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in 1995 (revised 2011), The Open Secret
(ISBN 978-0-9533032-0-5) is a clear, radical and uncompromising expression of non-dualism that speaks of the fundamental liberation which is absolutely beyond effort, path, process or belief.
Published in 2003 (revised 2012), All There Is
(ISBN 978-0-9533032-2-9) is a book of in-depth dialogues from meetings in the UK, Europe and USA.
Published August 2007, Nothing Being Everything
(ISBN: 978-0-9533032-3-6) Dialogues from UK and Europe.
Published in 2015, This Freedom
(ISBN 978-0-9533032-4-3) is a book of essays and also dialogues from the UK and Europe.
토니 파슨스는 한 마디로,
영국이 낳은,
명쾌하게 깨달음을 드러내는
벽안선사라 할 수 있습 니다.
그는 한국 선불교 조계종의 종조인
육조혜능선사와 비견할 수 있는,
현재 살아있는
깨달음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토니 파슨스의 가리킴은 바로,
“언어도단,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조 사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대중(개인성)에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바탕의식만을 가리켜 보이는
토니 선생님의 말씀들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정의와 진리탐구의 문제,
공동체 의식 붕괴의 문제,
자유의지와 운명론의 문제,
개인적 고통의 해결
이라는 문제 등과 마주하여
진지하게 길을 찾아 나아가는
수많은 구도자는 물론이고,
이 땅 위에서 우연히 주어진 삶을 가지고
너무도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하는 책 전체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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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가 상호 협상해야만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분리된 개인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에 묶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꿈꾸는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꿈의 상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상대성의 법칙,
이른바 모든 긍정적 행위도
그 반대의 것으로
정확하게 똑같이 상쇄되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겉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삶이
잘 영위되게 하고, 완전함에 도달하고,
개인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모든 개인적 노력과 시도는,
상쇄되고 중화되어 무효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런 꿈 안에 있기를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실제로 빙빙 도는 순환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깊은 숙고와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일체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끝없이 그 자체를 되풀이하는 그런 바퀴 위에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과 자유의 동시적 창조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의식’입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성 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건 지워진 신념체계에 따라
반응하고 응답 하는
꿈속의 등장인물임을 알게 됩니다.
** 개정판에는 consciousness 대신 wholeness를 사용
진보한다고 아는,
이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모든 종교, 예술, 과학은,
오로지 또 다른 측면의
가능성을 반영함으로써
완벽하게 상쇄되고,
정확하게 중화된 상태를 가져오는
법칙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해탈,
자유의 측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창조한 겉모습은
파괴 되는 겉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가 파괴한 겉모습은
재창조라는 겉모습으로 다시 나타 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꿈은
전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우리 본래의 무시 간적 본성을 떠나,
동일시된 ‘의식’(=화신)으로 옮겨감으로써
이러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깨어남은 꿈 밖에서,
시간 밖에서 드러나며,
개인적 노력, 방법, 과정
혹은 신념을 통한
성취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그 너머에 있습니다.
** 개정판에는 consciousness 대신 wholeness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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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전후 상황) 아주 어릴 때,
나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마법의 세 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경이로움이
나를 감싸버리 는 알 수 없는 단일함 말입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어린아이가 같다고 나는 느낍니다.
겉보기에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하였고
나는 분리와 필요성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내가 나와 분리된 어머니와 아버지,
하나의 이름을 가졌고,
이것 혹은 저것을
행하는 선택을 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시간과 공간, 경계와 탐험, 애씀과 조작
그리고 즐거움을 추구하고
괴로움을 회피하는 세계로 옮아갔습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고,
이들이 나의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인 것 으로 믿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예절 바르게 행동하며,
나의 선택 및 부과된 일에 성공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며,
내 건강을 잘 돌본다면 행복을 거머쥘
좋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꽤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때로는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나는
빠진 무엇인가를
종교를 통하여 찾아 나서야겠다고
결심하는 듯이 보였습니 다.
나는 다시
여러 종류의 수련법과 의식(儀式),
그리고 정화(淨化)에 전념하고 몰두한다면
마침 내 영적인 완성이라는 성취를
거머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 하여 나는
또다시 적절해 보인다 싶은 것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완전히 빠져들었지만,
여전히 무엇인가 허전하고 빠진 듯한
느낌의 원인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 거의 우연처럼,
나는 이 비밀을 재발견하였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이것이
나를 재발 견한 것이겠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는 몹시 불가능합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가까운 묘사는,
사랑의 감정으로 휩싸여 압도됨과 동시에
생각과 상상, 마음속의 그림을
완전히 넘어선 전체적 인 이해입니다.
이 재발견은 너무나 단순하지만,
또한 너무나 혁명적이라는
계시와 동반해서 왔으며,
이것은 내가 여태껏 배워왔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을
단 일격에 완전히 쓸어내 버렸습니다.
이 자각 중 일부는,
깨달음은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
혹은 심지어 삶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과도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생동하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자각으로의
전면적인 이동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찾거나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구함의 쇼핑 목록이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픈
목마름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집은 완전한 일체(一體)이고,
본유적(本 有的)이며 당연한 현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금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른 어디로 갈 곳도 없으며,
다른 무엇이 될 것도 없습니다.
물론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을 통하여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선 언적 진술은 비밀의 드러남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나는 깨달음, 시간, 목표, 영적 완성을 성취하기 위한
나의 노력에 대한 믿음이,
언제든 직접 누릴 수 있는 일체성을
곧바로 가로막는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애쓸 것입니다.
어떻게 분리,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추상적 관념이라는 환영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영향력들을 포용함과 동시에
이들을 변용시키는 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여
혼미하게 만드는지를 말입니다.
나는 또한 환영에서
놓여나고 풀려 지는
이 자유에로의 열림이,
얼마나 애씀 없이 쉽고 자연 스러운 일인지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명상적 삶으로 인도한다거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를
권고하는 것으로 본다면
핵심을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적 진술은
우리의 진정한 됨됨이에 대한 인식에서의,
단일하고도 혁명적인 도약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꾸밈이나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으며,
한번 자각하여 깨어 나면,
더는 말할 것이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서 깨달음, 완성, 자유, 일체성 등의 말은
내가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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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는 없다.
