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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 Poonja

『파파지 (H.W.L 푼자) 와의 만남』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5.12|조회수114 목록 댓글 1

『파파지 (H.W.L 푼자) 와의 만남』

대담자: 캐서린 인그람 (Catherine Ingram), 러크나우.

The following interview took place in several sessions over the course of six weeks in the winter of 1992. in Lucknow,

 

Poonjaji,

what is freedom?

파파지(Papaji),

자유는 무엇입니까?

Freedom is to know your own fundamental nature,

your own Self.

Nothing else. Easiest of all,

without your thinking, is freedom.

자유는 그대 자신의 근본적인 본성,

그대 자신의 진아(眞我)를 아는 것이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유는 가장 얻기 쉬운 것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And what is that Self?

그러면 그 진아는 무엇입니까?

This is indescribable.

It is not intellectual, not even transcendental.

Think of one without even the concept of two.

Now drop the concept of one.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지적(知的)이지 않으며 심지어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둘이라는 개념 없이 하나를 설명해 보라.

그리고 하나라는 개념마저 버려라.

You often speak of surrender. Surrender to what?

당신은 종종 조복(調伏,Surrender)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무엇에 대해 조복하라는 겁니까?

To that Source through which you speak, through which you see, through which you breathe, through which you taste and touch, through which this Earth revolves and the sun shines, through which you have asked this question itself. Everything happens through that consciousness in which even emptiness is housed. That supreme power which is beyond the beyond your own Self to that you have to surrender.

근원(根源)에게. 그것을 통해 그대는 말하고, 그것을 통해 보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호흡하고, 그것을 통해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그것을 통해 이 지구가 회전하고, 태양이 빛을 발하며, 그것을 통해 그대가 이 질문을 했다. 모든 것은 그 의식을 통해 일어난다.

공(空)마저도 그 의식 속에 거주한다.

이 지고력(至高力, Supreme Power)은 초월을 넘어서 있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아이며 그대는 그 진아에 조복 해야만 한다.

 

Is the consciousness of which you speak eternal unborn and undying?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의식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것입니까?

 

Consciousness is beyond the concepts of birth and death, beyond even any concept of eternity or emptiness or space. That which accommodates the space or emptiness or eternity is called consciousness, within which everything is existing.

의식은 탄생과 죽음의 개념, 심지어 영원, 공, 우주의 개념들마저 초월해 있다. 우주, 공, 또는 영원을 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의식이라 부른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Yet there is the appearance of birth and death.

하지만 탄생과 죽음이라는 현상(現象)이 있습니다.

You see, existences and destructions happen ceaselessly.

All these manifestations are like bubbles and waves in the ocean; let them happen.

The ocean doesn’t find that they are separate.

The bubbles, the eddies, the waves they may appear to themselves as separate, but the ocean itself has no trouble with them. Let them move on it, let them have different shapes and different names, coming and going. This body will be the food of worms and ants. From earth it came and to earth it will return. You are that which shines through it. The consciousness is untouched.

창조와 파괴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든 나툼(Manifestation)은 바다의 거품이나 파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그렇게 일어나도록 놔두어라.

바다는 결코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품, 소용돌이, 파도, 이것들은 그들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다 자신은 그것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들로 하여금 바다 위에서 움직이도록 놔두어라.

다른 모양과 다른 이름을 갖도록 놔두어라.

왔다가 가도록 놔두어라.

이 육체는 벌레와 개미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육체는 땅에서 났고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는 그것(That)이며 그것은 육체를 통해 빛을 발한다.

의식은 무구(無垢)한 상태로 남아있다.

 

Do you propose that we identify,

with the ocean—that Source—instead of with the waves?

그러면 우리가 파도 대신에 바다

즉, 근원과 동일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No, you need not identify with anything. You only need to get rid of your notions. Do not identify with any name or form which is not real, and no name or form is real.

Now to reject name and form you need not make any effort or employ any kind of thinking or identification. You have been identifying with names and forms which have caused you to feel separate from the fundamental nature which you always are, so you have to disidentify with something which is not true. No need to identify with the ocean or Source. You are the Source. When your identification with the unreal has vanished, then you will be what you have been, what you are, and what you will be.

