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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Kersschot

죽음, 누구의 죽음인가?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05|조회수39 목록 댓글 1

우리 몸 안에 산다고 여겨지는 인물로 자신을 규정할 경우, 우리는 도저히 피할 길 없는 법칙 아래 놓이게 된다. 우리 모두 죽음이 집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라는 상식적인 법칙이다. 언제 죽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죽는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죽음이 비록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종말인가 하는 것이다. 불이 그냥 꺼져 버린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우리가 소멸되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졌다면 다른 해결책은 없다. 한번 죽으면 게임은 끝나 버리는 것이다. 심장이 뛰는 걸 멈추고, 뇌에 산소가 부족하면 그 즉시 영화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은 소멸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영혼은 어떠한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의 인격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로부터 내생과 환생에 관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가 파생된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모를 때일수록 우리는 그런 마음의 게임으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덮어버리려 들기 쉽다.

죽을 때의 느낌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의 형상이 ‘있음’ 속으로 환원되어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 지금 주어져 있는 ‘있음’이나 우리가 죽을 때 기다리고 있을 ‘있음’은 똑같을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 필름은 다 돌아갔지만 ‘빛’은 그냥 켜져 있는 것이다. ‘있음’이란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필름이 다 돌아갔다고 해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불멸이라는 점도 무한성의 한 측면이다. “내”가 순전히 관념이라는 것이 명백하다면 탄생과 죽음 역시 관념인 것임에 틀림없다. 물의 본성이 습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다. “나”라는 관념이 사라질 때, 죽음은 마치 얼음이 한 잔의 물로 녹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래성 비유를 마음속에 떠올려 보면, 모래성이 서로 다른 모양이기 때문에 다른 모래성과는 분리된 채(그렇게 보인다)로 각자의 모래성에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각자는 정말 자기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자기만의 모습을 가진 자기만의 신체를 이 세상(으로 보이는 곳) 안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들, 특히 촉감과 시각의 결합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확인해 준다. 우리는 모두 별개의 존재로서 자기만의 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라고.

그것이 오페라가 펼쳐지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우리(누구?)가 자기 자신을 몸과 마음에 동일시하는 한 모든 게임은 리얼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는다면 어떨까? 얼음 속에 존재하는 물이 자신이 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배우들 속의 빛이 근본적으로는 배우가 ‘빛’이라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어떨까?

우리가 모래성이기 이전에 모래 자체임을 이해하는 순간, 분리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체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도 역시 관념이다. 우리의 본성, ‘있음’은 한계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영화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연기를 할 수가 없다. 모래성이 무너지면 모래밭만이 남고, 모래성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다. 먼지에서 먼지로, 모래에서 모래로 돌아간다.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본성, 모래에게는 죽음이 없다. 몸과 마음의 결합이 ‘있음’의 바다위에서 파도 하나가 꺼지는 것처럼 풀려나는 것일 뿐이다. 같은 모래이기 때문에 모래성이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완전한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성, ‘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돌아가고 어쩌고도 없다. ‘빛’이 ‘빛’을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인물은 사실 없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개인과는 관계없는, 비개인적인 ‘해탈’(impersonal Liberation)인 것이다.

출처 :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THIS IS IT(The Nature of Oneness))", Jan Kerssc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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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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