나에게 처음의 깨달음 혹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으로의 깨어남은
뭔가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인 가가 아닙니다.
일어난 일은 심지어
어떤 하나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것이 드러나려면
분리된 경험자의 부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깨어남은,
이것이 나를 경이로움과
전적으로 홀로 있는 상태에 있게 한 것이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중요하고도
혁명적인 내용의 깨달음과 같이 왔습니다.
내가 알게 된 것 중 한 가지는,
깨달음은 오직 그것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받아 들여졌을 때야
비로소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의들,
목표달성 과정들,
점진적인 진보의 길들은,
자아가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함으로써,
그 상태에 머무는 문제 상황을
단지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하나임(oneness)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환영을
끊임없이 재창조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이며,
바로 자아정체성 탐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진실을 가리는 장막입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성·개체성·개성이라는 꿈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땅속 깊은 구멍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어떤 사람이 그 구멍을 탈출하기 위하여
더욱더 깊이 땅을 파면서,
파낸 흙을 자신의 뒤로 던져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빛을
덮어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노력도
하나임을 나타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나 자신이 그것인,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기 위한
극단적인 애씀의 유일한 있음 직한 효과는,
결국 완전히 지쳐 밑바닥에 쓰러져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놓아버림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군분투하여 신성화 되려 함으로써
자유를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시간 안에서의 노력과 분투는
해탈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삶은 힘들게 수행하는 그런 과제가 아닙니다.
삶에는, 노력하여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어남 이외에는,
획득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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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지 못하다가 새롭게) 깨닫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예전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깨닫게 될 수 있으며,
그 사건은 누군가가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단 한 번, 이 상을 타는 데 성공하면,
그 이후 당 첨자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무오류성
그리고 다시는 썩지 않는 선량함이
보장된다고 말입니다.
무지 속에서,
나는 이러한 깨닫게 된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노력한 끝에 얻어
소유한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망상은,
깨달음은 비범하며
선택된 소수 의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거의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강화했습니다.
이런 오해와 착 각은, 완벽한 상태는
어떻게 보여야만 한다는,
내가 붙잡고 있던 어떤 이미지로부터 나왔습니 다.
깨달음은 완전성이라는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신념들은, 내가 그렇다고 상상하는 나의 부족함을,
그때 당시에 우연히 끌린 “영적 영웅”들과 비교할 때
더욱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이런 방식으로 본다고 느낍니다.
확실히 이런 신념들에 용기 를 북돋워 주고
또한 실제로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 히 있습니다.
나는 이제는 이것이,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나는 숨을 쉴 줄 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고 허망한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본질적 깨달음 자각은,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깨달을 무엇도 없다는
갑작스러운 이해 를 동반합니다.
깨달음은 단순하게 늘 있습니다.
이것은 우승 트로피처럼 얻거나 성취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 일체는 지금 하나임이며,
깨달음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행하는 모든 노력은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깨달았다는 주장 혹은
특정한 입장의 견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 자체가 가지는 모순된 성질 및
그들이 성취했다고 상상하는 그 상태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단지 자 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심오한 개인적 경험을 했을 수는 있지만,
이런 것은 해탈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특정한 신념체계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적인 관념들 안에 스스로 묶인 채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영적 교사’
혹은 ‘깨달은 스승’의 역할을
떠맡을 필요를 느끼는 듯하며,
필연적 으로 학생이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이원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지도자”와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로의 분리 를 촉진합니다.
추종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스승의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역할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게 됩니다.
이런 역할이 채택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인간적 약점”의 표출 및
시인에 대한 (자기) 단속입니다.
이런 것과 함께,
“스승”과 추종자들 간의 거리가
통상적으로 만들어집니 다.
“스승”의 특별함이
더욱 효과를 발휘할수록 추종자들의 요구도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 가르침도
더욱 모호하고 뒤얽히게 됩니다.
가르침의 불명확성이
증가하는 것 과 같이하여
분리가 더욱 확대되고,
종종 추종자 중 많은 사람은
더욱 혼란스럽게 되고 복종 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통상적 효과는
무조건 추종, 환멸,
혹은 알아채고는
다른 데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향력들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곧바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대해
의심과 무능력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유 지되게 합니다.
이 의심과 부족감은
집단 무의식에 내재하는데,
환상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껴안은 사람들은
팔아야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이 소식을 서로 나눌 때는
그들 자신이나, 나누는 것에 대하여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아 버지 혹은
지도자 역할에 대하여 그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독점권은 배타성을 키우지만,
자유는 벗으로 사귐을 통하여 같이 나누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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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외관상의 분리 안에서,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간의 존재와 영향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 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나는
불가피하게 시작, 중간 그리고 끝.....
깨달음이라는 목표와 결말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는
관념과 경험에 묶여버렸습니다.
이 여정이라는 관념은,
학교에서 성적이 좋다거나,
사업에 성공한다거나
혹은 깨달음을 이루는 등
어떤 수준에서든 적용됩니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어떤 결과를 얻거나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경로입니다.
이 메시지는 외관상으로 보이는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과정에 의하여
내 정신에 가장 강하게 아로새겨졌습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는
반박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의 존재, 흐름
그리 고 영향을 반영하고 강화하였습니다.
시간의 영향력으로
생겨나 보이는 것을
내가 경험하는 만큼,
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간의 존재를 믿는 만큼,
또한 나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만큼
역시 주어진 기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아있다고 상상하고 믿는 기간 동안,
가치 있는 무엇 인가를 해야 했고,
무엇인가를 성취하여야 했으며,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적이라는 관념이 태어났고,
이와 더불어 내 기대와 목적 달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동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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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목표
나는 목표에 대한 기대를 통하여
시간과 분리의 한계 속에 갇혀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적 인 것을 포함하는
다양한 인생의 목적과 목표들을 추구해 왔습니다.
전통적 종교윤리 안에서,
나는 그때 당시에 풍부한 전통을 가진
권위 있는 지혜를 대표한다고 믿기는
동·서양의 다양한 교리들 및 관념들을
만나고 경험하였습니다.
