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없다
니르말라(Nirmala)
감사의 말 5 ┃ 추천의 말 8 ┃ 머리말 11
1 머리에서 가슴으로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것 찾기 15 ┃ 생각의 참모습 28 ┃ 마인드 게임 31
개인의 것은 없다 40 ┃ 앎과 알지 못함 43 ┃ 하나인 근원과 다양함 57
가슴을 내 삶의 안내자로 63
2 진실에 가닿기
진실의 특성 67 ┃ 욕망 70 ┃ 영적인 갈망 77 ┃ 정체성의 가면 벗기 79
정체성의 형성 83 ┃ 자기 이미지를 넘어서 87 ┃ 거짓에서 진실로 90
다 내맡김과 의지의 확대 93
3 존재
투명성 101 ┃ 특별한 것은 없다 111
하나인 근원은 이미 여기에 있다 113 ┃ 무 134
4 의식이라는 신비
주의 기울이기 141 ┃ 진실 말하기 151 ┃ 현재에 존재하기 156
그저 “예”라고 말하라 160 ┃ 사랑과 두려움 168 ┃ 매 순간의 죽음 172
거대한 신비의 특성 176 ┃ 공 183
5 고통의 끝
있는 그대로를 욕망하기 193 ┃ 욕망의 본질 200
에고 205 ┃ “왜” “어떻게”를 넘어서 209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222
의식의 운동 228 ┃ 순수의식과 자의식 232
6 신비와의 만남
공식 없이 살기 239 ┃ 호기심과 쉼 243 ┃ 정직함 251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에서 춤추기 254 ┃ 행위와 무위 256
느낌 껴안기 265 ┃ 자기탐구와 헌신 270
미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 274 ┃ 스승을 향한 헌신 275
7 두 가지 간단명료한 가르침
보물 283 ┃ 수행 284 ┃ 알아차림 287 ┃ 허용하기 296 ┃
현존하기 306
8 깨달음
깨달음과 자유 317 ┃ 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319
깨달음 이후의 삶 323 ┃ 고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지점 326
진실을 살기 329 ┃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332
죽음과 마주함으로써 자유로워지기 340 ┃ 사랑에 빠지기 342 ┃진리에 헌신하기 348
9 질문으로 살기
질문으로 살기 355 ┃ 자기탐구 359 ┃ “나”라는 지각 362
나는 있는가 365 ┃ 존재의 기준점 이동 369 ┃ 자기 이미지와 실체 372
죽음 375 ┃ 판단은 의식을 축소시킨다 381
우리가 부여받고 있는 삶 394 ┃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398
거부와 욕망 400 ┃ 자의식 401 ┃ 알아차리기와 허용하기 405
“더 좋은 것”이라는 신화 409 ┃ 기꺼이 하고자 하는가 416
지금 여기에 있으라 426 ┃ 희망 없음 430 ┃ 전체 진실 말하기 437
사랑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441 ┃ 모든 것은 완전하다 442
차갑고 건조한 당신의 손길
그럼에도 내 가슴을 덮히네.
밤하늘보다 더 텅 빈 당신의 눈
그럼에도 내 방어를 뚫고 들어오네.
존재하지도 않는 당신의 몸
그럼에도 당신의 춤 너무나 아름다워
나 눈물 속에 빠져드네.
침묵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말을 할 수 있는가?
텅 빈 공간은 어떻게 그토록 충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가?
더 많은 것을 좇는 것은 참으로 헛되니
오직 더 적을수록 만족스러우리.
이미 사랑은 사방팔방 널려있다는 것을
머리는 도달할 길 없는
목표를 좇아가느라 분주하지만
가슴은 알고 있다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이미 쉬고 있다는 것을.
머리는 최종 깨달음이라는
정지된 지점에 도달하려 애쓰지만
가슴은 알고 있다네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요하고 영원한 용오름에
우리가 이미 안겨 있다는 것을.
