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human being)으로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human)의 관점과 존재(being)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personal) 접근법, 두 번째는 보편적인(universal) 시각이다. 이 두 가지 접근방식이 어떻게 다른 관점과 다른 대답을 야기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인간의 관점(1)은 자아(the ego), 몸과 마음과의 동일시와 관련된 것이다. 바다의 파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공간과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 에고는 탄생과 죽음 사이의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마음은 다음 단계, 다음 직업, 다음 관계, 다음 목표에 집중한다. 그리고 목표는 개인마다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고유한 유전자 코드, 프로그램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수년간 서로 다른 의견, 신념, 바램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계속해서 목표에 적응해야 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인들은 의미와 목적에 대해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은 아직 에고와 그렇게 동일화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고, 거룩함과 악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들이 해변에서 놀 때,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다. 인생은 놀이이자 춤과 같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이름표(label)를 붙이지 않은 채 그 순간을 살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두 번째 관점을 가져다준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존재의 차원'(2)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공동의 장(field)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 것이다. 그것을 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물의 축축함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어떻게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파도로서, 바다를 알아볼 수 있을까? 파도는 어떻게 자신의 축축함을 감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늘 주어져 있는 ‘있음’을 알아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않을까?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어떤 신념, 공상, 전해들은 말에 구애받지 말고 함께 살펴보자.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고, 과거에 믿었던 모든 생각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나는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있다. 그 '있는 그대로의 있음(naked isness)'이 바로 내가 가리켜 보이려는 것이다. 단순히 ‘있는 것’. 단어를 빨리 읽어 치우지 말고, 이 단순한 ‘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잠시 시간을 가져보라. 이 단어들을 “읽고 있음”의 감각이 있다. 그것이 '내가 있다'는 미묘한 감각이다. 그것은 당신 개인과 동일화하기 전에 존재하는 ‘현존’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있음’을 없앨 수 없다. ‘있음’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하고(do)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무한한 공간 같은 것이다.
이제 이 ‘있음’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있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 ‘공간’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 그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있음’에는 어떤 구분이 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부디 내 말을 믿지 말고 확인해 보길 바란다. 우리는 개인적인 지각은 있지만 개인적인 ‘있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naked being)' 또는 ‘있음’은 개인을 초월한 것이지만 개인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있음’은 개인(의 이해)을 넘어선 것이다.
그래도 여러분은 이 ‘있음’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있음’은 대상, 행위,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가리켜 보일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다.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있음’은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성이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본성의 핵심이 될 수 있을까? 세포에 새겨질 수 있을까?
‘있음’은 마음에 포착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키기 위해 은유(metaphor)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바다의 파도처럼, 우리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파도로서(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이 바다의 현현이며, 동시에 우리는 이 바다의 축축함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개인으로서의 표출(1)은 훨씬 큰 것(2) 안에서 펼쳐지는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광대한 공간이 내가 가리키고자 하는 것이다.
더 넓은 '관점'(2)에서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대답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의미라는 것은 개인, 미래, 목표의 세 가지를 전제로 한다. 개인에게는 이 세 가지가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있음’에게는 이 세 가지가 중요하지 않다. ‘있음’은 개인, 시간, 목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있음’은 판단하거나, 꼬리표를 붙이거나, 뭔가를 바라지 않는다. 파도(1)는 이 모든 개념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지만, 바다(2)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 ‘있음’은 계획이나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삶 속에서 또는 삶의 주재자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삶은 모든 것을 포용하며 어떠한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린애 같은 놀이이다.
삶 자체는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꽃은 왜 향기를 내뿜는지 묻지 않는다. 삶은 마치 시간을 잊은 춤처럼 자연스럽게 아무런 애씀 없이 흘러간다.
출처 : "excellencereporter.com", Jan Kerssc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