아니다, 그대는 어느 것과도 동일시 할 필요가 없다.

관념들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어떠한 이름과 형상도 동일시하지 말라.

이름이나 형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름과 형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으며

생각을 하거나 동일시 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지금까지 이름과 형상에 동일시해 왔다.

그래서 그대는 근본이 되는 본성-그대는 항상 근본이 되는 본성으로 존재한다-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참되지 않은 어떤 것과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바다나 근원과 동일시 할 필요도 없다. 그대가 근원이다.

그대의 비실재와의 동일시가 사라지면 그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있는 그대로의 그대 모습이 될 것이다.

 

What is mind?

마음(Mind)은 무엇입니까?

 

Never mind! [Laughing] Show me the mind. You have used the word “mind.” No one has seen what the mind is. Mind is thought existing as subjects and objects. The first wave is “I,” then “I am,” then “I am this, I am that,” and “This belongs to me.” Here the mind begins. Now you keep quiet, and do not allow any desire to arise from the Source. Just for this instant of time, don’t give rise to any desire. You will find you have no mind and you will also see that you are somewhere indescribable, in tremendous happiness. And then you will see who you really are.

신경 쓰지 말라(Never mind)! (웃음) 나에게 마음을 보여 달라.

그대는 '마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본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마음은 곧 생각이며 주체와 객체로써 존재한다.

첫 번째 물결은 '나'이다. 그 다음은 '나는'이다.

그 다음은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은 시작된다.

자, 이제 침묵하고 어떠한 욕망도 근원에서 떠오르도록 허용하지 말라. 한 찰나만이라도 욕망을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원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청난 행복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자신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So when you inquire “Who am I?”, this will take you home. First reject the “who,” then reject the “am,” then you are left with the “I.” When this “I” thought plunges to its source,

it ceases to exist and finds Being itself. There you can very well live without mind. If you do it practically, you will find that something else will take care of all your activity more wisely than the mind is doing for people who are using mind. We can see today what the result is of using the mind, how the world is behaving by using the mind. I believe that if you keep quiet and let the supreme power take charge of all activities, then you will see how to live with all beings. The one who knows himself will know what it is to be animals, plants, rocks, everything that exists. If you miss realization of your own Self, you have not known anything.

그대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그대는 집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나'를 물리치고

'누구'를 물리치고 그런 다음 '인가'를 물리쳐라.

이 '나'라는 생각이 근원 속으로 뛰어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 곳에서 그대는 마음 없이 살 수 있다. 그대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인가가

그대의 삶을 돌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다른 무엇'이 마음보다 더 잘 그대를 돌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마음을 이용한 결과가 무엇이며 그 마음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침묵하고 지고력(至高力)으로 하여금 모든 삶을 돌보게 한다면 그대는 모든 존재와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아는 이는 동물, 식물,

바위, 그리고 모든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진아 실현을 놓치면 그대는 아무 것도 모른다.

 

People who are spiritually oriented struggle with what is called the “ego.”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소위 '에고(Ego)'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Let us see where the ego is rising from. Ego has to rise from somewhere to become ego. The ego arises, then mind, then senses seeing, smelling, tasting, hearing, touching.

There must be “I” before ego arises. This notion of “I” is the root cause of ego, the mind, manifestation, happiness, and unhappiness samsara. Now return to “I” and question what this “I” is. Where does it rise from? Let us try.

에고가 어디에서 떠오르는지 보자. 에고가 에고로 되기 위해서는 어딘가로부터 떠올라야만 한다.

먼저 에고가 떠오르고, 그 다음 마음, 그 다음 감각-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이 떠오른다. 에고가 떠오르기 전에 '나'가 있다. 이 '나'라는 관념은 에고, 마음, 나툼, 행복, 불행, 이 모든 삼사라의 뿌리이다. 이 '나'로 돌아가서 이 '나'가 무엇인가 물어 보라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올라오는가? 자 한번 해보자.