내가 본 것의 결과로
나는 부족하고 결핍되었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되고,
어떤 곳에 속하 기 위하여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목표지점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다고 느낄 필요성을 충족시켜 줄
실제 모델을 나는 찾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외관상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정보를 고려할 때
그러한 접근이 가장 적절하게 보였습니다.
나에게 주 어져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서구적 배경, 성경적 역사와 전통에 대한 지식,
외관상 의심할 여지 없는
진리, 과정, 의례들.....
원죄, 기도, 고백, 용서,
성찬의식, 정화
그리고 기록되고 말해진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이해하고 신성시하던 것과
나의 영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바라던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내일 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며,
여기보다 더 나은 다른 곳에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결핍되었기 때문에,
회개를 통하여 신의 은총에 다다르며,
이것을 통하여 나는 마침내
존재의 낮은 수준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이동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메시지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믿기는
돈과 수단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천상의 네모난 광장에 앉아
셈하고 기록하는 동안,
나는 기도로서 간청하고
공적(功績)을 연기(演技)하여
협상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낫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많은 시간, 기회, 지식이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나의 목표는 희망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옳게 잘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노력하고, 저항하고
이를 고집스럽게 계속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는 것은
더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도록 도울 수도 있었습니다.
목표, 희망, 믿음은
나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를 주었습니다.
목표, 희망, 믿음.....이 런 것들은
많은 사람에게 매우 소중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숭배되고 또한 외견상
강한 힘을 가진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들 역시
혼란, 절망, 의심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것 들입니다.
당시에 나는
사물의 그런 측면에 대하여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필연적으로,
양극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던 시계추는
기대와 실망,
노력과 무능함,
외견상 강점과 약점들과 부닥쳤고
그들 모두는 내가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교감과 참회,
그리고 모든 영적인 과제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탐욕적이고 밑 빠 진 영적 쇼핑 카트를
나는 기도, 금욕, 겸허, 숭배,
그리고 선행으로 채워야 했지만,
비록 내가 그중
하나의 바닥에 도달한다고 해도,
아마도 나는 또 다른 것을
복종과 순결로써 채워야 만 할 것입니다.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어떤 면에서 그 모든 것들은
너무 구태의연하고
기쁨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무기력한 추종자가,
부정과 숭배라는 수련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기대는,
고작 두려워하고 무기력한 추종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종교적 독신생활을
고수하는 길을 가면서
하나가 되는 결혼 축하연회에
이르고자 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아무런 액체도 넣지 않고
밀가루만 가지고 빵과 과자를
구우려 하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교의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허위의 진술로
귀착할 수밖에 없 다고 봅니다.....
창작자의 미묘하고 아름다운 자유의 노래를
영원한 종교적 교리라는 한계 속 으로
완벽하게 번역해 넣으려는 모순된 생각 말입니다.
새가 날아가고 나면,
종종 새 노래의 정수는 잃어버리고
빈 새장만 남아있게 됩니다.
나는, 사막에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막 발견한
어떤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신과 악마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신이 악마에게 말하죠,
“아하, 이제 저 사람이 진리를 발견했으니
넌 아 무것도 할 수 없어”, 악마가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난 그가 진리를
조직화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걸”
언제나 혹은 어디서나
조직화 된 종교는 있습니다.
조직화 된 종교는
우리들의 최악의 두려움 과
가장 어두운 죄책감,
그리고 사람들과 민족들과 신념 간의
가장 추한 투쟁을 가장 쉽게 낳고 키우는
풍요로운 토양입니다.
우리가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지와 무관하게,
이런 상처들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할 수 있고
우리 경험의 모든 부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내가 직관적으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속죄하는 부정과 신중하게 고려된
긍정에 기초한 윤리체계는
부자연스럽고 부자유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런 상황들에서 옮겨가,
우리 시대의 치유와 영성의 세계를 탐구하였습니다.
완성을 향한 이러한 접근들이,
내가 그 이전에 부닥쳤던 어떤 것들보다도,
그리고 매우 자유 롭게 열린 생각보다도,
더욱 지혜로우며 받아들일 만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창조력, 건강, 부유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나 스스로 느끼는 자긍심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의 부분들을 발견하고
치유하고 통합하는 것을 배울
수단의 주어짐에 대한 엄청난 흥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지게 될 것인지요.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삶의 방식의 개념적 모델이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은
특히 호소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엄청나게 많은 과정과
20세기의 영적인 모험 같이 느껴지는 것을 공유할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충격적이고 찬란한 돌파구들,
감정의 격동,
가장 내밀한 것의 드러남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
스승에 대한 진정한 순종,
왜 내가 여성들에 대하여
그토록 매혹됨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는지 등등에
관여한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뇌와 계시들,
과거 삶의 기억들,
현재의 도전 그리고
미래의 희망과 두려움들을 공유하는 것,
이 모두는 하늘의 계시였고 확증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부 매우 흥분되는 것이며,
전부가 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장 깊고 가장 계시적인
명상에 몰입하였고,
가장 최신의 가장 중요한
서적들을 탐독했으며,
그리고 당연히 가장 최신의 치유법에
열성적으로 매진하였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땅에서 새로 솟아난
처음 보는 과일처럼, 즙을 빨아 먹고
소화하고 혹은 맛보고 그리고는 던져졌 습니다.....
이런 호흡법, 저런 확언, 이런 통합법,
저런 특별하고 의미심장한 에너지.....
이 모두 는 초기 시절에 나에게는 매혹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활동들이 자기성찰 아니면
자기 방종이 라는 것을 볼 수 있었더라면,
나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외견상의 선택은 개인적 동기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용서하고,
내면의 어린아이를 치유하고,
과거에 파고들기 등등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치명적으로 중요하게 지키고
따라야만 할 것들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현대판 십계명과 같은 것이었 지요.
나는 동양적 명상과 혼합된,
핵심적인 현대적 의미의
많은 치유를 경험하는
심도 있는 코스 를,
주거하면서 수행하는데 일 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나는 이런 치유와 방법이
나에게 적합하며
많은 이익이 있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이전에 고수해오던 금지와 억제로부터
엄청난 변동을 경험하였고,
내 이전의 행동에 강 력한 영향을 끼친
신념체계와 패턴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일이 행해지면서,
자아정체성과 자긍심에 힘을 주고
이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이론은
만약 내가 이러한 과정들을
받아들이고 동질화한다면
마침내 나 는 더욱 생동감 있고,
균형 잡히고 효율적인 개인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전체 안에서의 관계 맺음과
내 역할에 대한
보다 명백한 견해를 가진
개인으로서 말이지요.