머리는 마음껏 활개치며
자유롭게 사랑할 만큼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하지만
가슴은 알고 있다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피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이미 사랑은 사방팔방 널려있다는 것을. - 13쪽-
머리에서 가슴으로
"나에 대한 생각들은 다른 모든 생각이나 기억과 마찬가지로 유동적이며
무정형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여전히 "나"하고 부르는 뭔가가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합니다. 몸은 분명 물리적인 실체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몸은 지칭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가리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정교한 이야기를 가질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걱정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가리키는 어떤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자기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기 위해 덧 기운 수많은 기억들일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은 정말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미지"라는 말은, "나"란 "나에 관한 생각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 19~20쪽-
당신의 자기 이미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생각일뿐입니다....듣고 있는 존재, 생각하고 있는 존재는 분명있습니다만 누가, 무엇이 그 일을 하고 있나요? 바로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진다면, 당신은 "나"라고 부르는 그것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감각 정보를 알아차리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혼자만의 독백을 듣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만들어내는 자기 이미지를 알아보고 그것들에 기만당하지 않는 그것은 누구일까요? "나"라는 생각까지도 포함한 그 모든 생각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이나 두뇌 속에서 그것을 찾아낼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린 그것에 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생각하고, 보고, 느끼고, 몸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신비'가 존재합니다. 이 거대한 신비는 '의식(awareness)'이라는 근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21~22쪽-
"나"라고 불리는 그 영화를 지켜보는 것이 "당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거기에는 이 '의식'에 의해 불이 켜지게 됩니다....
이 산만한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끝없이 변해가는 생각과 감각들을 경험하고 있는 이 신비한 밝음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그 모든 경험에 현존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경험 주체는 가지도 오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이러저러한 존재라는 우리의 환상이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우리는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그것을 완전히 감출 어떤 방도도 없으며,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그것에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은 이 삶을 절대 엉망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삶을 돌보지 않는다면 삶이 결딴나버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삶을 돌보아온 것은 "우리 자신"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어떤 것도 결코 이루어낸 적이 없는 "나"라는 환상을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삶의 매순간을 실제로 살아온 이 '거대한 신비'를 믿어야 할까요? - 23~24쪽-
문제는 생각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거기에 얼마나 사로잡히는가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어떤 것으로 오인하면 생각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라고 불리는 이야기는 우리가 반복해서 듣고 또 듣는 레코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임이 분명해. 왜냐면 이건 나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하는 거니까." 생각의 이런 습관적 성격은 우리를 안심시키고 달래줍니다. 하지만 조금만 솔직해진다면 당신이 "나"라고 불리는 그 이야기를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나"라고 불리는 생각의 특별열차를 잊어버리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도 '의식(awareness)'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을 경험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또한 당신이 경험한 뭔가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일어난 무언가일 뿐입니다. - 25~26쪽-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자신'이 선택을 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선택은 항상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내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
생각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봅시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지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생각을 해야겠다고 선택하면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생각이 나는 것입니까? 단 한 생각도 당신이 해야 하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다면, 그것을 과연 "당신의"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당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을 당신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것입니다. 생각은 그저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생각의 본래 성격이 어떠한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그리고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의 생각들 중 어느 정도가 진실입니까? 그것들은 과연 믿을 만한가요?
당신의 생각들이 대부분이 거짓이고 믿을 만한 안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그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실체가 없는 것들로 지금 이 순간의 풍요로움을 빼앗길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과 지금 이 순간의 차이는, 환상과 현실의 차이와 같습니다...사실 생각은 우리 자신과 지금 이 순간 사이에 환상의 층을 형성해, 구름처럼 현실을 덮어버립니다...
생각이란 "지금"의 깨어진 사금파리 한 조각 같은 것일 뿐이어서,
거기에 너무 집중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놓치게 됩니다.
- 28~29쪽-
마음(분별심)을 악당으로 몰아붙이기는 쉬운 일입니다만,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머리로 분별함으로써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악당으로 몰아가면 우리는 마음을 마음으로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모든 이들이 이것에 대한 지각(sense)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은 숨겨진 무엇이 아닙니다....
라디오는 CD플레이어와는 다릅니다. CD플레이어는 당신이 원하는 곡을 들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지만, 라디오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이 나올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행복한 노래가, 어떨 때는 슬픈 노래가, 어떨 때는 신나는 노래가 나옵니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라 불리는 이 라디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당신 개인과 무관한 것이라는 인식은, 일어나는 것들에 훨씬 더 쉽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줍니다.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기에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과,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을 인식하는 무엇 사이에 어떤 경계가 존재할까요?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무엇은 경험자체와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요?...노래들도 이 '거대한 신비'로부터 흘러나오고, 듣는 행위 또한 똑같은 '거대한 신비'로부터 흘러나옵니다.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존재(Presence)'라는 거대한 마당이 있습니다. - 37~42쪽-
당신이 실제로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앎보다) 이 더 뿌리깊은 (이 순간의) 앎을 외면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앎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입견이나 예단없이 "여기에" 존재할 때, 왠지 알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매 순간 우리는 "지금"이라는 '알지못함'의 장소로 되돌아가며, 바로 그때 지금을 "만나기"위해 앎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금 이 타고난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하고, 피가 온몸을 돌게 하고, 온몸의 세포가 제 할 일을 하게 합니다. .....
