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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묵상집

쾌락과 고통은, 무(nothing)를 위한 수단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1.17|조회수97 목록 댓글 1


기적수업 : 텍스트 27장



7. 고통의 목적


<고통>은, <몸이 실재인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고통은 시끄럽고, 덮어 감추는 음성으로서, 그 비명 소리는, 성령이 하는 말을 잠재우고, 그대가 그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고통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해서, 주의를, 성령으로부터 끌어내어, 고통 자체에 집중시킨다. <고통과 쾌락>은 둘 다, <몸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므로, 고통의 목적은, 쾌락과 똑같다.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공유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이것이 목적의 법칙으로서, 그 법칙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을, 그 자체 안으로 결합시킨다. 쾌락과 고통은, 똑같이 비실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과 고통의 목적은, 정녕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쾌락과 고통은, 무(nothing)를 위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목적이 가진, <의미의 부재>를 공유한다.


죄는, 고통으로부터 쾌락으로, 그리고 다시 고통으로 옮겨 다닌다. 왜냐하면 둘 중, 어느 증인이든 똑같으며, 다만 “그대는, 여기 이 몸 안에 있으며, 상처받을 수 있다. 그대는, 또한 <쾌락>도 가질 수 있으나,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증인들은, 더 많은 증인과 결합한다. 각각의 증인들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이름이 다르고, 따라서 다른 소리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만 제외하면, 죄의 증인들은 모두 같다. 쾌락을 고통이라고 불러라, 그러면 쾌락은 고통을 줄 것이다. 고통을 쾌락이라고 불러라, 그러면 쾌락 이면의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죄의 증인들은,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면, 다른 하나는 뒤로 물러서면서, 단지 이름만 바꿀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을 내세워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죄의 증인들은, 죽음의 부름을 들을 뿐이다.


그 자체 안에, <아무런 목적도 없는 이 몸>이, 그대의 <모든 기억>과, 그대의 <모든 희망>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보기 위해 몸의 눈을, 듣기 위해 몸의 귀를 사용하며, 몸으로 하여금, 몸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에게 말해주도록 한다. 몸은 알지 못한다. 몸은 단지 그대가, 몸이 실재성에 대한 증인을 소환할 때 사용하라고, 몸에게 준 이름을, 그대에게 말해줄 뿐이다. 그대는 그 이름 중에서, 실재인 것을 선택할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해도, 그것은 나머지와 같다. 그대는 그저, 이 이름 저 이름, 이름만을 선택할 뿐이다. 그대가 증인을, 진리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해서, 그 증언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진리를 드러내는 자 안에서, 발견된다. 그가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를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4 신의 참된 증인은, 몸이 실재가 아님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실재라고 주장하는, 다른 이름의 증인에게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몸이 실재하지 않음을 안다. 왜냐하면 몸은, 그 안에 지니고 있다고, 그대가 믿고 있는 것을, 아무것도 담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은, 신 자신의 일부에게, 그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그의 기능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참된 증인은,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몸의 죽음에 대한 각각의 증인들에게, 죽음을 모르시는 그분 안에 있는, 그대의 생명에 대한 증인을, 하나씩 보내준다. 신의 참된 증인이, 가져다주는 각각의 기적은, <몸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는, 몸의 고통과 쾌락을, 똑같이 치유한다. 왜냐하면, 그의 증인들이, 모든 죄의 증인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5 기적은, 죄의 증인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기적은 단지,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할 뿐이다. 기적이, 이것을 증명하는 이유는, 기적 자체의 결과들이, 죄의 결과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고통을 불렀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 기적을 가져오는 성령은, <죄의 증인들이 불리는 이름들>을, 모두 하나로 지각하고는,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증인>이듯이, <기적>은 <생명에 대한 증인>이다. 기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인이다. 왜냐하면 기적은, 그것이 가져오는, <생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자가 살고, 죽은 자가 일어나며, 고통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기적은 단지, 그 자체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대표하는 것을 위해서만 말한다.


사랑 또한, 죄의 세상 안에서, 상징들을 갖고 있다. 기적이 용서하는 이유는, 기적은 용서 너머에 있는, 참인 것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단지 무효화하려고 온 법칙들에 의해, 기적이 구속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제정신이 아닌지! 죄의 법칙은, 다른 강점을 가진, 다른 증인을 갖고 있다. 그 증인은 다른 고통을 입증한다. 그렇지만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기적을 보내주는 성령>에게는, 약하게 뜨끔 하는 통증, 하찮은 세상의 쾌락, 그리고 죽음의 고통 자체도, 다만 하나의 소리일 뿐이다. 그것은, 치유의 요청이며, 비참한 세상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이다. 그것들의 <동일성>이아말로, 기적이 증언하는 것이다. 기적이 증명하는 것은, 바로 <그 같음>이다.


7 그것들을, 달리 부르는 법칙들은 파기되어, 그 무력함이 드러났다. 기적의 목적은,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께서 몸소, 기적이 증언하는 것에 대한, 기적의 증거능력을 보장해 주셨다. <죄의 법칙>이 아니라, <기적에 대한 증인>이 되어라. 더 이상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녕 그대가 치유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구원과 해방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활은, 그대가 <치유>되고 <행복>해짐으로써, <세상이 치유되었음>을, 입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단지, <거룩한 순간의 결과들>을, 지니고 다니기만 한다면, <거룩한 순간>은, 모든 죄를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더 고통 받겠다고,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이것보다 더 나은,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치유할 수 있도록, 그대가 치유되어라. 그리고 죄의 법칙이, 그대에게 적용되게, 묵인하지 말라. 그러면 사랑의 상징들이, 죄를 대신하도록 선택한 그대에게,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ㅡ 기적수업 밴드ㆍ텍스트 27장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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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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