며,
따라서 그대를 치유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성령이
그것을 보는 대로의 기능에

일치하게 사용되면,
병들 수 없다.


그와 다르게
사용되는 모든 것은
정녕 병이 든다.


몸이
분열된 마음의 거울이
되도록, 허용하지 말라.


몸이,
왜소함에 대한

그대 자신의
지각의 이미지가,
되게 하지 말라.


몸으로 하여금
공격하겠다는

그대의 뜻을
반영하게 하지 말라.


건강은 어떤 것이든

<자신의 해석>을
성령에게 맡겼을 때,

그것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성령은 어떤 것에서도
공격을 지각하지 않는다.


건강은 몸을
사랑 없이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결과이다.


건강은
유일한 교사의 안내 아래

생명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교사는
생명 자체를 위한 음성이기에,
생명이 정녕 무엇인지 안다.



ㅡ 기적수업 밴드ㆍ텍스트 8장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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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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