이 모든 구조는
상당한 수련과 노력으로부터 개발되는
강력한 신념체계 위에
건립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의심의 그림자 안에 거주합니다.
신념 그것은, 언제나
우위를 점하려는 의심을 억압하는
바로 그 정도로만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내가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고치고 한데 모으면
마침내 함께 단일한 전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안에서
노력하고 있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깨달음은 자아정체성과 자긍심에 관련된
나의 노력과 기대를 넘어선 곳에 있다는
이전의 나의 이해와는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현대적 치유의 세상은 이전에 지나가
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더 받아들일 만한 수많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내 경우에 공원에서의 깨달음의 일별은
내 21세 때의 종교적 길에서 벗어남을 가져왔습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현대적 치유법에 관여했는데,
이들이 더 깊게 가능성과 소통 하는 수단이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나는
시간으로 둘러쳐진
기대와 목표와 결실들에
매혹되고 매몰된
나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시간의 세계에서는,
목표와 결실이 완벽하게 적절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를 둘러싼 집착과 기대 위에
너무나 많은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되고, 저것에 속하며,
변화의 과정들, 혹은 더 나아지고,
정화의 방법들 등등. 중요한 새로운 사람과 장소,
의식의 마스터들과 진리의 스승들이
모든 곳에서 샘솟듯이 출현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공식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우 리는
이 공식에서 저 공식으로 옮겨 다님으로써,
자유가 어느 한 장소 혹은
다른 한 장소에 거주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바로 그 본성에 의하여,
배제되거나 배타적일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다음의 “영적인” 향상 을
기대하며 행진해 갈 때,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그 보물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바로 그 발걸음의 단순한 본성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 안에서 더 나은 상황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돌진은,
매 순간 그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존재의 꽃을 밟아 뭉개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한 우리의 집착은
우리 스스로에 무엇인가를 증명하려는
필요성으로부터 태어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삶은 그저 단순히 삶입니다.
삶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번의 봄은
지나간 봄보다
더 나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물푸레나무는
참나무가 되 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범상치 않고 극적인 것에 대한
이끌림에서 저절로 놓여나면,
평상적 삶에 놓인
단순한 경이로 움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다른 존재 이유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삶의 아름다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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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7.
오랜만에 이전에 완역했던
토니 파슨스의 '열린 비밀'을 살펴보니,
당시에 서둘러 번역한 탓으로 보이는
번역 오류도 몇 군데 보이고
어색한 부분도 많아서
중요한 중간 부분 이하를 다시 번역하여
오류를 수정하고 문장도 다듬었습니다.
이하 수정 번역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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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k
One day I was walking across a park in a suburb of London.
I noticed as I walked that my mind was totally occupied with expectations about future events that might or might not happen.
I seemed to choose to let go of these projections and simply be with my walking. I noticed that each footstep was totally unique in feel and pressure, and that it was there one moment and gone the next, never to be repeated in the same way ever again.
공원
어느 날 나는
런던 교외에 있는 공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걸을 때 내 마음이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 사건들에 대한 豫想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런 마음의 예상(豫想)
혹은 투영(投影)을 버리고
그냥 걷기로 선택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각각의 발걸음들이
완전히 독특한 느낌과 압박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한순간에 있었고,
다음 순간에는 사라져 버렸고,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As all of this was happening there was a transition from me watching my walking to simply the presence of walking. What happened then is simply beyond description. I can only inadequately say in words that total stillness seemed to descend over everything. All and everything became timeless and I no longer existed. I vanished and there was no longer an experiencer.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발걸음을 지켜보는 것’으로부터
그냥 ‘발걸음의 現存’으로 變換 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부적절하지만
단지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적막이 모든 것 위에 내려온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無時間이 되었고,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라졌고 더는 經驗者가 없었습니다.
‘일체 모든 것과 동시에
하나임’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지 모든 것 일체와 하나임이 일어 난 일이며,
압도적인 사랑이 모든 부분을
가득 채웠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전체성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처럼 보이는
무시간적인 순간 안에 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일과 곧이어 발생한 일이 내포한 계시가
그 본성상 너무 엄청나고 혁명적이어서
나는 이 결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잔디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내가 본 것은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전달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 하지 않는 질문에 대하여
답이 주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이미 공개된 비밀이 나에게 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 일체는
이 공개된 비밀을 포함하고
이 를반영합니다.
천지자연, 사람들,
태어남과 죽음,
분투하고 노력함,
두려움, 욕망 모두가
무조건인 사랑 안에 있고,
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갑자기 어떤 것이 엄습해 와서
모든 것이 새로운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잔디, 나무, 개,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질이
나의 본질인 것처럼
내가 그들의 본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마치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깊고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으로 뒤덮여 지는 것 같았고,
이상 한 말일지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은 왠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상시에는 감지되지 않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왜 나이고 왜 지금일까요?
어떻게 나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요?
나는 성서적 감각 혹은
다른 감각지각 또한 심적으로도
순수하지 않았음은 확실 했습니다.
나는 규칙적인 명상적 삶 혹은
영적으로 헌신적인
어떤 종류의 삶도 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밝게 비추는 계시는,
내 쪽에서는 아무런 노력함 없이 일어났습니다.
매우 쉽고 자 연스러운 방식으로
내 발걸음을 관찰하도록
내가 선택되어 진 것처럼 외관상 보였고,
곧이어 이 보물이 드러났습니다.
나는 또한 이 선물이
이전에도 언제나 주어져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내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본유적 존재는 나타나
나를 껴안을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그리 고 이 보물은
고되고 외견상 의미심장한
영적 수행과 의식들을 통하여
재발견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멋지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물은
발걸음의 본질에서,
트랙터 소리에서,
고양이가 앉는 것에서,
고통과 거부의 느낌에서,
산꼭대기 위에서,
혹은 시내 중심가 한가운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모든 곳에서 나는
고요함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하나임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채 껴안아 져 있습니다.
