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눈을 감고 우리의 ①인격(자아)이 거주하는 장소를 생각해 보면,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우리 신체의 기능은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자아를 찾아보려 하면 찾아지지 않는다. 자아라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형상(하나의 관념)일 뿐이기 때문에 몸 안에서 아무리 해도 찾아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이른바 ②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혼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얼마든지 많은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영혼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음속의 형상(하나의 관념)으로서 이외에는......
그러면 ③‘있음’이란 것은 어떠한가? ‘하나’가 살고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진정한 ‘본색’은 모든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자체로는 우리의 탐구하는 마음에게 포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있음’은 우리의 뇌 속 어딘가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형상도 아니다. 모든 형상이 나타나는 ‘공간’, 그것이 바로 ‘있음’이다.
우리는 통상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우리 몸속에 살고 있고, 우리 생각을 작동시키며, 영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가정 아래 살아간다. 이 가정이 무너질 때 우리는 “나”에 관해 아껴 오던(소중히 여기던) 생각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에 녹아들게 된다.
“나”가 모습을 감출 때 남는 것을 “이것”이라 한다면, “이것”이란 “우리의” 주의력에 나타나는 것이며, 그보다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러면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친밀감을 일상생활에 대해 느끼게 되는데, 그 친밀감을 느끼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계선이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에 입각해 본다면 “친밀감”이란 말도 꼭 적절한 것은 아니다(“적절”이란 말 자체도 적절한 것이 못 된다. 적절 여부를 판단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적절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적절한 것도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진리, 또는 더 높은 곳이나 더 좋은 곳을 향한 특정한 경로가 올바른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아무런 통제, 동기(목적), 선택의 느낌도 없이 만사는 그저 일어날 뿐이다. 몸-마음의 이분법도 무너져 버리고, 업보와 환생에 대한 믿음도 모습을 감춘다. 선과 악의 분별도 녹아 없어지고 남와 남을 구분하는 마음도 자취를 감춘다. 남게 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누구의 눈을 통한 것도 아닌) 명징한 관찰뿐(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관찰자는 없는 것이므로 관찰뿐이다)이다.
출처 :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This Is It : The Nature Of Oneness)", 얀 케르쇼트(Jan Kerssc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