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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y Parsons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나”의 필사적인 바람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29|조회수10 목록 댓글 1

질문 :

모든 것이 매우 혼돈인 것처럼 보인다. 불현 듯 나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내”가 존재하면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 정돈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그저 혼돈일 때, 목소리와 육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답변 :

혼돈의 의미는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자기는 이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 모두를 분류해 왔다. 이것은 방이고, 이것들은 사람들이고 나는 한 사람이다. 그래서 괜찮다. “나”는 세상만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세상만사를 아는 것은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실재(reality, 현실)를 회피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세상을 창조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실재는 존재하는 것은 자연그대로이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나”의 필사적인 바람이다. 의식(consciousness)이 의식 자신을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의식이 통제한다는 생각이 그 목표이다.

많은 가르침들이 약속한 최후의 궁극적인 결론은, 명상 또는 자기탐구(self-enquiry)의 보답은 궁극의 해탈이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불현 듯 아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통제하는 것에 필사적이어서 깨달음에 대한 자기의 생각조차 여전히 영적인 “나”가 무언가를 아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안전하다.(알기 때문에) “나”의 최고의 집착은 아는 것이다. “나”는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존하는 앎(present knowing)”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집에 가져갈 어떤 관념을 찾으려 애쓰지 마라. 구도자에게 소용이 될 만한 것은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 판매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이것’을 옳거나 그르게 할 수 없다. 당신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혹은 ‘이것’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없다. 당신은 ‘이것’을 옳게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 당신은 “나” 없음(no “me”, 無我)을 노력해서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 없음이 되려고 애써도 소용없다. 또는 이런 저런 생각을 잡으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

‘이것’에 관해서 놀라운 점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당신이 갈망하는 것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출처 : "This Freedom", Tony Pa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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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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