Later on I began to wonder how this treasure could be retained. But I have again and again come to see that what I had sought to rediscover can never be achieved or contained. There is nothing I have to do, and the very belief that I have to do anything to deserve this treasure, interrupts its inherent quality.
나중에 나는 이 보물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발견하고자
찾고 추구한 그것은
결코 성취되거나 보관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없고,
이 보물을 마땅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 가를 해야 한다는 바로 그 믿음이
그것의 처음부터 타고난 성질을 방해합니다.
또다시 역설이지만,
이 신성한 본성은
언제든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손안에 있으며
영원히 준비된 상태로 있지요...
지속적이고 믿음직한 연인이
우리의 모든 부름에
언제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내가 이것을 허용할 때 이것은 있고,
내가 이것을 회피할 때도 이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노력이나 기준 혹은
규범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편애도 없습니다.
무 시간의 존재는
밟아갈 길도,
갚을 빚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옳고 그름을 모르며,
심판과 죄책감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입니다.
내가 귀 환을 위하여 빠져나올 때
이것은 단지 분명함과 연민과 기쁨으로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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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iceless Choice
선택 없는 선택
實在 안에서 나는 봅니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한 적이 없고,
삶은 단지 겪어져 왔다 는 것을.
그래서 나는 결코
바다를 멈춘다거나
태양을 움직이지 않았고,
이미 모든 것으로 있는
그것으로부터 멀거나 가깝게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무력함을 수용하는 가운데
결코 나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과거나 미래를 갖지 않는 자유를 즐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누가 선택하고,
누가 이 경이로운 혼돈을 감독합니까?”
그러나 한 번 사랑의 품 안에 놓이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치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살수 있 으며
놓아 보냄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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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ld
나의 세계
나의 세계로서 내가 경험하는 것들 안에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만 完全히 獨特합니다.
다른 그 누구도
내가 경험하는
빨간색, 마시는 차의 맛,
내 두려움과 행복의 느낌,
발걸음의 느낌, 꿈꾸는 느낌,
혹은 잠 깨는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내 경험들이
내 믿음들을 크게 形成하고,
그리고 내가 믿는 것을
내가 다시 경험 하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두 同胞(믿음과 경험)의 상호 작용이
순간순간 매일매일 내 삶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존재의 이 수준에서는, 나는
“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출연자·대본·음악 감독으로 나타납니다.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하게
내 삶을 돌아보면,
겉보기에 내가 어떻게
나의 특정한 신념체계가 광고해 온
그런 종류의 영향력과 이미지에
완벽하게 꼭 알맞은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행동 양식들을
나에게로 끌어들였는지를 봅니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매우 흥분하게 되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각 패턴과 신념체계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삶의 경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권유하고 또한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진정한 정체는
경험과 신념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SECRET’은 아직 꿈속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고,
여기서는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를 한다는 의미,
꿈을 창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신념)
내 본래면목을 재발견하기까지,
나는 어떤 종류의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애써왔을까요?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가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나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분명히 알 수 있는가요?
내가 만들어야만 할 것에 대한 생각이
당신의 생각보다 더 좋거나,
혹 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 미래상을 가지고 서로 충돌할 것입니까?
이것은 반복하여 발생하고 나 타나는 패턴입니다.
이런 관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은,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 내려는 바람과
욕망 너머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지 요...
이와는 다른 훨씬 더 강력한 원칙은,
완전하게 본래 타고난 것이지만,
평소에는 인식되지 않는,
계속 작용하고 있는 무조건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핵심적인 삶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그것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본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우리를 쉼 없이 초대하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원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와 협상하여야만 하는
분리된 개인으로 있다는
경험 안에 갇혀 있는 동안은,
우리는 꿈을 꾸는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꿈의 상태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긍정이 그 정반대의 것에 의하여
정확하게 상쇄되어 평형으로 돌아가는
대극(對極)의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깊은 숙고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이 모습만을 바꾸며
그 자체 저절로 계속 반복하는
수레바퀴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외견상 창조한 것을 파괴하고,
우리가 외견상 파괴한 것을 다시 재창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하여
무엇을 믿는지에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조건적 반사작용 및
신념체계의 설정에 따라 반응하고 응답하는
신성한 연극 안에서 꿈꾸어지는
등장 인물들이란 것을 보게 됩니다.
All of our dream world that we see as progressive comes within the parameters of this perfectly balanced and exactly neutral state which serves only to reflect another possibility.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보는
우리의 모든 꿈의 세계는
오직 다른 가능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만 작용하는
이 완벽하게 균형 잡히고
정확히 중립적인 상태의
媒介變數의 작동 범위 안에 있습니다(緣起法則)
cf.
C+X=Y에서
의식 C는 매개변수,
X와 Y는 서로 종속변수
X가 나이면 Y는 세계,
X가 진선미면 Y는 위악추,
X가 빛이면 Y는 어둠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목적이 없는 꿈을 꿈꾸는 자들입니다.
실상 우 리는 우리가 그것에 응답하건 안 하건
무조건인 사랑에 둘러싸이고 껴안아져 있습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다시 깨어나는데 필요한
특별하고 고유한 필요성에 맞추어,
큰 규모의 사건들과
작은 미묘한 차이점들까지
정확하게 맞추어진
완벽하게 적절한 나타남을 설치합니다.
생각하기에 우리의 활동이
아무리 중요하건
아니면 중요하지 않건,
혹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우리의 표현됨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아무리 재능 있든,
예술적이든, 유용하든,
평범하든, 혹은
결실이 없든 뭐든 간에,
이 모든 것 일체는
단지 그리고 오로지
그 숨겨진 원리의 기능
혹은 작용일 뿐입니다.
완전히 적절한 반영은,
모든 현상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그 너머로 가서
그것의 發散物의 근원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영원히 끊이지 않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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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the Mind/Body
마음/몸의 죽음
마음/몸의 죽음은
단지 분리라고 하는
환영의 끝남일 뿐입니다.
무조건인 사랑에로의 깨어남은
목전(目前)에 즉각(immediate)입니다
(시공간적으로 너무 가까 워서 당장입니다).
