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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묵상집

스트레스는 <에고가 실재라는 망상>이 위협받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31|조회수112 목록 댓글 0

기적수업 : 텍스트 4장



III. 에고와 거짓 자율성


1

그대는 최근에 도대체 마음이, 어떻게
에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이것은 아주 타당한 질문이며, 사실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말하는 과거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역사적인 맥락의
답을 해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같은 오류가 지금도
되풀이 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앎은
<완전히 비개인적>이며,

<구체적인 사례들>은,
앎의 이해와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앎에는
<추상적 사고>가 적용된다.


그렇지만
지각은 항상 <특별>하며,
따라서 <매우 구체적>이다.


2

각각의 사람은
자신을 위해, 에고를
하나 만드는데,

에고는 불안정해서
대단히 가변적이다.


사람은
또한, 자신이 지각하는

다른 사람의 에고도 만들며,
그들의 에고 역시 가변적이다.


에고들의 상호작용은, 그야말로
쌍방을 모두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에고들은
불변자(the unalterable)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불변자와 함께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작용이,
육체적으로 같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쉽사리
마음 안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다른 에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육체적인
상호작용만큼이나,

상대적인 지각을
바꾸는데 효과적이다.


에고가
단지 아이디어일뿐,

실재에 기초한
생각이 아님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3

그대 자신의
현 상태는,

마음이 에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대는 때로는
앎을 정녕 갖고 있지만,

앎을 던져버릴 때는,

마치
전혀 앎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만 같다.


이런 고의성은
너무도 분명해서,

그것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려면,

그저 그것을
지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고의성이
현재에,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과거에도 그런 식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놀라울
까닭이 무엇인가?


심리학은,
행동의 연속성 원리
기초하고 있다.


놀라움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타당한 반응이지만,

그렇게
지속적으로 일어난
어떤 것에 대한

반응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나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 예로서,

그대의
현재 상태를 사용하고 있다.


단, 그대가 마음이
반드시 그렇게 작용할
필요는 없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떤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이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다고
해서, 왜 그리 놀라는가?


4

그대는 동물이
자기 새끼에게 갖는,

사랑과
보호 본능에 대해
잊고 있다.


동물이
그러는 이유는,

새끼를
자신의 일부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도,
진짜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에고에게,

마치 신께서,
당신의 영들을
대하시듯이,

사랑과 보호,
큰 관용을 가지고
반응한다.


사람이 자신이
만든 자아에게
보이는 반응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사람이 언젠가
자신처럼 영원한 존재인,

자신의
참된 창조물들에게

보여줄 반응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에고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진정
무엇이라고 믿는가이다.


5

<믿음>은,
<에고의 기능>이며,

<그대의 기원>이
<믿음>에 열려있는 한,

그대는 실로
그대 자신의 기원에 대해,

에고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게 될 때, 그대는
그저 신을 알 것이다.


다른 길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에고의

사고방식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아이디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에고가 자아(self)가 아니라는

인식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사고체계를
약화시키는 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지각될 것이다.


아기들은
칼이나 가위를 빼앗으면,

만약 그러지 않으면,
칼이나 가위가 당연히
자신을 다치게 할지라도,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가속화가 그대를
이와 같은 위치에 두었다.


6

너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이런 의미에서
정녕 아기들이다.


너희는 지금
진정한 자기보호가
무엇인지 모르며,

자신을
가장 해칠 것을,

꼭 필요하다고
결정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든 모르든,

너희는
무해(無害)하면서도
도움이 되기 위해,

일치되고
아주 훌륭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협력하기로
이미 뜻을 세웠다.


무해와 도움됨의 두 속성은
반드시 함께 하는 속성들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에 대한
너희의 견해조차

어쩔 수 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견해라는 것은 모두

에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잠시 인내하라.


그리고
그 결과는 신만큼
확실함을 기억하라.


7

오직 참되고 지속적인
풍요의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자비로울 수 있다.


그대가 여기에
관련된 개념을 고려할 때,
이것은 아주 명백하다.


에고에게 있어서,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대가 그것 없이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주는 것을 희생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그대는 무언가
더 좋은 것을 얻을 것이며,

 따라서 그대가 주는
그것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준다.


‘얻기 위해 주기’
피할 수 없는
에고의 법칙이다.


에고는 항상,
다른 에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평가하며,

따라서
얻기 위해 주기라는 법칙을 낳은,
희소성 원리에 끊임없이 몰두한다.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의

‘현실 원리
(reality principle)’
의미인데,

프로이트는
에고가 아주 약하고
곤궁한 상태에 있으며,

오직
필요를 가진

존재로서만,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8

에고의 ‘현실 원리’는, 전혀
실재적인(real) 것이 아니다.


에고는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확립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에고들의
‘실재성(reality)’을
지각할 수밖에 없다.


사실
어떤 에고가, 다른 에고들을
실재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모두 단지
자신도 실재한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는 시도일 뿐이다.


에고가
보는 ‘자아 존중’은

에고가 스스로를 속여서
자신의 실재성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일시적으로 덜 포악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식의 ‘자아 존중’은
항상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스트레스는, 실제로

<에고가 실재라는 망상>이 위협받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것은 에고의
<수축이나 팽창>을 낳으며,

그에 따라
<후퇴나 공격>을 초래한다.


