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점이 영성과 관련한 주제에서 자주 간과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회피하거나,
정말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
자신의 오해와 망상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이용하고 있다.
삶 자체가 종종 가장 훌륭한 교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삶은 은혜로 가득하다.
그 은혜는 어떤 때는 황홀한 은혜, 아름다운 은혜, 지복감과 행복과 기쁨의 순간이며, 또 어떤 때는 질병이나, 실직, 사랑의 상실, 혹은 이혼 등과 같은 맹렬한 은혜이다.
사람은 가끔, 예컨대 중독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을 때 가장 큰 의식의 도약을 맞아 다른 존재방식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우리를 깨워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 삶이란 것을 슬슬 회피한다.
삶이 우리를 깨어나도록 돕고 있는데도 우리 대부분은 삶이라 불리는 도움의 손길을 피해 도망 다닌다.
신성이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삶 그것이다.
신성은 우리 삶의 갖가지 상황을 이용하여 그 자체의 깨어남을 성취하며,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고 자주 어려운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다니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들이 실제로 고통을 잘 피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려고 애만 쓴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적인 신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가장 큰 성장은 아름다운 순간을 거쳐서 나타나리라는 신념이다.
물론 아름다운 순간을 통하여 커다란 의식의 성장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힘든 세월을 겪어가면서 커다란 의식의 도약을 이루어낸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장 힘든 일들,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이 바로 맹렬한 은혜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그 고통은 깨어남을 위해 아주 효력 있고 또 중요한 성분이다.
되돌아서서 마주 볼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내밀고 있는 선물을 알아보고 받아들 수가 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선물이 억지로 품에 안겨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삶 속의 상황이 질병이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든 이혼, 중독 혹은 직장의 문제이든 간에, 그 각각의 상황 속에 담겨 건네지는 선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삶 속의 모든 상황을 직면해야 한다.
삶이 보여주려 애쓰는 것을 우리가 보려 들지 않을 때는,
보아야만 할 그것을 우리가 기꺼이 보려 할 때까지 삶은 그 강도를 높여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가장 큰 우군이다.
자주 쓰는 말로,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겪어낼 때에만,
삶이 우리를 위하여 거울을 들도록 스스로 허용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출처 :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아디야샨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