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있음(beingness)’이 왜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JK(Jan Kersschot): 단지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게도 그냥 ‘있음’입니다. ‘있음’(의식, 존재, 불성, 마음, 본래면목, 공적영지, 진공묘유, 무한, 신, 하나임, 전체, 빛, 생명 등등으로 불린다)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고(doing)”있기 때문에 마술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어서 우리가 전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요. 단지 의자에 앉아 있거나 여기 씌어있는 단어들을 읽으면서 심사숙고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지 당신은 알 수 있나요? 단지 듣고, 앉고, 숨 쉬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나”는 필요 없습니다.
질문: 듣고, 앉고, 숨 쉬는데 “내”가 필요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비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인가요?
JK: 제가 말하는 동안, 중립적인 감각기관(neutral receptor)으로 제 말을 알아듣는 동안 당신 자신에 관한 심사숙고 또는 영적 탐구에 관한 어떤 기대감도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지 않았나요?
질문: 그랬습니다.
JK: 그리고 그 때 당신 에고의 특질 또는 특성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셨나요?
질문: 아니요. 듣고 있는 동안 에고의 특성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의자에 앉아 당신의 말을 노력 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하고만 있었어요. ‘단순한 매일의 의식(simple everyday awareness)’ 그거예요.
JK: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지요. 이것을 하기 위해 연꽃이 그려진 의자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지요. 머리를 깍거나 오렌지색의 법복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질문: 영적인 사람이 될 필요가 없군요. 신성하게 행동할 필요도 없군요. 그것은 단지 일상의 의식하고 있음(ordinary aware beingness, 일상의 알아차리고 있음)이군요.
JK: 고통스럽거나, 실망하거나, 기분이 좋거나, 안정되어 있거나, 평화롭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있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당신은 2분 내로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것입니다. 당신의 평범한 매일의 의식이 이미 ‘그것’입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없어요. 그것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이 갈 데가 어디 있나요? 그것을 찾기 위해 당신이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질문: 갈 데가 없군요.
JK: 한번 그것이 명확해지면, 옛날의 습관과 기대는 사라집니다. “심적으로 좀 더 평화스러워 지거나 영적인 영웅과 같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아. 난 이것을 위해 좀 더 착해져야 돼.”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계속해 온 당신 머릿속 앵무새는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질문: 어제 저는 제 남편(처)과 싸웠어요. 그 이후 저는 생각했죠. “ 나는 아직 거기에 있지 않아. 나는 항상 평화 속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저는 그러한 규정지음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JK: 그런 종류의 생각에 먹잇감을 줄 필요가 없지요. 생각과 싸울 필요도 없고요. 끝도 없으니까요.
질문: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이 전부이군요.
JK: ‘있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도 일어난 것이 아니다(nothing is happenig)”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거나, 게을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아니군요.
JK: 사회나 주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으로서 당신과는 상관이 없어요. 삶은 자동적으로 계속 됩니다. 완전 모험이 될 수 있어요. 삶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수많은 생각, 감정과 느낌이 매일 지나갑니다. 당신이 좋아하건 말건, 당신이 통제하길 원하건 말건 삶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화는 계속되고, 장면은 지나가고, 자막은 나타나고. 그렇지만 감독은 없어요. 자연 법칙이 겨울과 여름, 밤과 낮, 더위와 추위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위성은 태양주위를 돌고, 아원자입자는 움직이거나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것 모두 삶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삶은 그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Pantha Rei).”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항상 움직이죠. 강물처럼.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아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제행무상(impermanence of things)이라고 하죠. 헤라클레이토스는 상대되는 것들은 동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높고 낮음, 밤과 낮, 여성과 남성, 모두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입니다. 편협한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면 언제나 절묘한 균형이 있어요.
질문: 도교에서는 음양의 조화라고 하죠. 하얀 지역에 검은 지점이 있고, 검은 지역에 하얀 지점이 있어요. 하얀색은 검은색 속에 포함되어 있고 검은색은 하얀색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저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항상 균형이 존재하죠. 그리고 그것이 항상 새로운 모양을 취해요. 음양의 상징인 원은 항상 회전하는 것이지요.
JK: 맞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아볼 때 삶은 그저 흐르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노력 없이. 그래도 모든 것은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질문: 도교에서는 이것을 무위라고 하죠. 행위자라는 느낌 없이 행위 하는 것입니다. 숨쉬기 위해, 먹기 위해, 말하기 위해, 일하기 위해 “내”가 필요 없어요. 자연법칙이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JK: 이것으로부터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 좀 더 부드러워지죠. 좋은 순간이나 나쁜 순간에도 아주 잘 지내는 것이지요. 즐거운 생각을 좋은 것으로 즐겁지 않은 생각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거든요. 당신의 인간적인 감정은 즐거운 순간을 좋아하지요. 몸과 마음이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요. 검은색을 나쁜 것으로 하얀색을 좋은 것으로 딱지 붙이는 경향은 점차 줄어듭니다. 마음 속에서만 딱지표(label)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당신 자신을 과거나 미래에 투영하는 경향은 여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영적 구도 행위는 힘을 잃게 되지요.
출처 : "Beyond", Jan Kerssc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