9

에고는 말 그대로
비교에 의해 살아간다.


에고로서는
동등함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관용
베푸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고는,

풍요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풍요할지라도,
결코 주는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사고체계에

‘얻기(getting)’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유이다.


모든 욕구는, ‘얻는’ 장치로,

스스로를 확증해야 하는,

에고의 필요를 나타낸다.


이것은 소위
에고의 ‘상위’ 욕구들만큼이나
몸의 욕구들에도 해당된다.


몸의 욕구들은,
그 기원이
육체에 있지 않다.


에고는,
몸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며,

몸을 통해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몹시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는
에고의 결정인데,

사실 에고는,

무엇이
정말로 가능한지에 대해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이것이
에고의 변덕스런 본성의,
원인이다.


10

에고는
자신이 완전히 자력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에고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도
두려운 상태이기에, 에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동일시를 위한,
미약한 시도로서

다른 에고들에게 돌아서서,
그들과 <결합>하려 시도하거나,

혹은 똑같이
미약한 힘의 과시로서,

다른 에고들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에고는 스스로
이 전제 자체의 타당성을,
고려해 볼 만큼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이 전제야말로
<에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실로 에고가
완전히 자력으로 존재한다는,
마음의 믿음이다.


영의 승인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려는

에고의
끊임없는 시도는
전혀 소용없다.


11

앎의 상태에 있는 영은,
에고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영은 에고를
공격하지 않는다.


영은 단지
에고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뿐이다.


한편 에고도 똑같이
영을 알지 못하지만,

자신보다
큰 ‘어떤 것’에게,
거부당했다고 지각한다.


이것이 바로
에고 용어로, 자기 존중이
망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창조적인
노력이
신화로 변할 수 있지만,

신의 창조물들은
신화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에고는
오직 한 가지 조건,

즉 그런 경우
사람이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신화들은 전적으로
지각된 것들이며,

형태가
아주 모호하고

특성상
선악의 본성을 지녀,

가장 호의적인 신화조차도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2

신화들은, 대개
<에고의 기원>과 관련되며,

마법은, 에고가
<자신에게 부여한 힘>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신화와 마법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모든 신화 체계는
‘창조’에 대한

일종의 설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을 마법에 대한
에고의 특정한 지각과
관련짓는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단지
<자신을 보존>하려는
<에고의 투쟁>이자,

<자신의 기원>에 대한
<에고의 해석>일 뿐이다.


이 기원은

언제나
<육체의 탄생>과
관련되는데,

육체가 있기 전에,
에고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보다
종교적인 에고를
가진 사람들은,

육체가 있기 전에
영이 있었고,

잠시
에고의 삶으로
타락했다가,

잠시 영으로
계속 존재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 타락으로

영이 벌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은,
타락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조차 없다.


13

‘구원’이라는 용어는
영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영은 위험에
처해있지 않으며

구원될
필요가 없다.


구원은 단지
‘바른 마음 상태’일
뿐이다.


이 바른 마음 상태는,

영의 한마음 상태
(One-mindedness)가
아니지만,

한마음 상태가
회복되기 전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바른 마음 상태
자동적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바른 지각에는
한결같이 공격이 없기에,

그른 마음 상태
(wrong-mindedness)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판단 없이
생존할 수 없으므로,

그에 따라,
에고를 내려놓게 된다.


그러면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마음은
자신이 고수하는
사고체계에 의해

지시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이 취할 방향은
언제나 자동적이다.


14

모든 사고체계는
내적인 일관성을 가지며,

이것이
행동의 연속성을 위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신뢰성의 문제이지
타당성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행동’

에고의
사고방식에 관한 한
의미 있는 지각이다.


그렇지만
‘타당한 행동’이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모순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타당성은 목적이고,

행동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은
논리적으로 함께
쓰일 수 없는데,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5

어떤 가설은
거짓이거나 참이며,

그에 따라
받아들여지거나
거절된다.


만약 그 가설이
참이라고 밝혀지면,
사실(fact)이 되고,

그 이후로는
사실로서의 그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 가설을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에고가
사실의 지위를
부여한 아이디어는

사실이 앎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모두 의심스럽다.


16

담론(談論)의 영역을
혼동하는 것은
사고 오류이다.


철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이를
인식해 왔다.


심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측면에 있어서 매우 부족하며,
많은 신학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담론 영역에서 얻은
데이터는, 다른 영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데이터는 오직
그것이 속한 사고체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자들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관련 없는 데이터를

통합하기 위한 시도로서,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관련 없는 것들을,
관련지으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17

최근에
환경보호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또 하나의
창의적인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에고에게,
비록 창조성은 아니지만,

상당한 창의성
(ingenuity, 발명의 재주)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가장 창의적인 형태에서조차
독창성(inventiveness)은

정말이지
헛수고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독창성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독창적인 발명품이 가진
<아주 구체적인 특성>이야말로

신이 창조하신 자들의
<추상적인 창조성>에 합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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