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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y Parsons

분리된 개인이라는 몽상(*)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23|조회수8 목록 댓글 1

‘이것’은 전부(everything)인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다. 이것이 ‘있음(being, 존재)’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음’이다. 그리고 그 ‘있음’안에서, 그 ‘전부’ 안에서 분리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러한 모습(appearance, 외관, 형상) 속에서 자기의식이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자기의식은 인간에게 유일하다. 자기의식은 꿈(몽상, 착각)이다. ‘있음’이 생기고(‘있음’으로부터 생긴 것은 모두 ‘있음’이다. 그래서 ‘있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있음’은 자기가 자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꿈꾼다. 그때‘있음’은 모든 곳에 있는 것을 위하여 모든 장소를 찾아다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Being : 금곡괭이로 금땅을 파서 금을 찾고 있다)

 

‘있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자기의식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있음’만이 존재한다는 발견은 구도자와는 관계가 없다. 그리하여 ‘이것’-우리가 여기에서 의사소통하고 있는-은 당신 또는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나는 당신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획득하지 않았다. ‘있음’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being :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유아기 때는 단지 순수한 ‘있음’만이 존재한다. 바로 그 ‘있음’이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울고 배고파 보일지라도 이것이 ‘있음’이다. 이것은 배고픔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저 울고 있는 중이라는 표현이다. 그러고 나서 그 어린아이의 삶에 분리가 일어나는 순간이 온다. 엄마가 그 어린아이에게 “너는 빌이야. 또는 너는 메리야.”라고 아마 말할 때이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에너지로, 분리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을 때이다. 처음으로 불현 듯 분리되었다는 이 느낌으로 수축된 에너지가 존재하고, 피부가 당신의 한계이고 당신은 그 경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감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삶은 그때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고, 그 순간 그러한 분리가 시작된다. 분리가 시작되면 추구행위가 또한 시작된다. 분리의 느낌이 두려움, 불충분함, 상실의 느낌을 낳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왜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을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그리하여 추구행위가 그 후에 생기고, 구도자는 추구행위 속에서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분리가 존재하는 내내 분리 없음에 대한-집으로 돌아오는 요구-추구행위만 있을 수 있다. 당신의 삶을 잃을 때까지 당신은 늘 왜 그런지를 궁금해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분리의 세상 속에서 자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분리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곳은 분리된 세상이라는 데 동의한다. 당신은 한 개인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잘 돌아가게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이 분리되어 있을 때 배운 기본적이고 단순한 교훈이다. 당신의 삶을 잘 돌아가게 한다는 모든 생각, 어떤 것-사랑, 돈, 권력, 무엇이든-을 획득한다는 모든 생각은 실질적으로 모두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갈망이다. 모든 욕망은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갈망의 반영이다.

 

모든 사람은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곤란한 점은 우리는 커가면서 우리가 개인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우리는 우리가 이 상실의 느낌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왜 상실의 느낌이 있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상실의 느낌에 관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지이다. 그것이 곤란한 점이다. 추구의 모든 곤란한 점은 추구가 분리를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추구는 분리에 동력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체성(wholeness)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전체성을 찾고 있는 분리된 개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깨닫게 될 거야” 또는 “나는 깨닫게 될 수 있어. 나는 깨닫게 될 수 있다고 들었어. 나는 세상 속에서 나에게 자기들이 깨달았고 자기들은 A, B, C를 완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지. 그들은 명상을 했거나, 자기탐구를 했거나, 무언가를 했어. 그러므로 나는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어.”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라는 그러한 것은 없다. 이 방에 있는 어떤 사람도 결코 깨닫게 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근본적인 무지이다.

 

분리의 느낌추구의 모든 근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잠시 동안 잘 돌아가더라도, 밑에서는 조용한 절망이 존재하며 그 하나임(oneness)을 찾고자 하는 뒤로 가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열심히 깨닫게 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깨닫게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인 오해를 가지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남-나는 깨어남이라고 부르는데-은 몽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몽상은 바로 분리된 개인이라고 몽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면에 걸리게 하고, 매우 강력하고, 최면 상태의 몽상이다. 만약 당신이 햄스테드 하이 스트리트(영국 런던의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그 사람들은 “그래요. 저는 한 개인이에요. 저는 선택권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이것저것을 할 수 있죠.”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몽상이다. 그리고 그 몽상이 일어나는 내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러닝머신위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 꼬리를 따라 도는 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주요한 곤란한 점 가운데 하나는 구도자는 하나임(oneness)이 어떤지 모르고, 따라서 끊임없이 기대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깨어남은 하나의 에너지적인 일(happening)이다. 그것은 수축에서 무한으로의 에너지적인 변화이다. 해탈은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부(everything)라는 깨달음을 가져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음(being, 존재)’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음(aliveness)’이다. ‘살아있음’은 ‘있음’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살아있음’이다.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 걸어 들어올 때 문은 쾅 소리가 난다. 의자에 앉아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목소리를 듣는 일, 이 녀석(작자를 말함)이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보는 일 등등.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삶의 일어남(life happening)이다. ‘이것’은 ‘있음’이다. ‘이것’은 마이크로 말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의자에 앉아 ‘있음’이다. ‘이것’은 살아있음이 ‘있음’이다.

 

당신이 바로 지금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은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저 일어나는이다. 삶은 그저 일어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음’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이것’을 가르칠 수 없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가르칠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 숨 쉬라고 가르칠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 존재하라고(있으라고) 가르칠 수 없다. 이미 있음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는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일어나는 일만 존재한다는 인식으로의 변화이다. 완전히 간단하다.

 

‘그것’이 외관상으로 일어날 때 사람들은 와서 말한다. “그 영원한 완벽한 연인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어요. 바로 ‘삶’, ‘있음’이에요.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것’이 어떤지를 다른 누구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알려질 수 없기 때이에요. 나는 당신 Tony(저자 Tony Parsons)에게 조차도 ‘이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어요.”(Being : ‘이것’은 객관대상이 아니다. 세상 만물처럼 상(相, 모양)이 있는 대상은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것, 무(無), 전체, 무한, 하나임이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방편으로 말로 표현했지만 ‘이것’은 알 수 없다. 사실 ‘이것’이라는 말도 틀렸다. 알 수 있는 것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 수도 없고 따라서 모를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생각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이 ‘이것’의 피상적인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 말들을 초월한 무언가의 느낌이 에너지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 느낌을 어쩌면 텅 빔(emptiness)이 있다는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텅 빔(emptiness, 空)’이다. 거기에는 어느 누구도 없다.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삶을 가지고 있었다는, 당신이 삶을 가지고 있다는, 당신이 삶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모든 생각은 그저 사라진다. 카르마, 원인과 결과, 행위, 함, 길들(paths)에 대한 모든 생각은 그저 붕괴된다.(Being :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 메시지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다.

출처 : "Nothing Being Everything", Tony Pa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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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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