 

I have done this many times, but

저는 여러번 이렇게 했습니다만.....

 

You may have done it, but now don’t do it. Just land into it. Nothing to do. When you see the process of doing, you must return back again. Ego, mind, senses this is called doing. What I am talking about requires no doing at all, just intelligence.

You have only to be watchful, vigilant, attentive, serious.

No doing, no thinking, no effort, no notions, no intentions. You leave everything aside, simply keep quiet, and wait for the result.

그대가 전에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고 있지 않다.

그저 그렇게 해 보라.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행위라는 그물에 걸릴 때마다 바로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에고, 마음, 감각, 이 모든 것들은 '행위'라고 불린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지성만 있으면 된다. 그대는 진지하고 주의 깊게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 행위 없이, 생각 없이, 노력 없이, 관념 없이, 의지 없이,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침묵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려라.

 

This results happens now with you, but…

이 결과는 지금 여기에서 당신과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Yes, then you start now from this happening.

With this happening you have broken at least this process of ego, mind, senses, and manifestation. Now you return from the happening. You can also step out of this, but you do so as a king when he rises from his throne and goes to the garden. He is not a gardener; he is still the king. You are this happening.

여기에서, 이 '일어남(Happening)'으로써 시작하라.

이 일어남으로 그대는 에고, 마음, 감각, 그리고 나툼의 진행과정을 부술 수 있다. 그대는 일어남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왕좌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가는 왕처럼 하라. 그대는 정원사가 아니라 왕이다.

그대는 어디에 가든지 이 '일어남'이다.

 

The Buddha spoke about practicing this awareness.

He taught a meditation

practice to enable people to taste this.

붓다는 이러한 깨어있음을 수행하는 것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깨어있음의 맛을 볼 수 있도록 명상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I have not found any results from these practices, but they are going on. I don’t give you any practice.

I just remove your old burdens. Don’t expect that I will give you something new. If you gain something new, its nature is not eternal, and you will lose it. Freedom cannot be the effect of any cause. You already have everything.

You are an emperor. Throw away the begging bowl.

나는 이들 수행이 어떠한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들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어떠한 수행방법도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그대의 오래된 무거운 짐을 없애버릴 뿐이다.

내가 그대에게 새로운 어떤 것을 줄까 기대하지 말라.

그대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며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유는 '한 원인을 바탕으로 한 결과'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황제이다.

동냥 그릇을 던져 버려라.

 

Practice is needed when you have some destination, something to attain.

Abandon this concept of gaining something at a later date. What is eternal is here and now.

If you find freedom after 30 years of practice,

it will still be only here and now.

Why wait 30 years?

그대에게 어떤 지향점이 있거나 성취할 무엇이 있다면 수행은 필요할 것이다. 훗날에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영원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가 30년이라는 각고 수행 끝에 자유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가 될 것이다. 왜 30년을 기다린단 말인가?

 

Just sit with a cool mind and see where you have to go and where you are now. Question yourself: What do I practice for? For practice you need somebody to practice and some intention for practicing. What is that through which you practice? Through what do you derive this energy to put anything into practice? Do you get my point? If you want to go somewhere, you have to stand up and walk to reach the destination, so there must be some energy to stand and walk to the destination. What makes you stand up?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서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보라. 그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나는 무엇을 위해 수행하고 있는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대는

어떤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어떠한 의도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수행하는데 그 생각은 무엇인가?

그대는 수행에 쏟아 붓는 에너지를 어디에서 끄집어내는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겠는가? 그대가 어떤 곳에 가기를 원한다면 일어서서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일어나서 걷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틀림없이 존재한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일어나서 걸어가게 했는가?

 

Some desire.

어떤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Yes, but where is the desire rising from? Who makes the desire arise and from where? People are doing practices for freedom, so I want you to see here and now, before going to the destination what you want. If you want freedom, then find out what is the bondage, where are the chains, what are the fetters. Sit down calmly, patiently, and question, How I am bound? What binds you except these notions, concepts, perceptions? Forget about all these things. Don’t give rise to any notion, any intention, or any idea. Just for a second. Get rid of these notions, instantly. Now who is seeking freedom? The seeker himself is not yet tackled.