여태까지 당신이 가장 지혜로웠던 순간은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깨어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의 진실에 깨어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앎은 지금 이 순간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이 둘은 늘 함께 도착합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나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 당신이 하게 될 말과 행동을 미리 헤아리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 45~47쪽-
좋은 소식은 심지어 당신이 그것을 신뢰하기 이전에도 이 뿌리깊은 앎이 내내 완벽하게 작동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신뢰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내맡길 때 그렇지 않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일이 어떤 식으로 되어야만 한다거나 어떻게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생각들에 매달린다면, 이 타고난 지혜는 그래도 여전히 당신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지만, 거기에 대해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까닭에 그만큼 당신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이러한 타고난 지혜는 당신이 더하거나 행하거나 통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체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말든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마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신비하게도 앎이 나타납니다. ... 애쓰지 말고 욕구나 계획같은 것을 다 놓아버리고, 깨어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보십시오. 그런 것들 없이 깨어있을 때 앎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어떤 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식으로 더 이상 애쓰지 않으면, 당신은 온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고통도 받지 않게 됩니다.매 순간 절벽바깥으로 걸음을 내딛는 기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비로운 현재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을 테니까요. 이곳이야말로 정말 생생히 살아 있는 실재하는 장소이며,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삶 전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 마음이 생각하는 자유와 다를 수 있습니다. 자유를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방식이든 아니든) 저절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얼마나 더 자유로운지 알아차리면, 당신은 기분 좋은 놀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47~48쪽-
누군가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게 됩니다. 생각과 느낌이 바로 병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들에 관심을 주지 않게 되고, 그러면 그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제껏 당신 삶을 좌우해왔던 방식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립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참된 느낌이나 이해에 도달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고집합니다. 하지만 참된 느낌이나 이해같은 것은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느낌이나 이해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진실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을 뿐입니다. ....
이해를 못하면 마음은 아주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마음은 한시도 편안해본 적이 없기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이 불편함에 대해 그냥 무신경해져버립니다. 이해는 중독물질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얻은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 술이나 마약처럼 당신은 바닥을 쳐야 하고, 이해를 얻기 위해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털어 넣어야 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할 때,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 그럴 때 당신은 올바른 이해나 생각을 찾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모든 생각과 이해가 왔다가 가버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그저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자비로운 '신성한 존재'에 머물면서, 그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 49~51쪽-
이해나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보라고, 그 느낌의 '근원'을 찾아보라고 요청하고 싶습니다. 이해를 그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여기에 항상 존재하는 고요하고 광대한 공간을 느끼도록 당신 자신에게 허용하곤 하는 그 무엇을 '근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모든 것을 알아내려고 애쓰거나 좋은 느낌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광대한 공간을 느끼는 것이 누구 또는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광대한 공간을 느끼고 있을 때나 반대로 존재의 미약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누가 무엇이 현존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선연하게 이해했을 때나 혼돈에 휩싸였을 때, 누가 무엇이 현존하고 있습니까? 그 모두에 항상 현존하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그냥 살펴보기만 하십시오. 당신이 "막혀있다"고 부르는 상태라고 해서 거기에 더 열등한 의식이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막혀 있다는 느낌이나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여전히 광대함과 미약함 모두를 알아차리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방금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것 곧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것과 놀리고 있는 것 사이에 어떤 경계가 실제로 존재합니까? '의식'속에서 당신은 이런 경계를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의식'은 어느 쪽이든 다 존재합니까? ... 재미있는 것은 답은 결코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질문과 더불어 아주 즐겁게 노는 것입니다. -51~54쪽-
어떤 것이 뇌에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낡은 뉴스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앎의 본질입니다. 앎이란 언제나 과거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앎은 살아있음이 가고자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삶이 일어나는 장소는 바로 '알지못함'입니다. 알지 못함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알지못함'의 장소와 만날 때, 마음은 그것이 깨달음이나 '진리'일 리 없다고 결론 내려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돌아서서, 대신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알지 못함'과 맞닥뜨리면 우리는 무슨 짓이든 하고 싶어지지만, 바닥이 없는 것 같은 이 '알지 못함'을 그냥 인정하거나 반가이 맞아들여 보십시오.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으므로... 자신이 알지 못함을 인정하면 편안해집니다. 그냥 잠시 지금 여기에서 쉬어보십시오."나는 알지 못한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풍요로운지,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러져가고 있으며 스러져가는 그것들을 대신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있는지 그냥 알아차려보십시오.
