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사람이라는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곤란한 점은, 구도자인 것/추구의 에너지가 우리를 다른 누군가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는 생각에 이끌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력이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으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이 결과를 낳는다면, 우리가 깨달음 또는 해탈이라고 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들었다면, 우리는 노력을 할 수 있고,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해탈하게 되거나 깨닫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들었던 그 길 위에 올라선 이 남자 또는 설교하고 있는 저 여자처럼. 그들은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획득했다. 내가 거기에 가면 그것을 얻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꿈속에서는 깨달음 또는 해탈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당신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는 생각을 강화하는 가르침들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한 개인인 당신은 이제 자기 탐구하기 또는 명상하기 또는 기타 뭐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깨닫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세상 어디든 가서 획득할 무언가를 제공하는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구도자에게 아무것도 전혀 제공하지 않는 타협하지 않는(방편을 쓰지 않는) 의사소통을 찾는 것은 드물다.
이 ‘살아있음(aliveness)’은 ‘모든 것인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being everything)’이다. 그것은 단지 ‘삶의 일어남(life happening)’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경험들이 존재한다. 그 경험들은 ‘텅 빔(emptiness)’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경험들은 자유 낙하하여 일어나고 있다. 그 경험들은 그저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삶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음(beingness)’이다. ‘그것’을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을 소유하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삶인 삶(life being life)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매우 단순한데 그것이 마음을 완전히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 메시지는 너무나 단순하다. 그런데 이미 당신의 마음은 말하는 중이다. “좋아, 그런데...깨달음의 단계는 어때? 내 감정의 장애물들은 어때? 내 차크라들(chakras, 신체에서 기가 모여 있는 부위)은 어때? 그것들은 완벽하게 열려있지는 않아. 내 고요함은 어때? 나는 아직 고요하지 않아. 그리고 나의 에고는 어때?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여전히 에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에고가 약간 축소되었지만 에고가 거기에 여전히 존재해.”(웃음)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 그러한 모든 생각들은 ‘그것’이 어때야만 하는지에 관해서 수업 받은 내용들이다. 에고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에고는 그저 에고인 것일 뿐이다. 생각하는 것은 그저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오로지 ‘있음(존재, being)’만이 존재한다. 그저 ‘있음(존재, being)’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음’을 운영하는 누군가는 없다.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god)은 없다. 계획은 없다. 대본은 없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한 ‘있음’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야할 곳은 없다. ‘있음’은 완전히 온전한 바로 그 ‘있음’이다. 그리고 ‘있음’은 곧장 ‘이것’이다. 즉 “여기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니다. “가야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 몸에 있는 그 ‘살아있음(aliveness)’이다. 순수한 ‘있음(beingness)’, 순수한 살아있음이 존재한다. ‘그것’이 ‘이것’이다. 스토리의 끝인 것이다.
정말로 그것은 단순히 ‘그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도 없고, 어떤 선택도 없다. 어느 차원에서건 선택은 없다. 하나임(oneness)은 둘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임(oneness)만이 존재한다. 이 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는 하나임(oneness)이며, 누구도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숨 쉬는 것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가 피를 순환시키는 것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가 정말로 어떤 것을 행하고 있는가? 아니다. 외관상으로만 함(doing)이 있을 뿐이다. 모름(unknowingness) 속에 외관상으로 삶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질문들이 있을지라도 실질적으로 어떤 대답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답은 없다. 삶이 그 자신의 답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이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깨어남에 관한 놀라운 점이다. 깨어남이 외관상 일어날 때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찾고 있었던 그것은 나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 놀라워요. 그것은 결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하나(the one thing)에요. 알려질 수도 없고 또한 잡힐 수 없는 바로 하나의 영원불변함이에요.” 그리고 하나의 영원불변함이 ‘있음(being, 존재)’이다. 당신은 일어나서 바로 지금 걸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저 걸어 나가고 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있음’을 벗어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음’이다.
이것은 나 또는 당신과 관계가 없다. 나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출처 : "Nothing Being Everything", Tony Pars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