그렇다. 하지만 그 욕구는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누가 그 욕구를 일어나게 했으며 그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자유를 위하여 수행을 한다. 나는 그대가 목적지를 향해 가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보기를 바란다. 자유를 원하면 먼저 무엇이 속박인가 알아 보라.

쇠사슬은 어디에 있는가? 족쇄는 무엇인가? 조용히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앉아서 물어 보라. '나는 어떻게 묶여 있는가?'

이러한 관념과 개념과 자각들 외에 무엇이 그대를 묶고 있는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잊어버려라.

어떠한 생각이나, 어떠한 의지나, 어떠한 관념도 일으키지 말라.

일초만이라도, 즉각적으로 이러한 관념들을 없애버려라.

누가 자유를 구하고 있는가?

구하는 자 자신에 대해서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데.

 

There’s a saying, “What you are looking for is what is seeking.”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구하는 자, 그 자신이다.'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Yes, find out who the seeker is, or Who am I. You have not to move anywhere because it is here and now. It has always been here and now. You are already here and you are already free. You think or have a notion that you have to search for something, to meditate. You have been told this many times. Now just for a short while, sit quietly and do not activate a single thought. You will discover that what you were searching for through methods or sadhanas was already there. It was what was prompting you to meditate. The desire for freedom arises from freedom itself.

그렇다. 구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 보라.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 보라.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어 왔다.

그대는 이미 여기에 있으며 이미 자유롭다. 그대는 무언가를 구해야만 한다거나 뭔가를 얻기 위해 명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이것에 대해 자주 들어왔을 것이다.

자, 아주 잠깐 동안만 고요히 앉아 단 하나의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그대가 수행방법이나 사다나(Sadhana)를 통해서

구하는 것이 이미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명상을 하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자유 그 자체로부터 떠오른다.

Most meditation is only mind working on mind. You are somewhere where the mind cannot trespass. The real meditation is simply to know that you are already free.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 내에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일 뿐이다.

그대의 실재는 마음이 범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참된 명상은 그대가 이미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Yet thoughts come uninvited, as unwelcome guests.

And it seems that through meditation practice there is a lessening of thoughts.

By systematically keeping quiet, in a calm place, thoughts slow down and even go away altogether…

하지만 생각은 환대 받지 못하는 손님처럼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찾아옵니다. 명상수행을 통해서 생각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침묵을 지키면 생각은 둔화되고 나아가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Then you have a tug of war with the thoughts. So long as you are powerful and you are checking, they are not there. When you don’t check, the thoughts come again.

Don’t worry about the thoughts. Let them come and play with you as the waves play with the ocean.

When the waves disturb the tranquility of the ocean,

it doesn’t mind.

Let the thoughts arise, but don’t allow them landing space.

그러면 그대는 생각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힘이 세고 그 생각들을 저지할 수 있으면 생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지할 수 없으면 생각은 다시 되돌아온다.

떠오르는 생각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오면 오게 놔두고 파도가 바다와 노는 것처럼 함께 놀라. 파도가 바다의 평정을 어지럽힌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게 없다.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놔두어라. 하지만 그 생각으로 하여금 내면에 자리를 잡게 하지는 말라.

 

So much emphasis is placed on getting rid of the thoughts, as though a mind without thoughts is tantamount to an awakened state.

마치 생각 없는 마음이 깨달은 상태와 같은 것처럼 생각을 없애는데 너무나 많은 수행을 하고 그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No, no, no. Let the thoughts come. If you reject them, they will invade forcibly through your door. Remove the door. Remove the wall itself. Who will come in now? In and out is due to wall, and this wall is I am separate from consciousness.” Let the thoughts come: they are not different from the waves of the ocean. It is better to be at peace with thought. ego. the mind. the senses, and manifestation. Let us not fight with anything. Let us be one. You will see your own face in everything. You can speak to plants. You can speak to rocks, and you are the hardness of the rock itself. You are the twittering ot the birds. You have to see. I am the twittering of the birds. I am the shining of the stars,

아니다. 아니야. 생각이 오면 오는 대로 놔두어라.