하지만 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것을 머리로 헤아리려고 애쓰는 상태로 되돌아갈 필요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임Oneness'을 가리켜 보이는 영성모임에 우리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까닭은, 차이들은 아주 명백히 드러나는 반면 하나임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임과 다양함many-ness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처럼 보입니다. 이 역설을 넘어서는 길은 차이가 반드시 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둘은 다르지만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 55~57쪽-
마음은 이 손가락과 저 손가락, 이 몸과 저 몸을 분별하는 일을 잘 합니다. 그것이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란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일을 하도록 완벽하게 고안되어 있으며, 그런 능력으로 의식에 아주 훌륭히 봉사합니다.
이 사실을 볼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임'을 인식하는 다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가슴the Heart'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의" 가슴이라고 하지 않고 정관사 the를 붙여서 가슴이라고 했습니다.가슴은 서로 이어져있고 그래서 오직 하나의 가슴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가슴에는 소유격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여기 하나 안에서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근원'이 인식되면 차이들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됩니다.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진리'를 원래부터 알고 있는 현존하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가슴입니다. 가슴은 '하나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여기 이 하나가, 여기 이 가슴이, 모든 다양성과 모든 상태와 모든 느낌과 모든 생각의 근원이 현존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 57~58쪽-
어떤 생각을 생각으로 인식하기만 하면 생각은 치워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항상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한 '하나임'을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리는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이며, 항상 그래 왔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을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우리가 몸/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과 감각에 집중하도록 얼마나 잘 조건지어져 있는지를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느낌은 온전한 진실일 수 없습니다....느낌은 '하나임'을 받아들이는 데 적절한 도구가 아닙니다. 생각 또한 '하나임'을 알기 위한 적절한 도구가 아닙니다. 생각과 느낌은 그것들이 잘 하는 분야에만 쓸모가 있습니다. ...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하나인 근원'은 생각이나 느낌과는 상관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옳은 답을 아는 것처럼 거기가 어디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거대한 신비'가 있으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거대한 신비'의 일부만 느끼더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당신은 이 푹신한 의자를 더이상 '거대한 신비'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의자의 형상에서 '거대한 신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인간, 하나의 느낌, 하나의 생각이나 판단 등 온갖 모습으로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거대한 신비'를 실감할 것입니다... 아무리 달라보여도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 60~62쪽-
진실에 가닿기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의 진실은, 진실의 특성이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침으로써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가진 한 가지 특성 또는 지표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확대시킨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욕망은 뒤쪽으로 물러나서 점점 더 덜 중요해지고, 우리의 개인 영역도 점점 덜 끼어들게 됩니다...
진실이 가진 또 하나의 지표는, 우리 존재를 고요하게하고 휴식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은 몸과 느낌과 마음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진실을 말할 때, 우리의 전 존재는 편안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과 느낌과 욕망도 상대적으로 고요해집니다....
진실한 경험은 또한 경험에 대한 견고함과 실재성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은 현재 순간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오직 이 순간만이 만족할 만한 실재성을 갖습니다....그러므로 진실한 경험이 가진 또 다른 특성은 깊은 만족감을 안겨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진정한 자양분을 얻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늘 좋은 기분만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우리의 바람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각을 확대시키므로 그것 자체가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우리 존재를 편안하게 하고 확대시키고 가슴을 열어주는 반면, 진실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만 좁게 초점 맞추어져 우리는 긴장과 갈등, 불안과 초조, 불만족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알아내려고 분주해져서 이리저리 날뛰고, 우리 느낌은 과연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안절부절 못합니다. 욕망에 휘둘리면 우리의 내면은 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원하는 것에만 좁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 67~69쪽-
욕망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만 좁게 초점 맞추어져 우리는 긴장과 갈등, 불안과 초조, 불만족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알아내려고 분주해져서 이리저리 날뛰고, 우리 느낌은 과연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안절부절못합니다. 욕망에 휘둘리면 우리의 내면은 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원하는 것에만 좁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진실이 가진 최대 강점은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짓은 고투와 애씀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모든 것을 동원하기 일쑤입니다. 진실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경력 자체를 깨끗이 지워서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구조를 전혀 변화시킬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한 것만이 남아서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지 전혀 말할 거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생각과 느낌 뒤에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십상입니다. 욕망은 우리의 생각을 몰아가고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욕망을 채우는 것은 더 많은 욕망으로 우리를 이끌 뿐입니다. 우리는 대개 뭔가가 불편하여 약간의 안도감을 얻으려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쓰지만, 그런 정도의 만족은 욕망의 불꽃을 더욱 자극할 따름이지요.....
