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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묵상집

우리 마음이 원인이고 세상은 결과입니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5.13|조회수110 목록 댓글 1

[11월 1일] 알렌의 워크북 친구 305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평화가 있다.

There is a peace
that Christ bestows on us.



실습 설명


워크북 파트 II 실습 설명을 읽으세요. 이것을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읽기: 레슨의 해설 문단을 천천히, 나의 이야기처럼.

◉ 기도: 레슨의 기도문대로 기도하기. 여러 번 할 것을 권합니다.

◉ 아침과 저녁: 그 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Open Mind Meditation )을 하세요.

◉ 매시간 기억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을 하세요.

◉ 자주 상기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잠시 명상을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세요.

◉ 유혹에 대응하기: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여 평화를 회복하세요.

◉ “워크북 특별 주제”읽기: 하루에 한 번, 그날에 해당되는 워크북 특별 주제를 천천히 읽으세요.



해설


저는 오늘 레슨에
조금 저항을 느낍니다.


저는
오늘 레슨을
판단합니다:


"오늘 레슨은
나에게 충분히
영감을 주지 않아.”

혹은 “오늘 레슨은
별로 새로운 게 없어.”


오늘 레슨은
“너무도 깊고 고요하며,

방해받을 수 없고
전적으로 변함없어서

이 세상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것이 없는

그런 평화”(1:1)에
대해 말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그런 평화를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걱정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제한된 평화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변함없어 보이지
않습니다.


쉽게 그 평화가
흔들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간
좌절감을 느낍니다.


저는 외로움이
평화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약간의
흔들림이라도 있으면

나의 평화는
사라질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우리 대부분이
기적수업을 읽으면서

이렇게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아침,
제 기억에 오늘 레슨을

하고 있던
날이 기억납니다.


그날 제가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던 평화를
“파괴”한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제가 있던 방을

두 번 들어왔다
나간 것이었습니다!


오늘 레슨은
신의 평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온”(2:3)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레슨은,
“오늘 우리가

그것을 판단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2:2)라는
기도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신의 평화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나는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신의 평화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합니다.


신의 평화는
여기, 지금 있으며,

또한 내 마음의 일부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신의 평화를 받아들이고
느끼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어떤 외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평화를 느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이
바뀔 때까지는,

또는
이것이 일어날 때까지는
평화로울 수 없어.”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나의 평화를
뺏어갈 힘이 있는

무언가가 존재
한다는 확언입니다.


신이
그런 평화를
주셨는데,

다른 무언가
신의 뜻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것이
그 평화를 제거했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신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것이 있다고
확언하는 것입니다.


너는 있다고 믿는 것을 보며,

그것이 있기를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

(T,25:23)


기적수업은 실제로
내가 평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평화를
제거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입니다!

(T,19:V)


이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실로 신의 평화를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신의 선물을
거부하기 위해

선택한
망상입니다.


나는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 사람, 이 상황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구요.

저는
당신의 평화를 원하지만
그들이 빼앗아 갔다구요.”


나는
평화에 대한

나의 거부를

다른 무엇엔가
투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신의 평화를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신의 평화가 약하고
손상되기 쉬우며

아주 쉽게
흔들린다고 판단합니다.


나는 왜 평화를 내다
버리고 싶어 할까요?


나는 왜
신의 평화를 거부할까요?


 T-19.IV(A).2)에서

텍스트는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너희는 왜 평화가
집 없는 신세가
되기를 원하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살기 위해

빼앗아가야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너희가 그렇게나

치르기를 꺼려하는
비용처럼 보이는가?

(T,19:41)


예수는 만약
우리가 평화를 받아들이면

뭔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제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

형제들 안에서

죄를 발견할
정당한 이유입니다.

(T,19:59-60)


나는 다른 무언가를
비난하고 싶습니다.


내가 단순히
평화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나의 불행에 책임이
있으므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영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모든 공격을
포기해야 하며,

그 뒤에는
공격을 포기하기 위해서
내가 죄책감을 포기하고

또한 분리되어 있고,
혼자라는 느낌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믿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은
나의 분리된 정체의
토대입니다.


신의 평화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2:3)


나는
내가 죄 있고, 무가치하며,
불완전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런 판단이 내가
공격을 방어 메커니즘으로
유지해야 하는 필요,

내가
내 안에서 보는
부적당함에 대해

어떤 사람이나
환경을 비난해야 할
필요 뒤에 있습니다.


만약 신의 평화를
무조건적인 평화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마치 내가
사물을 소유한다거나

다른 사람들, 혹은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모습 등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혼자
내버려 둬도 괜찮아.

내 돈을
가져가도 괜찮아.

당신이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해도 괜찮아.

그런 것들은
전혀 나의 평화를
깨트리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조건적이라는 것은
조건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조건을 원합니다!


무조건적인 평화!


이 아이디어가
에고를 까무러치게
놀라게 합니다.


모든 이가
평화를 구합니다.


그렇구말구요.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른
조건에 맞춰

조정함으로써

평화를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어떤 조건에도 상관없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조건들은 잊어라.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너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평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평화를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평화?

이러저러한
상황은 어떻게 하고?”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반영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않기에

우리는
평화롭지 않은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세상이 원인이고

우리의 평화,
혹은 평화의 부재는

세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 마음이 원인이고

세상이
결과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조건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신의 평화가
먼저 와야 합니다.


우리는, “신의 평화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조건과

관련된 목표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평화를
받아들이면,

우리
마음으로부터
투사된 세상은

그에 따라
바뀔 것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하는
치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난

치유의 결과
뿐입니다.


아버지,
제가 평화라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판단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저로 하여금
평화에 대한

제 거부 뒤에

평화를 누릴
가치가 없다는

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보도록 하시고,

또한 밖의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어 하고

비난할 곳을 찾으려 하는
저의 갈망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안에 있는
성령의 영원히 온전한
마음 안에서

저는 평화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저로 하여금
오늘 제 마음 안의

그 부분을
보도록 하소서.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품으려는,

저의 광기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게 저의 온전함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제가 평화에
반대된다고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중요하지 않음을, 이해
하도록 도와주세요.


그것은
단지 세상에 투사된

저의
자기 판단일 뿐입니다.


아버지,
제 마음을 치유하소서.


“내 마음에
펑화가 있기를.

나의 모든 생각들이
고요해지게 하소서.”

(W,221: 제목)


저는 집에 있습니다.

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안전합니다.



원문 출처:
http://www.circleofa.org/library/acim-commentary/workbook-companion/lesson-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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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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