생각을 거부하면 생각은 그 대문을 열고 강제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문을 걷어내 버려라. 벽을 없애버려라.

그런 다음에는 누가 들어올 수 있겠는가?

안과 밖이라는 개념은 벽으로 인한 것이며 이 벽은 '나는 의식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생각이다. 생각이 오는 대로 내버려두라.

그것들은 대양의 파도와 같다. 차라리 생각, 에고, 마음, 감각, 그리고 나툼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낫다. 그 어느 곳과도 싸우지 말라. 하나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 속에서 그대의 본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식물들과도, 바위들과도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단단한 바위 그 자체이다. 그대는 지저귀는 새이다.

내가 지저귀는 새인 것을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나는 반짝이는 별이다.

 

Isn’t a still, silent mind more conducive to this depth?

움직이지 않는 침묵의 마음은 이러한 내면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됩니까?

 

There is no depth. It is immaculate emptiness. No inside, no outside, no surface, no depth. No place to go. Everywhere you go is here. Just look around and tell me the limits of this moment. Go as far as you can go. How is it measured?

Its length? Breadth? Width? This moment has nothing to do with time or depth.

어떠한 깊이도 없다. 그것은 흠결 없는 공(空)이다.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표면도 없고 깊이도 없다. 갈 곳이 없다. 그대가 가는 어느 곳이나 '여기'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 순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해보라. 그대가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라. 어떻게 그것을 측량할 수 있는가. 그 길이? 넓이? 폭? 이 순간은 시간이나 깊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

 

Is it really so simple?

그것은 정말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까?

 

Yes. When you know it, you will laugh! People go to mountain caves for 30 years just to find Being itself. Being is just here and now. It is like searching for your glasses while wearing them. What you have been searching for is nearer than your own breath. You are always in the Source. Whatever you are doing, you are doing it in the Source.

그렇다. 그대가 그것을 알게 될 때 그대는 웃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해내기 위해 산 속 동굴로 들어가

몇 십 년 동안 수행한다.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안경을 쓴 채 안경을 찾는 것과 같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의 호흡보다 더 가깝다.

그대는 항상 근 원안에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근원 안에서 한다.

 

Poonjaji, religions always promise some afterlife. Is this Source that you speak of a promise of everlasting Beingness?

파파지, 대부분의 종교는 내생(來生)을 약속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이 근원은 영생에 대한 약속입니까?

 

I don’t believe in these promises which will happen after death. This experience I am speaking of is here and now. What is not here and now is not worth attempting or attaining. To enjoy this here and now is to get rid of notions that you are not here and now.

나는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믿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체험은 지금 여기에서이다. 지금 여기 없는 것은 구할만한 가치가 없다. 그대가 지금 여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대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Truth must be simple. Complication is in falsehood.

Where there are two, there is fear and there is falsehood.

진리는 항상 단순한 법이다. 복잡한 것은 거짓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둘이 있으면 두려움이 있고 거짓이 있게 된다.

 

Ramana Maharshi, Nisargadatta Maharaj, and even the Buddha referred to this life as a dream. Why?

라마나 마하르쉬,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Nisargadatta Maharaj) 그리고 심지어 붓다까지도 인생은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Because it is not permanent. Nothing has been permanent. Therefore they don’t differentiate between this waking state and the dream state. In a dream you are seeing mountains, rivers, and trees which appear real. It is only when you wake up that you say, “I had a dream.” Upon awakening, those things are seen as transitory, and you call them a dream. The state you have woken up into now seems real, permanent, and continuous when compared to that dream. Like this, when we wake up into consciousness itself, then this so-called waking state also appears to be a dream.

인생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잠에서 깬 상태와 꿈의 상태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서 산, 강, 나무들은 실재로 보인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꿈을 꾸었다'라고 말한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이 모든 것이 덧없으며 그대는 그것들을 꿈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는 꿈과 비교할 때 영원하며 실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그대가 의식 그 자체로 깨어나면 잠에서 깬 상태는 꿈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What is the function of the guru or teacher?