욕망하기는 현재 순간을 향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실이 가진 확고함과 실재성이라는 특성이 없습니다. 욕망의 대상은 늘 현재에 있지 않은 무엇입니다.(이미 여기에 있는 무엇을 욕망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요.) -69~71쪽-
욕망하기라 불리는 이런 의식의 축소가 일어날 때,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입니다. 욕망하기라는 그 순간의 "경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하기의 "경험"속에는 거짓의 온갖 특성들이 난무하지만, 우리의 주의는 거기에 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것에만 온통 쏠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끝내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욕망하기의 경험을 의식하는 순간, 즉각 우리는 그 경험의 악취로 가득 차 있음을, 전혀 유쾌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욕망하는 대상의 부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욕망으로 불타고 있을 때 그 불타오름을 의식하게 되면, 불타오름은 제풀에 타서 없어져 버립니다.원하는 것을 원하지 말라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한 바람 자체를 경험하십시오. 그러면 그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71~72쪽-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욕망이 없어지기 전에 찾아옵니다. 결국 욕망은 자연스레 점점 더 잦아듭니다. 병적인 거짓말쟁이인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될 것입니다. 욕망도 그와 같습니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조용해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거짓에 속지 않으면, 그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아무 상관도 없어집니다. 바로 거기에 자유가 있죠....
욕망의 거짓됨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못할 때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우리는 그것이 행복의 근원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때라도 그 행복은 지속되지 않으며, 약간의 행복은 더 많은 욕망을 야기해 욕망의 중독성을 자극할 뿐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마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따름이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욕망의 고통에 시달리느라 진이 다 빠져, 결국 그런 환상 자체가 닳아 없어져 버립니다. -73~74쪽
욕망에 대한 진실을 알려면, 욕망에 대한 생각을 살피지 말고 욕망 자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욕망에 어떤 조작을 가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욕망 자체를 경험하십시오.....
우리는 욕망을 억누르거나 만족시킴으로써 욕망을 품는 것의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애쓰느라 늘 바쁩니다. 욕망을 그냥 경험해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욕망의 실제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그것은 누구의 욕망입니까?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잠시 살펴만 보십시오. 욕망을 들여다보면서 그냥 거기에 있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욕망이 생길 때마다 당신은 갈가리 찢겨 분리되는 기분이 듭니다....당신 스스로 욕망의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 그것은 당신에게 늘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은 당신이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때만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욕망 아래에는 더 진실한 욕망이 자리합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것입니다. 진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망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므로, 이를 실현하면 지극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76~77쪽-
진리에 비하면 당신이 원하는 무엇을 얻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이 순간의 편안함이나 불편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인 근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참자아(self)'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장 참된 갈망조차도 휴식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망들을 태워버리는 심오한 불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이것 또한 영적인 옷을 걸치고 있는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근원'에 대한 갈망은 근원과 분리되어 있다는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미 '하나의 근원'자체인데 말입니다.
갈망의 경험자체보다 갈망의 대상(하나의 근원, 자유, 깨달음)에 계속 집중하면, 당신은 그보다 더 피상적인 다른 것들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겪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욕망이라도 당신의 존재를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기꺼이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진리를 바라는 욕망 또한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하나입니다.....
한 순간 하나인 근원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할지라도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 더 많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나인 근원이나 깨달음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원하는 것 또한 다른 욕망들과 마찬가지로 가망없는 일임을 보게 될 때만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갈망이라 할지라도 갈망의 경험이 아니라 갈망의 대상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갈망의 경험 자체에 집중하면 갈망은 활짝 열려 고요해지고, 우리는 평화라는 우리 존재의 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77~79쪽-
"나"는 한 마디로 거짓입니다. 우리는 "나"라고 부르는 이 정교한 건축물을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고 지각하는 것으로 짓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모든 거짓을 당신에게서 빼버린다면 진실만이 남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빔"자체입니다.
