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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y Parsons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21|조회수17 목록 댓글 1

당신은 당신이 찾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전부(everything)로부터의 탈출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군가가 이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모든 것이고 전체라면 어떻게 누군가가 ‘있음’을 획득해야 하는가? 

 

무슨 일이 외관상 일어나고 있나?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당신이 숨 쉬면서, 이것을 보면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일어나서 이 방을 걸어 나간다면 그것이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현재 말하고 있는 것을 정말로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실재의 들음이 있다면 그것이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당신이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 다면 그것이 ‘이것’일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남은 없다. ‘있음’으로부터의 벗어남은 없다. ‘있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재 있는 것인데, 방이 있고, 의자에 앉아있는 몸이 있고, 자기의 손을 흔들고 있는 Tony parsons(저자, 이 글은 모임에서 말한 것을 적은 것이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혁명적인 메시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글쎄 당신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정말로 들린다면, 근본적인 비밀이 어딘가에서 들린다면, “당신”은 ‘그것’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들린다면 ‘이것’이 드물고 혁명적인 메시지라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분리와 같은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을 재발견(원래부터 있던 것을 발견하는 것)하는 것이다. 분리된 사람은 없다. 다른 것이라는 것은 없다.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분리될 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이고 전부이다. 찾고 있는 것은 잃은 적이 결코 없다. 

 

그렇지만 전체 안에서 분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오 나는 한 사람이야. 나는 확실히 분리된 사람이야. 나는 한 개인이야. 그리고 내 어머니, 아버지, 신부님(목사님, 스님), 선생님, 사장님, 아내, 남편은 나는 더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분리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 그리하여 나는 계속해서 더 좋고 나쁜 것을 찾아다닌다. 몽상가가 창조된 것이다. 

 

몽상가는 겉보기의 분리된 개인이다. “나는 한 사람이다.” 그것이 몽상가이다. 그리고 그 몽상가는 분리되어 있다는 꿈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몽상가는 모든 사람이 “이것은 너의 삶이야. 이것은 더 자신이 소유한 삶이고 너는 삶을 좋거나 나쁘게 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어. 너는 실제로 좋거나 나쁘게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라고 말하는 몽상가들의 세상과 더불어 성장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요즘에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에 것들은 답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그 느낌에 대해서 불편함이 있다는 앎이 생긴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 무언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종교를 찾아갈 수 있고, 치료요법을 찾아갈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곳이라도 찾아갈 수 있으며 그 상실의 느낌을 채우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깨달음의 스승을 찾아가 그 상실의 느낌을 채우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 사람들은 “그래요. 당신은 분리된 개인이에요.”라고 말한다. 당신은 감옥에, 무언가 찾을 필요가 있는 분리된 사람이라는 몽상가의 감옥에 갇힌 채로 지낸다. 그러나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그것이다. '이것'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이 자리에 외관상 분리된 개인으로 왔다. 당신이 행동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당신은 무언가를 찾으면서 거기에 지금 앉아 있다. 그것이 이미 ‘이것’이다. 무엇이 외관상 일어나든지 간에 ‘이것’이다. ‘이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든지 간에 이 방에 있는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에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 일어날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어남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공간(space)이다. 이것은 텅 빔(emptiness)이다. 이것은 어떤 것도 아닌 것(nothing)이다. 이 방에 앉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생기는 것이 신체 감각, 소리 듣는 것, 감정들을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결코 무언가를 생각한 적이 없다. 어느 누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고, 감정을 느끼는 일이 일어나고, 이 목소리를 듣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삶의 일어남(삶의 벌어짐, life happening)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음(aliveness)이다. 살아있음은 있음(beingness)이다. '그것' 외에 어떤 것도 없다. 갑자기 앉아 있는 모든 것, 살아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도 당신에게 살아있도록 가르칠 수 없다. 오직 있음(being)만이 존재한다면 누가 당신에게 존재하도록 가르친다는 오만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누가 당신에게 변해야 한다고 말할 오만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오직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면서 모든 것(everything)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이해를, 사람의 가슴과 마음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말은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가리키고 있고,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은 마음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분리가 존재한다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환영을 깨뜨릴 것이다. 여기에서 허물어지는 것은 분리된 개인과 같은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물론 또한 허물어지는 것은 행해져야할 무언가가 존재하다는, 무언가를 행할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획득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해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것이 ‘이것’이다. 단순히 이 살아있음이 누구도 아닌 자에게(for no-one)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해탈은 에너지적인 이동이다. 누구라고 하는, 저기 저 바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이라는 수축으로부터 전체(everything)만이 존재한다는 자연적이고 매우 평범한 감각으로 돌아가는 이동이다. 그리하여 그 수축은 전체로 확장되고, 당신이 당신이라고 생각했던 이것(몸과 마음)은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 의사소통은 Tony Parsons(저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Tony Parsons가 소유하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는 것, 개인적인 노력 또는 성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Tony Parsons는 이 방에 있는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다. Tony Parsons는 자기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고 말하는 단지 하나의 몸-마음 유기체(a body-mind organism)에 불과하다.(but 몸-마음 유기체도 '이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곤란한 점은 구도행위 안에서 우리는 전체를 개인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서 나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이것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것이 혼란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것’이고, 이미 지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졌다. 살아있음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있음’은 단순히 지금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자기가 무엇을 찾아야 하고 새롭고 다른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는 이 구도자가 사라지면, 불현 듯 완전한 이완이 생기고 ‘이것’으로 있는(being this) 순수한 기쁨 속으로 빠지게 된다.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고 곧장 ‘있음’(simply, directly being)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관상의 깨어남이 일어날 때 우리에게 “참 재미있군요. 수년 동안 지복과 평화 그리고 제공되는 모든 다른 것들을 찾아 왔어요. 그 모든 세월 동안 그것을 찾았어요. 그리고 제가 깨닫지 못한 것은 제가 찾고 있는 것이 이미 이것이라는 사실이에요. 그것은 항상 이 자리에 있었어요. 그것은 나를 떠난 적이 없어요. 그것은 완벽한 연인(perfect lover)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당신이 질문을 할 때, 당신은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은 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계속해서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것'만이 존재한다는 자각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삶에 대한 완전한 답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삶이 있을 뿐이다.(삶이 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존재하는 삶이 답이다.) 

 

이것은 나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은 단지 유일하게 영원불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묘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재발견이다. 그것의 완전한 단순함은 마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 오후 마음이 ‘이것’과 싸우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음은 스토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구하고 찾는 스토리에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늘 공유된 것은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그것'이다. 



출처 : "Nothing Being Everthing", Tony Pa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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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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