구루, 즉 스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The word “guru” means “that which removes ignorance, that which dispels darkness” the darkness of “I am the body,” “I am the mind,” “I am the senses,” and “I am the objects and manifestation.” That person who has known the truth himself and is able to impart this knowledge somehow to one who needs some help I don’t use the word student; we all are one that person who gives his experience is called guru

'구루(Guru)'라는 말은 무지를 없앤 자, 어둠 -'나는 몸이다',

'나는 마음이다', '나는 감각이다', '나는 물체이고 나툼이다'등의

어둠- 을 몰아낸 자를 의미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 지혜를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그 체험을 전해 주는 사람, 그가 곧 '구루'이다.

 

Many people think of you as their guru.

많은 사람들이 파파지 당신을 자신들의 구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hey are speaking of the body, then. Guru sees only Self unto Self. You are my very own Self. I am your very own Self. This relationship is no relationship. Your Self and my Self, what is the difference? I am speaking to that Self which you truly are. I am speaking to my Self.

그렇다면 그들은 육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루는 진아만을 본다. 그대는 바로 나 자신의 진아이다.

나는 바로 그대 자신의 진아이다. 이러한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그대의 진아와 나의 진아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나는 그 진아-그대는 참으로 그 진아이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Others may be preachers of some sect, some dogma, but a guru gives you his own experience, and this experience is timeless consciousness, nothing else. Guru does not give you any teachings, method, or anything that is destructible, impermanent. That is not guru. You are not to follow anyone. You are a lion, and where a lion goes, it cuts its own path.

여러 종파에 여러 설교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특정 교리를 줄지는 모르지만 구루는 그대에게 그 자신의 체험을 주며 이러한 체험은 영원한 의식일 뿐이다. 구루는 그대에게 어떠한 가르침이나 어떠한 방법, 혹은 파괴될 수 있거나 영원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그대에게 준다면 그는 구루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따르지 말라. 그대는 사자(獅子)이다.

사자는 가는 곳마다 그 자신의 길을 헤쳐나갈 뿐이다.

 

There are many Osho [Raineesh] students here in Lucknow with you and more coming everyday.

As you probably know, he was a very controversial teacher with a bad reputation. What are the differences between you and Osho?

러크나우 이 곳에는 많은 오쇼 라즈니쉬 제자들이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오쇼의 제자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매우 논란이 많은 스승이었으며 평판 또한 좋지 않았습니다.

파파지와 오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I don’t indulge in any kinds of differences. The divine is playing. Whatever it is doing, it is being done by the commands of that supreme source. All are my own Self, having different roles to play, and it is being beautifully played.

나는 어떠한 구별도 좋아하지 않는다. 신성(神性)은 유희(遊戱)할 뿐이다 신성이 하는 것은 무엇이나 지고한 근원의 영향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 자신의 진아이며 유희에 있어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유희이다.

You say that this divine is playing itself out, but let’s look at

the suffering on this planet. For instance, there is an ecological destruction that is creating a living hell for people and other beings who are not awake in this dream, as we can easily see here in India.

We are creating a desert of this Earth and poisoning our land, waters, and air. Many more people will face starvation and live in degraded circumstances. Worldwide tensions

will increase, and so on. People who are primarily interested in spiritual matters, at this particular point in history, are sometimes accused of being selfish.

What do you feel about rendering service to the world, and from where does the passion arise for service if this manifestation is seen as a dream?

이 신성이 스스로 유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의 고통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며

생태계를 파괴하여 다른 존재들에게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구를 사막으로 만들고 땅과 강물과 대기 중에 독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기아 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 악화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긴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세상에 대해 봉사를 베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나툼이 단지 꿈이라면

봉사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Having known the supreme state, our own Self, from inside there arises compassion. Automatically we are compelled. It’s not service. Service has to do with somebody else.

When the command is compassion, there’s no one doing any service for anybody else, as when you are hungry you eat. You are not in service to the stomach, nor are the hands the servant when they are putting food into the mouth.