진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거짓된 자아가 녹아 없어져야 함을 의미하므로,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꺼이 거기에 머물고자 하면 그때는 뭔가 다른 것이 텅 빈 곳을 채우는데, 그 무엇인가가 바로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곧 모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이것과 이것과 이것과 이것. 모든 것이 이것일 뿐 저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곧 당신이라는 진실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이제 자유롭습니다. 이것도 나고, 이것도 나고, 이것도 나임을 깨닫는 것은, 그래요. 자유를 선물해주지요. 거듭거듭 당신 자신을 만나는 여기에 커다란 기쁨이 있습니다. -87~90쪽-
우리가 에고라고 부르는 탐욕과 저항이 취하는 모습 중 하나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입니다.에고가 삶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시도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절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은 전 지구인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는 그 경험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 당신은 삶이라는 것이 좋은 일과 궂은 일이 갈마드는 현장임을 보기 시작합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도 다소 좋은 점이 있고, 일자리를 얻어도 다소 나쁜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소식에도 좋은 소식이 따르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진실을 보는 것은 이런 양극 식 사고가 주는 폐해를 제거해줍니다....
어떤 결론을 둘러싸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더 큰 진실을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고통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으로 의식의 범위가 좁아질 때마다 당신은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내리는 결론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에 상관없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정도가 곧 당신 고통의 정도를 결정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경이로운 존재라는 결론조차도 고통과 수고와 갈등의 장소가 됩니다. 자신은 세상에 보내진 신의 선물이라 결론 내렸다 해도 당신은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세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일단 당신이 자신의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그러니까 진실 쪽으로 향하면, 당신은 거짓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진실만이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번 맛을 들인 후에는 그것이 무엇을 집어삼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진실에 맛을 들이면 당신 존재와 관련된 무엇을 집어삼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만족을 주는 유일한 것이고, 자양분을 주는 유일한 것이고, 실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은 진실이 무엇을 집어삼키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의 집 자체를 집어삼키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실이 삼키는 것은 "당신의" 집이라는 그 소유 개념입니다. 진실이 삼키는 것은 "당신의" 인생이라는 그 생각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 주변에 울타리를 칩니다.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 주변에 경계선을 긋습니다. 진실이 찾아오면 그 울타리를, 그 경계선을 먹어치웁니다.
이 진실의 장소에 머물려면 당신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욕망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당신으로부터 진실한 것을 앗아가는 것들입니다. 진실의 장소에 머물면 고통이 없습니다. 진실은 항상 당신이 원하는 것,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고통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값 세일같은 것은 없습니다. 시즌이 끝날 때를 기다려 반값으로 살 수 있는 요행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가격 정책은 아주 단순합니다. 많은 것을 넘겨주면 많은 고통이 사라집니다. 적게 넘겨주면 적은 고통만 사라집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져주기를 바란다면 다 내맡겨야 합니다. -92쪽~94쪽-
많은 이들이 열린 마음, 확대된 마음을 경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 너머를 보기 때문에 생각에 의해서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습니다. 또 열린 가슴, 확대된 가슴을 경험하는 이들도 많습니다.이처럼 가슴이 확대된 상태에서는 감정에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정서 상태에 의해서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지요. 또한 의지의 확대를 경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의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확대된 의지, 신의 의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지요.
한편 의식의 확대가 의지의 확대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매우 현명하고 자비로울 수 있지만 오로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은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게 합니다. 대단한 지혜와 자비심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신이 이 쇼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협소한 개인 의지를 지닐 수가 있지요. 이런 개인의지는 심지어 열린 가슴과 열린 마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과 마음의 확대를 경험하면서도 의지는 아직 확대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존재의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면서도 왜 그런 경험이 곧잘 사라져버리는지 의아해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내맡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확대가 어느 깊이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말이죠.
마음이 확대되어 있다면 정서 상태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 의지가 사라지고 신의 의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개인의 욕망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94~95쪽-
개인의 의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태껏 "당신의 의지"가 취해온 모든 입장은 정확히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언제나 신의 의지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오랫동안 거기에서 빗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모든 것을 내맡기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그저 알아차려 보십시오.
