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What is?
존재란 무엇입니까?
토니 파슨스
All there is is what is . . . but what is what is?
거기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 . 그러나 존재란 무엇입니까?
Well, there is no real answer to that question. However, it seems that
what is could be just what is happening . . . reading these words, sitting on a seat, trees growing, sounds, feelings, clouds or thoughts passing by and so on. In simple terms these events just seem to be what is
happening. But the perspective here is that the essence of what is
happening is an open secret.
음, 그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 . 이 글을 읽으며, 앉아 있고, 나무는 자라며, 소리가 들리고, 감정이 흐르며, 구름이나 생각이 지나간다. 간단한 말해 이런 일들이 마치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관점은 일어나고 있는 것의 본질은 공개 된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It is suggested that what is is oneness appearing as twoness, the absolute being relative. It is the treasure that is longed for and feared most . . .
the perfect lover and the grim reaper. It is of course the ultimate
paradox, being simultaneously nothing and everything.
상대적이면서 절대성인 하나됨이 이원성으로 나타나는 그 무엇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갈망하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보물입니다. . . 완전한 연인이며 잔인한 죽음의 사신. 그것은 물론 궁극적 인 역설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There is no possibility of the essence of what is being described, grasped or known.
그것의 본질에 대해 묘사하고, 파악하거나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The seeker attempts to be aware of or conscious of what is and
immediately that function separates and objectifies and makes solid that which is wonderfully floating, effervescent and ungraspable.
구도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거나 의식하려고 시도지만, 그 즉시 기능이 분리되고 객관화 되어 놀랍게도 떠 다니고, 거품 같으며 파악하지 못한 채 고착하게 만듭니다.
The essence of what is can’t be seen by me and so me never feels
fulfilled because its experiences seem to have something missing.
내게 보이는 것의 본질은 볼 수 없기 때문에 경험상 뭔가 빠져있는 것 같아서 결코 느껴지지 않습니다.
In what is is also what isn’t. This is the wonder of wholeness because
it appears as both simultaneously. Everything that is something is also
already nothing . . . there are not two! Everything is therefore real and unreal, but me experiences everything as only real. Within this illusion me attempts to transform this dualistic and unsatisfactory experience
into processes such as “living in the moment” or “being here now” or
accepting everything as “consciousness”.
도대체 있는 것인가 없는 것 인가. 이것이 둘 다 동시에 나타나기에 온전함의 경이로움 입니다. 모든 것은 모두 이미 아무것도 아닙니다. . . 두 가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실재이며 비 실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실재로 경험합니다. 이 환영 내에서 나는 이 이원적이며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순간에 살기"또는 "지금 여기에 있다" 또는 모든 것을 "자각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However, and again, the wonderful paradox of the play of wholeness
is that the story of me is also what is. All of the dreams and hopes,
processes and religious aspirations are only wholeness appearing as a
separate entity rushing around looking for itself and also hiding from
itself by already being everything. And in being everything, even the
avoidance or rejection of what is is what is.
그러나 또 다른 온전체의 역활에 대한 놀라운 역설은 나의 삶의 역활이 또한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꿈과 희망, 수행과 종교적 소망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 숨어있는 별도의 존재로 항상하며 모든 곳에 존재하는 전체의 표출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 심지어는 회피 또는 거부는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 숨어있는 별도의 존재로 나타나는 전체의 표출일 뿐입니다. 모든 곳에 존재함에도, 심지어는 회피 또는 거부가 웬말입니까.
So what is longed for constantly sings the only song of freedom that
can never be lost or found because it is already all there is.
따라서 이미 잃어 버렸거나 발견 될 수 없는 유일한 자유의 찬가는 이미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염원의 찬송가를 부를 뿐입니다.
------ 평 역 곡 두 -----
A meeting with Tony Parsons
A meeting with Tony Parsons(4th March 2006) With Korean subtitles. 토니 파슨스와의 만남 (2006년 3월 4일) 한글자막 : 봄나무 (wuzue21@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