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무관하게
우리는 처음부터 본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몸/마음이 쓰러질 때,
거기에는 준비 혹은 淨化를
仲裁(분쟁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킴)해주는 과정이 없습니다.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누군가가 있기는 한가요?
개인적 인 “死後”에 대한
모든 생각들 혹은 還生은
단지 마음이
그 자신의 지속이라는 환영을
유지 하려는 바람일 뿐입니다.
寓話는 끝났습니다.
신성한 소설은 쓰이었고,
마음이 어떻게 판정하는지에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舞臺 배경인 풍경은 증발하여
차츰 사라지고
등장인물들은 무대를 떠났습니다.....
그들 겉모양 존재는
꿈이 다 꾸어지는 것과 더불어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바다이고, 파도 이고,
어둠이고 그리고 빛이고,
어떤 물건도 아니고,
그리고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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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관념(추상작용)
나는 추상개념에 사로잡히고 매혹되어져,
가지지 못한 살아있는 경험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림을 그려서
가지는 쪽을 더 좋아했습니다.
내가 추상화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살면서 간혹
물에 희석된 것처럼
흐릿하게 순간적으로 스칠 뿐입니다.
내 관념은
갈망 혹은 좌절에서 생겨난
희뿌연 영상이고,
그것은 나에게
휴일이라는 꿈을 제공 합니다.
그것은 아는 것 안에서
언제나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입니다.
추상관념이 무너질 때,
있는 것은 오로지
실제로 있는 것만 있습니다...
내 몸의 감각들, 교향 악은 계속 연주됩니다.
음을 조율할 필요가 없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뀌고 움직이며, 오고 갑니다.
여기 혹은 저기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납니다...
그것은 증발하여 사라지고
다른 뭔가가 발생합니다.
내가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계측할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존재하다가 그 다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약 모든 것을 다 잊고
듣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거나, 혹
은 보려고 하면, 미리 事前에
이런 감각들의 정확한 질감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예측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일 뿐입니다.
그것은 살아있지 않고, 생명력이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듣는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는,
내가 소리에 대하여
관념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을 통제하기 위하여
이름 붙이고 파악하려고 애 씁니다.
외견상 이런 통제를 잊을 때
그곳에는 단지
듣는 사람과 소리만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떨어져 나가면
오직 소리만 있습니다.
거기에 나는 더는 없으며--
다만 벌거벗고 활기차게 떨고 진동하는
존재 자체의 에너지가 있을 뿐입니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일체가 충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가 거주하는
이 존재의 연금술입니다.
생명이 나를 손짓하여 부릅니다.
그것은 속삭이고, 큰소리로 외치다가,
그리고는 나에게 비명 을 지릅니다.
종종 위기 혹은 질병이라는 비명은
나의 진정한 면목의 재발견을 가져오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관념으로만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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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진정한 나를 알기까지, 나의 삶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의하여
크게 조종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의 시작과 끝을 낳는 것은
나의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 계속되려는
본능적 동기를
유지하고 영속화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갈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두려워하면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친밀함을 두려워하면
냉담하려고 애쓰며,
종속·아첨을 두려워하면
지배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만약 내가
평범해짐을 두려워하면
나는 특별하게 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의 두려움이 극복되면
또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의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만약 존재하기만 하면,
공포는 하나의 추상적 관념이라는 것이
뚜렷이 보여집니다...
앞날에 대한 근심은
기억의 청사진에서 생겨납니다.
만약 두려움을 낳는 스토리가 탈락되면,
나에게 남 겨진 것은 가공되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는 육체적 감각뿐임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것은 나의 질주를 멈추게 하고,
조용히 존재의 자리를 대체합니다.
육체적 혹은 감정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하기를 그칠 때,
나는 나 자신을 그것의 굴레에서 해방하며
그것 을 단지 있는 그대로 봅니다.
고통은 내 것인데,
그것은 나쁜 것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기를 그치면,
그것은 단지 어떤 하나 의 형태를 가진
에너지임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은 그 특유한 풍미와 맛을 지니기 시작합니다.
고통이라고 이름하는 것의 본질은
나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심오하게 들려줍니다.
즐거움을 갈망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바로 그것에 의하여 나는
그 가능성을 뿌리로부터 둘로 쪼개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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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오직 내가 배웠거나
나 자신을 위해서 구축한
신념체계에 기초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할 때만,
나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형성되는 신념들은
다시 시간 속에서
단지 과거 경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런 개념들은
목표를 향해 가는 여정,
정화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존재에는,
무엇이 된다거나
목표를 향한 애착이 없습니다.
나는 가치 있게 되기 위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어떤 모범을 성취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음을 압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그 환영의 감각을 달래려고 시도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은,
나는 계속 해방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무엇인지를
재발견하는 것을
실제로 가로막는
강력한 연막인,
죄의 드라마 혹은
업장(業障)이라는 것을
만들고 싶은
매혹과 탐닉이 존재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옳음과 그름이라는
환영의 개념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착각된 상대 개념들은
절대적으로
이 둘 너머에 있는 그것을
회피하는 데 쓰입니다.
존재에는
아무런 역사(歷史)가 없으므로
어떤 빚도 없습니다.
내가 분리되었다고 느끼든,
아니면 존재하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분리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불구하고,
나는 분리되었다고 느낍니다.
존재에서는 자신은 더는 없고
단지 실제로 있는 것만이 있습니다.
양쪽 상황 모두 완전합니다.
각 사건에는
그 자체의 응분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가 다음에는 사라집니다.
거기에는 앞으로 갚아야 할
발생 중인 빚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측정하는
무자비한 재판관을
지속해서 고용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쟁하고, 죄악을 행하고
고통을 당하는 존재로 규정하여
감금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 자신을 투영한
하느님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지요.
오직 알든지 그렇지 않다면 모를 뿐입니다.
만약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나는 볼 수 없으며,
어둠은 단지 어둠입니다.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닙니다.
악 또는 선, 원죄,
카르마 혹은 부채 등
어떤 종류든 간에 모든 개념은
깨어나지 못한 마음의 산물입니다.
부모와 나 자신이라는
감각의 유지, 보강, 및
시간 속에 속박된 마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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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내가 생각하기’는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은 내가 생각하기를 창조합니다.