Like this we should live in the world.

Service is the responsibility of the Self. Otherwise who is doing this service? When the action is coming from the ego, there is hypocrisy, jealousy, crisis.

When the doer is not there, then compassion arises.

If a person is realized, then all his actions are beautiful.

지고의 경지인 자신의 진아를 알게 되면 내면으로부터 자비가 우러나온다. 자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부의 명령이 자비가 될 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거기에 없다. 그대가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대가 위(胃)에게 봉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손이 음식을 입에 넣어준다고 해서 손이 입의 봉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살아야만 한다.

봉사는 진아의 책임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봉사를 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에고를 가지고 봉사를 하면 거기에는 위선, 시기가 일어나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행위자가 없을 때 자비가 떠오른다.

한 사람이 진아를 실현하게 되면 그의 모든 행위는 아름답게 된다.

 

자유, 즉 해탈로 가는 길에 있어서 주된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주된 장애물은 자유를 향한 치열하고도 절대적인 열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속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때때로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당연히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잠에서 깨면 즉시 꿈속에서의 결혼, 아내,

아이들과 떨어진다. 이와 같이 꿈속에서 깨어나면 그러한 관계가 끝나고 자유로워진다. 비베카는 실재와 비실재를 식별하는 힘이다.

이 세계의 나툼을 단지 꿈으로 본다면 그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무책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다. 1947년 인도가 분할될 당시 나의 고향지방은 신생 파키스탄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때 나는 티루반나말라이에서

라마나 마하르쉬와 함께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의 고향 지방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왜 그 곳에 가서 너의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가?'

내가 대답했다. '바가반(Bhagavan)을 만난 후 제게 가족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 꿈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꿈속에서 남아 본분을 다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말했다. '저는 바가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

그 때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그 마하르쉬의 말은 아직도

사실이다.

자, 그대가 실재와 비실재를 분별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의심은 그대와 자유사이에 놓여 있는 장벽이다.

이러한 의심은 단지 개념에 불과하며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영원 속으로 뛰어들라. 이것은 넥타(Nectar)이다.

사람들은 이 넥타를 마시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스승들은 욕망을 태워 없애거나, 또는 욕망에 완전히 물릴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대상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파지는 이 실재가 단지 꿈인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망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 어떤 스승들은 그대가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불을 끄기 위해 불 속에 더 많은 기름을 계속해서 넣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더욱 불길을 거세게 만들뿐이다.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그것을 끝낼 수는 없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이다.

일단 그대가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가를 알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대는 자신의 손에 단 하나의 무기를 쥐고 서게 될 것이다. 즉 실재와 비실재를,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알아 볼 수 있는 분별력이 그것이다.

그대가 이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 자유, 그 자체와 하나가 된다.

 

종종 심리적인 습관이나 일생동안의 컨디셔닝에 의해 의심, 또는 실재와 비실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영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조언하시겠습니까?

 

이 고통은 그대가 과거라는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과거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대는 불행할 수 없다.

그대가 현재 속에서 살면 그대는 행복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지복(至福)이다.

 

우주의 연료는 사랑, 즉 그 자체와 합일하기를 원하는 거대한 맥박입니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조차 부르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이라는 말을 입밖에 낼 때 주의 깊게 지켜보면 그 말은 과거에서 일어났던 어떤 경험으로 그대를 데리고 간다. 내 경험으로 보면 그것은 사랑조차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바다 한 가운데 어떠한 파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충만함-이다

'사랑'이란 말은 잘못 사용되고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도 사랑 받는 자도 없을 때 거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다.

 

헌신이란 말은 어디에 적용됩니까?

 

그것은 다른 무엇을 향한 개인 행위가 아니다.

침묵 그 자체가 근원에 조복하는 것이다.

 

파파지, 당신은 아직도 삶 속에서 초월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지금도 그렇다. 매 순간마다 그렇다.

Don't listen to anyone!

Don't even listen to me!

Listen to your own Soul

A true Masters message can only be:

There is no teaching

There is no teacher

There is no student

There is nothing to un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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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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