신의 의지는 지금 이 순간 당신 몸이 숨을 쉬도록 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신의 의지야말로 당신의 전 생애를 살아 있게 해온 바로 그것입니다. "내 의지"라고 불리는 분리된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주를 운행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욕망이 아닙니다. 당신의 의지보다 훨씬 더 큰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의지입니다.이를 알아차리기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건, 모든 행위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심지어 코를 긁적인다거나 울고 웃는 행위 속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신의 의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당신이 바로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든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의 의지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기만하면, 당신의 욕망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전히 존재하긴 하겠지만 훨씬 더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도 행복하고, 얻지 못할 때도 똑같이 행복합니다. 당신의 바람과 욕망이 아무 상관없어질 수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겁니다. -95~97쪽-
존재
모든 맛
모든 감각
모든 가능한 기쁨이
끝없는
의식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으니,
이 의식은 내 심장을 뛰게 해
꿈을 좇게 한다.
이미 실현된 꿈을.
궁극의 상태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아무런 저항없이 아무런 지체없이 만날 만큼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바꾸거나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 개인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모든 것이 당신의 존재로부터 나와 당신의 존재를 통과하여 그저 유유히 흘러갑니다. 당신이 마치 투명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투명하다는 사실을, 당신의 존재 자체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당신이 애써 막으려고 해왔던 일어나는 모든 것 또한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이미 투명하다는 사실을 그저 알아차리기만 해보십시오. 당신의 방어와 저항은 지금껏 하나도 제대로 먹혀든 적이 없습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당신의 방어만 투명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관념과 이상, 결론과 믿음, 의심과 걱정 또한 투명합니다. 이런 것들 또한 실체가 없습니다. -99~102쪽
당신의 방어만 투명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관념과 이상, 결론과 믿음, 의심과 걱정 또한 투명합니다. 이런 것들 또한 실체가 없습니다. 이중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대한 당신의 결론이나 관념을 예로 들어봅시다.
"나는 절대 짝을 찾을 수 없을 거야." "나는 절대 깨닫지 못할 거야." .. 이런 것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못 일어나게 실제로 가로막았던 적이 있나요? 이것들은 전혀 실체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관심과 주의를 쏟는다면 당신은 실재하는 것, 진실한 것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런 변장이나 환상들 중 다른 것들을 가로막거나 누군가를 속일만큼 견고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관념일 뿐이니까요. 어떤 것도 우리를 실제로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투명합니다.
당신은 투명해지기 위해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이미 투명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명성은 당신이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신의 됨됨이 자체입니다. 당신의 자연스러운 존재상태 그대로 입니다.....
관념이나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이상이나 관념을 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에 관한 진실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몸이 있는 한 수많은 관념과 이상, 느낌, 욕구는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그것들이 텅 비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그것들에 더 이상 애를 태우지 않게 되는 거지요. -102~105쪽-
투명성을 보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관심과 주의를 그것들에서 참된 것으로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의 관념들, 의심들, 두려움들은 당신을 그냥 통과해 지나가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념들, 의심들, 두려움들 역시 그렇게 지나가버립니다. 그런 것들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실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실체가 없음을, 투명한 것임을 당신이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당신 존재의 진실이 환하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순수한 존재의 표현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는 거지요. 관념, 믿음, 결론, 의심, 두려움의 구름은 더 이상 당신의 순수한 존재를 가리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은 투명성이라고 부르는 이 궁극의 상태를 사실 한시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결코 무로부터 실재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습니다. 지금껏 당신은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고, 어느 시점까지는 그런 노력이 재미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이 게임에 지쳐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거나 "당신 자신"이 뭔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 관념에 시달리다 탈진해서 쓰러지게 됩니다....
뭔가 실재한다고 당신이 믿는 한 그것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텅 빔에는 모든 것을 위한 공간이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투명함을, 당신의 관념과 생각과 느낌 중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105~106쪽-
만일 모든 것이 이 투명한 존재함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당신은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려고 애쓰기를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일어나는대로 놔두지 않고 달리 경험하려고 애쓰는 일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성공과 실패 그 어느 것도 존재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또는 그 사이의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당신은 다가오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즐기게 됩니다. 어떠한 안내자도 목표도 없이, 어떤 것도 피할 필요없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한번 살펴보십시오. 일찍이 당신의 자유를 위축시켰던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자유의 표현이었습니까? 이 자유 안에는 성공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위한 자리가 넉넉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갖는 개념들은) 실재하지 않는 경계를 창조합니다. ...경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마음과 언어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당신만의 특별함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경계없이 어떻게 특별할 수 있겠습니까? 다 새어 나가버릴 것이고, 어느 곳에나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담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더 이상 특별할 수 없습니다.