시간 안에서 생각함 으로써 나는
자아정체성과 분리라는 환영의 감각을 유지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고로 나는 계속됩니다.
시간 안에서 思考하기는,
대부분, 파악하고 둘로 나누며,
만족과 고난을 향해 가는 전진이라는 생각을
지속해서 산출합니다.
그것은 혼란케 하고 또 질서 잡으며,
약속을 만들고 파기합니다.
시간 생각하기는
자아라고 부르는 곳으로부터 나온
기억과 投射의 바다 위를 앞뒤로 움직입니다.
나의 마음은
평생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제한과 자유를 동시에 보며
그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 을 유지합니다.
보이고 보이지 않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속에서,
오직 보는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아무리 많은 생각일지라도
내가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나를
강어귀 까지는 데려다줄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은
생각의 존재나 부재의
완전한 너머에 있습니다.
나는 자아를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보일 때,
그러한 봄은
고요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창조적 생각은
그 무엇도 아닌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생각 너머로 간다면,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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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onships
관계
부모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초기 경험들이 관계에 대한
나의 믿음과 행동양식들 (patterns)을 설정하고,
이런 행동 양식들은
내가 나의 진정한 면모를 재발견할 때까지
그 이후의 모든 관계를 따라가고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어떤 게임을 하든,
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 게임의 同胞 혹은 同僚가 될 것이고
그것을 강화하고 지지합니다.
만약 내가 궁핍해질 필요성이 있으면,
나는 궁핍을 창조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拒絶될 필요성이 있으면,
나는 拒否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 수만큼
많은 변형 혹은 변주곡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 양식들(patterns)은
오직 나의 특별한 필요성과 믿음의 확인일 뿐이며,
그들은 내가 아직 재발견하지 못한 그것을 반영 합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적절합니다(꼭 알맞습니다)--
그냥 무조건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른 가능성을 보도록 초대하는
숨겨진 원리의 한 부분으로서.
시간과 분리라는
나의 세계 안에서
내가 관계로서 경험하는 것은,
마치 나와 다른 사람 간의
연결수단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감정과 관심,
열정, 웃음과 눈물,
생각과 반영의
상호 교환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소통합니다.
나는 나에게서 떨어진,
내가 저 밖으로 투영한 그것과 관계하는 중입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의미의 合致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마 치 두 개의 투영, 두 개의 조건,
두 개의 행동 양식 사이의 교통처럼 보이거나
서로의 에고를 후려치기로 한 합의처럼 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내 컴퓨터는 때때로 그 안에 그들을
감금한 상자에 다른 사람을 넣습니다.
가끔 나는 그 상자의 정보량을
여기저기로 확장하거나 혹은
더 크거나 작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안전하게 머물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그들 누구와 관계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개념과 관계합니다.
나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되기 위하여 분발할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그들을 내 판단으로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미묘한 경쟁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믿기에 다른 사람을
내 결핍된 느낌을 충족시켜줄
누군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투영하기를 원하는
이미지를 승인할 수 있고
혹은 가치 있게 되고자 하는
내 느낌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로서
나를 흥분시키거나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모든 가장 근본적 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반영이고,
그것 은 나 자신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지를 재발견하게 될 때
관계에 대한 의문은 더는 없습니다.
열려있고 기꺼 이 받아들이는 현존에는,
기억 혹은 경쟁, 비교 혹은 기대의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만나야 할 장소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둘 사이에 거리가 없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관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지속하는 신선함과
그냥 있는 것의 축제 속으로 통합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로 되돌아갈 때를
일깨울 수 있는,
저절로 주고받는 성찬식입니다.
한때 위협으로 보였던
空虛感을 채울 필요가 없으므로
거기에는 종종 고요한 침묵이 존재합니다.
이런 침묵 은 계속 춤추고 있는 존재 안에서
그냥 함께함으로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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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not ...
나는 ...가 아니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마음, 육체, 느낌들,
즐겁거나 아픈 경험,
투쟁, 성공 혹은 실패가 아닙니다.
나는 외로움, 고요함,
좌절, 자비가 아닙니다.
나는 심지어 내가 생각 하는
나의 목표, 탐구, 발견,
혹은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어떤 영적인 체험도 아닙니다.
내가 무엇이라는 꿈을 꿀 때,
나는 이런 경험들을 신성시하게 되고,
이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며,
이것들에 심대한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한번 이해되면, 그것들은
나에게 해답 과 공식을 줄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의 경험들은
단지 무의미한 숨바꼭질 게임 안에서,
하나임 스스로 감추어짐과 나타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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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나는 있다...
‘실제로 있는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전체성의 完全 無缺한 나타남이 있습니다.
더하거나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타당하거나
더 성스러운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어떤 조건도 충족될 필요가 없습니다.
무한성은 우리가 資格을 갖추기를 기다리는
어떤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있는 모든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거나,
혹은 순종하거나, 정화되거나,
어떤 종류의 변화나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분리된 자아라는 환영(illusory)이,
그것이 架空 혹은 假想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修行(practice)할 수 있겠습니까?
심각해지거나, 정직하거나, 부정직하거나,
도덕적이 되거나, 비도덕적이 되거나,
심미적(審美 的)이 되거나 저속하게 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조할 중요성이 없습니다.
겉모습으로 일 어나는 삶의 스토리는
각자가 깨어나는데
정확하게 유효적절하고 독특합니다.
모든 것은 正確 하게 그것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나은 무엇이 될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解脫을 필요로 할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라는 초청은 계속됩니다.
變容의 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無行爲者, 영원한 축복, 無我의 상태,
혹은 고요한 마음을 찾거나 求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恩寵이 내려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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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Being Every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으로 존재하는 중
(바탕의식이 육체·자아·세계로 펼쳐지는 중)
追求하는 사람이 渴望하는 그것은
하나의 어떤 것(하나의 물건) a something으로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말로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物件 對象(object)으로 변하고,
그러면 추구하는 에너지
(사람 혹은 자아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 에 유의)는
필연적으로 소유가 가능한
하나의 어떤 것으로 믿는 무엇을 발견하고,
잡고, 얻고, 혹은 그럴 價値가 있고
資格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분리된 실재(separate reality)는
모든 것을 二元的인 것처럼 체험합니다...
