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수업 : 텍스트 29장
3. 손님이 오심
1 그대는 왜, <그대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지각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대는 왜, 진리를 적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환영하여 맞아들이지 않으려 하는가? 왜 길을 잃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표시된 쉬운 길이, 가시투성이에다 거칠고 멀어서, 그대가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어렵게 보이는가? 그 이유는, 그대가 그 길을, 희생이나 상실이 없는 천국과 신 안에서, 그대 자신을 찾기 위한, 단순한 길로 보는 대신에, 지옥으로 가는 길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그대가, 아무것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전에는, 상실은 정녕 없음을 이해하기 전에는, 그대는 선택한 길에 대해, 얼마간의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선택이, 그대에게 제공한 많은 유익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대가 못 보더라도, 유익함은 있다. 유익함의 원인이 작동되었고, 유익함은, 그것의 원인이 들어 온 곳에, 틀림없이 존재한다.
2 그대는 치유의 원인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대는 치유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치유되었으므로, 이제 치유할 능력 또한, 틀림없이 그대의 것이어야 한다. 기적은 원인이 없는 결과로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어떤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기적은,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기적의 원인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기적이 아직 지각되지는 않지만, 지금, 기적이 야기되어 있다. 그리고 기적의 결과는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거기에 있다. 이제 내면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의 근거가 아니라, 큰 기쁨과 평화에 대한, 희망의 원인을 볼 것이다.
3 그동안 <전쟁터>에서, 평화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정녕 절망적이었다. <죄와 고통을 보존하는 기능>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진 것에게, 죄와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요구하는 것은, 정녕 헛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증오와 두려움, 공격과 죄의식이, 다만 하나의 허상이듯이, 고통과 죄는, 하나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죄의 원인이 없는 곳>에는, 그것들의 결과들도 사라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없는 곳에는, 어디든지 사랑이 틀림없이 온다. 왜 기뻐하지 않는가? 그대는 고통과 병, 비참함과 상실, 그리고 증오와 공격의 모든 결과로부터 자유롭다. 더 이상 고통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며, 죄의식은, 그대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그대는 사랑의 결과들을 환영해야 한다.
4 그대의 손님이 이미 오셨다. 그대가 그분께 요청했고, 그분이 오셨다. 그대는 그분이 들어오시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분을 전적으로 반가이,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선물들이 그분과 함께 왔다. 그분은 그 선물들을, 그대의 발밑에 두셨으며, 이제 그대에게 그 선물들을 바라보고, 그대 자신의 것으로 취하라고 요청하신다. 그 선물들을, 스스로 분리되어 있고 혼자라고 믿으면서, 따로 떨어져 걷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데서, 그분은, 그대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 그대가, 그대의 선물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이 치유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손님은, 그대가 서 있는, 그리고 그들을 위한 그분의 선물이 놓여있는 <거룩한 땅>에, 발을 들여놓은 모든 사람을, 반가이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대는, 그대가 받은 그 모든 것으로 인해, 이제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대가 초대한 곳>으로 들어오신 그분은, 단지 그대가 그곳으로 오기만을 기다리신다.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그분이 당신께서 머물러 사실 곳의, 집 주인을 찾을 수 없고, 그 집주인이 그분을 만날 수도 없다.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분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평화와 기쁨과, 그 모든 행복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선물들은, 그 선물들이 그대의 것이 되도록 가져오신,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손님은 볼 수 없지만, 그분이 가져오신 선물들은 정녕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바라볼 때, 그대는 그분이 거기에 임재하심이, 틀림없음을 믿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임재가 갖고 있는 사랑과 은혜 없이는,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다음이 살아계신 신의 약속이다 - 그분의 아들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은, 아들의 일부이고, 다른 어떤 것도 생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대가 ‘생명’을 준 것은, 살아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죽음을 생명으로, 삶을 죽음으로 지각하면서, 생명에서 떨어져 살아있고, 죽음 안에서 살아있고자 하는, 그대의 소망을 상징할 뿐이다. 여기에서 혼동이 혼동을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혼동을 기초로 그 위에 놓여있을 뿐, 다른 어떤 것에도, 얹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기초는 변하지 않는다. 비록 이 세상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혼동이 정말로 의미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혼동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안정성은 무의미하며, 변동과 변화는, 그들의 삶이 기반하는 법칙이 된다.
7 몸은 변하지 않는다. 몸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더 큰 꿈>을 나타낸다. 변한다는 것은, 그대가 전에 있던 상태와는, 다른 상태를 얻는 것이다. 불멸성에는 정녕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리고 천국은 변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땅에서, 변화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변화는, <상반된 것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반된 것들은, 그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를 반영>한다. 몸은 시간, 병 혹은 건강, 그리고 몸을 달라지게 하는 사건들과 함께,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몸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마음의 믿음이 변하지 않고, 남아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8 병은 몸에게, 몸이 아닌, 어떤 것이 되라는 요구이다. 몸이 무(nothingness)임은, 몸이 병들 수 없음을 보장한다. 몸이,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그대의 요구에, 병이라는 아이디어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께,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시는 그 모든 것보다, 못한 것이 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되는가? 희생을 요청받은 자는,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당신의 일부가 더 이상, 당신께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보받으신다. 그분은, 그대의 자아를 희생하셔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으로, 그대는 더 커지고, 그분은 그대를 잃으시기에, 더 작아지신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사라진 것이, 그대의 신(god)이 되어, 그대가 그분의 일부가 되지 않도록, 그대를 보호한다.
9 신(god)이 되라는 요구를 받은, 몸은, 공격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무(nothingness)라는 것이,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은, 그 자체 안에,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무가 아닌 듯 보이는 무엇인가로서, 몸은 느끼고 행동하며, 그대를, 자신의 죄수로 손아귀에 잡아둘 수 있는 것처럼, 지각되고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몸은 그대가, 몸에게 되라고 요구한 것이 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 실패가, 몸이 몸이 되어야만 하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가 몸이 무임을 지각하는데, 실패한 것에 있음을 잊고서는, 몸의 왜소함에 대해, 몸을 증오할 것이다. 그렇지만 몸이 무라는 것이, 그대의 구원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10 ‘무가 아닌 듯 보이는, 무엇인가’로서 몸은, 신의 적이 되어, 그분의 정체를, 왜소함과 한계와 절망으로, 대체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몸을 그대가 사랑하는 것으로 볼 때, 혹은 그대가 증오하는 것으로 바라볼 때, 그대는 바로 <신의 상실>을 축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께서, 모든 것의 총합이시라면, 그분 안에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분의 완성은, 정녕 몸이 무(nothingness)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구원자는 죽지 않았다. 또한 그는, <죽음에 바쳐진 사원>으로 세워진 것 안에, 살지도 않는다. 그는 신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리고 오직 이것만이, 그를, 그대의 구원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의 몸이 무라는 것은, 그대의 몸을, 병과 죽음에서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그대의 것은, 그의 것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ㅡ 기적수업 밴드ㆍ텍스트 29장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