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함(clarity)과 관련해서는 “내”가 갑자기 사라지는 체험이 실질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 갑자기 명확해 졌다. 그러한 체험은 몇 초 혹은 십수 년 지속될 수 있지만 그 “나”를 있는 그대로(단순히 관념으로, “나”는 관념으로만,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내”가 돌아오면 실망감과 재차 동일화된 인격으로의 갇히는 감각이 생기게 된다. 동일화된 인격으로서 “깨달음”의 욕구가 더욱 생겨난다. 그리고 구도의 불안과 긴장감 속에서 퇴보했다는 감정이 생긴다.
이제 나는 삶의 모든 부분이 거대한 연극임을 안다. 끊임없이 앎(knowing)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앎은 “나”라는 관념과 “나”의 스토리로 나타나는 모든 다른 생각의 최면 상태 속에서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인 우리의 본성은 앎(awareness)이면서 동시에 모습(appearance)이다.(Being : 앎이 있고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앎이 곧 모습이다. 즉 경계는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 “나”는 다른 모든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장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를 꿰뚫어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구도행위와 긴장감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삶이라는 연극에서 “나”를 꿰뚫어 보는 것은 반드시 갑작스러운 사건(happening)으로 일어날 필요가 없고 서서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된다. 급작스런 지복감 속에서 보다는 자연스러운 존재의 편안함이 부드럽고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혼란은 없어졌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체험이나 갑작스러운 “나”의 떨어져 나감이 나의 본성이 ‘의식’임을 확인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의 삶의 전부와 “영적” 구도행위는 ‘의식’ 안에서 연극으로 생겨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이 모든 문제, 왜 “영성”과 “깨달음”과 단순한 명징함이 혼동이 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본성에 대한 각성은 어떤 종류의 체험과도 관련이 없다. 어떤 종류의 체험도 명징함(“나”와 생각의 스토리를 꿰뚫어 보는)없이 일어난다면 쉽게 혼란스러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정원에서 일어났던 체험은 분명히 특별한 의미도 없었고, 어떤 다른 체험과 다른 체험이 아니었다. 체험의 발생은 단순히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고 이미 나인 것에 대해 내가 얼마나 “확인”하기 위해 미묘하게 체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명징함(clarity)은 “나”의 부재 또는 존재와는 상관없다. 이제 나는 “내”가 등장하면 “나”를 단순히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Being : 개인인 "나"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이며, '의식'은 전부이고 무한하다. 모든 경험과 체험의 주체와 객체는 '의식'이다)
출처 : "Already Awake", Nathan G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