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에게는 구분이란 것이 없다. 아기가 그 의미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에게는 ‘전일’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갓난아기 때의 우리에게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모래이며, (스스로 그런 줄은 모르지만)하나의 특정한 몸(모래성 하나)에 자신을 국한시키지 않는다. 자라남에 따라 나와 남, 선과 악, 높은 곳과 낮은 곳, 과거와 미래, 원인과 결과 등에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전일’을 잃어버렸다.(그렇게 보인다)
성인의 세계관은 자기 몸과 마음에 제한되어 있다는 우리 느낌에 맞춰진 것이다. 성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구분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진다. 하나의 모래성이 다른 모래성들로부터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모래성이나 같은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하나하나의 모래성은 다른 모래성과 별개의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갓난아기의 개방성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아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개인을 벗어난 이 세계관이 구분 안 된 ‘있음’의 열려 있는 주의력이다. 바닷가 모래의 한계 없는 성질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모래밭도 우리의 모래성도 모두 같은 모래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다 같은 모래”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래가 우리 ‘있음’의 바탕이며, 우리 인생의 불빛이며, 우리를 구성하는 근본 재료다. 남들의 모래성도 마찬가지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의 본색이다. “나”와 “남”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관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있음’으로서)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런데도 자기 본성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들 중에는 자기 모래성을 키우는 데만 계속해서 노력을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각자의 행로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어느 날엔가 금메달을 손에 넣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언제가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깨달음을 바라는 것이지만, 진정한 영성은 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을 오르는 데는 특정한 길이 없다. “장차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겠다”는 믿음의 문제점은 개인적 사고, 판단적 사고, 시간종속적 사고에 근거를 둔다는 데 있다. 세 가지 사고방식 모두 사회의 조직에는 실용적 가치를 가진 것이지만, ‘해탈’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비생산적 특성을 가진 것이다.
경계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사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탐구와 이해로도 이런 사실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화면 영상의 화질을 개선하는 데 달린 일이 아니라 영상 속의 ‘빛’을 알아보는 것이다. 어떤 영상이 떠오르고 있는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출처 : "THIS IS IT(The Nature of Oneness)", Jan Kerssc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