다른 어떤 하나로 알거나 자각합니다...
한 그루 나무, 한 사람, 혹은 한 의자에 앉기.
모든 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대체로 항상 있습니다.
나의 스토리는
언제나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
결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 안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지,
삶이 보물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금 곡괭이로 금흙을 파서
금을 캐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Being은
모든 말(단어)과 같이 不適當합니다.
전체성, 에너지, 존재,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
하나임, 무경계 등
모두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결코 正말로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해지는 것은
요즘 인기 있는 생각인,
“지금 여기 존재하라”,
혹 은 “순간을 살라”,
혹은 “모든 것은 의식”,
혹은 “내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기”
등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습니다.
어쨌든 존재의 特性을 묘사할 방법이 있다면,
있으면서 없는 둘 다로서
無原因, 無關係, 非個 人的 에너지...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진짜인 동시에 가짜 둘 다인 그것.
그것은 절대인 상 대, 무형상인 형상.
They are not apart...there is not two.
그래서 “있는 모든 것이 이것이다”
(All there is is this.)라고 말할 때,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의
절대적 단일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This)은 있는 무엇이고
그리고 있지 않은 무엇입니다.
“이것”은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진짜인
그리고 가짜인 그것입니다.
“이것”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엇입니다.
어떤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알려지는 것이 불가능한
그것을 말로 가장 가깝게 묘사한 걸 겁니다.
Being은
판단, 분석, 결론에 도달하려는 소망,
혹은 되고자 함이 완전히 없습니다.
거기에는 交通(往來)
혹은 期待(豫想)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냥 있는 무엇이 있고...
그리고 있지 않습 니다.
Being은
이미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行하여” 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할 수는 없다).
Being 안에서 Being의 회피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있는 무엇입니다.
but that is also what is.
Being이 있거나 혹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Being이 있습니다.
(밧줄이 있거나 혹은 뱀처럼 보이는 밧줄이 있습니다)
(참나가 있거나 혹은 주체·나와 객체·세계처럼 보이는 참나가 있습니다)
(의식이 있거나 혹은 생각과 감정과 몸과 물질처럼 보이는 의식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거나 혹은 低俗하고 世俗처럼 보이는 진리가 있습니다)
(진짜가 있거나 혹은 가짜처럼 보이는 진짜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있거나 혹은 세상 만물처럼 보이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부처가 있거나 혹은 중생처럼 보이는 부처가 있습니다)
(생각과 습관과 패턴을 固執하면 苦痛이 생겨납니다) ...
개방성이거나 혹은 속임처럼 보이는 것.
(無經界이거나 혹은 境界線에 속는 것처럼 보이는 無經界)
그냥 있는 것의 경이로움과 단순성이 있거나 혹은 우리 기대의 限界처럼 보이거나.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고, 모든 것은 이미 Being입니다.
Being은 Being이 아닌 환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知幻即覺)
그러나 그 환영이
증발하여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 다음
그것과 더불어 죽는 것은
分離, 자아 정체성,
알려고 하고 되려고 하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지속하고자 하는
희망과 노력 같은 물 건들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一種입니다...
결코 發生한 적이 없는 어떤 것의 끝입니다.
Being은 과업도 아니고 使用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가 아니고
혹은 어떤 곳에 도달하기 위한 길에서 사용될 수 있는
영적 수행, 실습, 혹은 도구가 아닙니다.
Being을 과업 과 연결하는 생각은
마치 그물로 공기를 잡으려는 생각만큼 헛됩니다.
Being은 있고 그리고 있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아무 데도 도달하려고 試圖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어떤 곳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으로 있는 그것을
찾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Being입니다.
“I” am being appearing as a search for that which is already everything.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는 없으면,
삶은 꾸미지 않고,
열정적이며, 있는 全部입니다.
이것은 自由落下, 가득 찬 삶,
내 삶이 아니고, 누구의 삶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삶입니다.
Being은 천국을 지구로 내려보내거나
혹은 지구를 천국으로 들어 올리지 않습니다.
송두리째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입니다.
All is nothing being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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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n and Unseen
보이고 보이지 않고
이것은 깨달음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직접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光輝라는 것을 선언하는 책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努力, 정화의 길, 과정 혹은
어떤 종류의 가르침도
우리를 거기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개된 비밀은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노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그것은 살아있는 무엇의
재발견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의 개념, 혹은 개념들의 집합도
깨달음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말(words)을 통해서
이미 있는 것의 再發見과 경이로움을
공유하고자 하는 시도는,
건포도 푸딩 조리법을 쓰고는,
누군가가 그것을 읽고
그 맛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헛된 과정입니다.
언어로 하는 疏通은 단지
理解를 표현할 뿐인 것처럼 보이고,
내가 느낀 것에 대한
내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가장 重要하고,
그리고 이해를 가능케 하는
통찰력을 풀어줍니다
(생각에서 느 낌으로,
느낌에서 의식으로).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것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그것은 다른 感化力과 背景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고 말해져 왔습니다.
나와 함께 이것을 나누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것에 이름표를 붙이고
box 안에 집어넣고 치워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재빨리 발을 질질 끌며
그들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삶은 그렇게 단순치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그것의 모두를 아우르는 본성과 함께,
單純함은 이 啓示(열어 보임)가
나를 놀라게 한 가장 멋진 특성 중 하나입니다.
“깨달음은 시간이 걸려”
혹은 “이런 종류의 접근”을 고려하기 전에
다양한 과정들을 경험할 필요가 있거나
혹은 어떤 믿음들을 實現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력, 희생
그리고 修練(discipline)을 통하기보다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激烈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듣고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날뜁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이 洞察은
傳達(communicated)되고,
그것은 목표달성, 믿음, 길
혹은 科程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고 계속 공유됩니다.
왜냐하면, 그것 은 있는 모두고
누구도 그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홀로 서서
그냥 있는 그대로기 때문에,
言爭하거나, 立證되거나,
꾸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못 알아봐지고 拒否되거나,
혹은 알아봐지고 살아짐으로 남아있다.
It can only remain unrecognized and rejected, or realized and lived.
토니 파슨스,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