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방금 여기에 오면서 고속도로를 지나치며 운전할 때 나는 “나는 지금 여기에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탈했을 때는 운전하는 것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당신이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나?
답변 :
그렇지 않다. 당신은 당신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차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해탈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Being : 아는 “내”가 존재하니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실재하지 않는 것의 죽음, 끝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분리된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무엇 또는 자기가 하나(임) 안에(at one)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차를 운전하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연그대로 작용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자들은 뇌가 “나”를 고안한다(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를 운전하는 것이 일어난다. 어떻게 내가 운전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판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 :
그렇다면 ‘그것’은 “나”로부터 “나 없음(無我)”으로 관점의 변화이지 않은가?
답변 :
그렇지 않다. ‘그것’은 관점의 변화가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결코 실재하지 않았던 환상의 외관상의 끝으로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외관상의 끝)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실재하지 않았으므로 외관상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해방시킨 제한된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그것’을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위의 말(그것은~보인다)이 당신이 그것(묘사하는 것)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말이다. 그렇지만 제한된 에너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깨우침이 누구도 아닌 자에게(for no one) 일어난다.
출처 : "This Freedom", Tony Pars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