-110~111쪽-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일에 당신이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마음이나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제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당신의 진정한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정직해지십시오. 진실해지십시오.
경계선을 긋고, 개념화하고, 생각과 느낌과 욕망 또한 경험으로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은 고통을 낳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결국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관념도, 어떤 정체성도, 어떤 경험도 붙들어 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변하기 때문입니다.진정한 만족은 진실을 보는 데 있습니다. 진실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어떠한 경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 우리의 모든 갈등,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한 가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특히 우리 모두가 분리된 존재들이라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단순한 오해를 푸는 해독제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관념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하나인 근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말은 '하나인 근원'에 대한 체험을 가리켜 보일 수만 있을 뿐 그것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인 근원'에 대한 "관념"을 추구하기 일쑤입니다. '하나인 근원'이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이지요. -112~114쪽-
분리된 한 개인이라는 관념은 진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끔찍한 행위든 아무리 고상한 행위든, "당신"은 어떤 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분리라는 관념조차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당신을 통하여 이 게임을 해온 것입니다. 분리되었다는 이 거짓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전체는 "당신"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곧 전체니까요.
비분리의 진실을 보기만 하면 고통은 끝이 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곧 전체임을 보게 되면 당신은 어떤 경험을 피하려 들거나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이 멋지겠지만, 당신이 이미 경험자체기 때문에 좋고 나쁨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당신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불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당신은 이미 모든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당신은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곧 당신이기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17~118쪽
분리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분리가 없을 뿐입니다. '하나인 근원'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표현하지만 그 모두가 '하나인 근원'입니다. 서로 다르니까 분리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오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가려움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나는 고통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고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나는 고통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는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면 뒤따르는 판단들은 어느 것이든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것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무엇이 다가오든 당신이 그것과 정말로 함께하도록 해줍니다. 고통이든 사랑이든 말입니다. 그 모두가 당신임을 깨닫기에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외면하거나 달아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
핵심은 고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다른 어느 것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통과 함께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것이 바로 고통을 치유해줍니다. 결국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때문에 상처를 입는 분리된 무엇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날 때, 그 경험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됩니다. -119~122쪽-
인생이 어떻게 굴러가든 당신은 그것을 탓할 것도, 신뢰할 것도 없습니다. 그 모두는 바로 전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전체 우주고, 그러니 그것을 개인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현재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충분히 미친 짓이지만, 과거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로 미친짓입니다. 과거 속에서 헤매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만사가 잘 나갈 때 과제는 그것을 개인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가 잘 나가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공을 돌리곤 합니다. 하지만 좋은 일을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 정말로 당신 자신입니까? 만사가 잘 풀릴 때 과제는 좋은 일을 하는 것 역시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조차 개인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망치려 드는 행위는 일어날 까닭이 없지요....
(모든 일들이) 그저 일어나고 있는 일일뿐입니다....당신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이를 알아차리면 당신은 쉴 수 있습니다. 우주는 실수로 그런 경험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우주는 그런 경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일어나도록 전 우주가 움직이고 변했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고 쉰다고 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서 물러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개하는" 가운데서도 쉴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십시오.
-122~124쪽-
분노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분노가 달라지기를 당신이 원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것 역시 그냥 그대로 두십시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달라지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 진실 자체입니다.이유야 어떻든 이것이 바로 '하나인 근원'이 지금 하고 있는 일입니다...
모든 거짓들은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단 한 가지 거짓을 뒤따라 나온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첫번째 거짓만 꿰뚫어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거짓들은 저절로 사라져버릴 테니까요.....그 어느 것도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만 하면 당신은 즉시 '신성한 존재'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떤 것도 당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쁜 소식처럼 들리겠지만, 더 큰 의미에서 보면 그건 모든 것이 당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입니다. 당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닐 뿐이지요.
-127~131쪽-
깨달음의 첫번째 단계는 신이 "있다" '신성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오한 깨달음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분리가 존재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고 '신성한 존재'가 있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성한 존재'라는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거죠. 왜냐하면 만약 거기까지 나아간다면 "나"라는 것을 포기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한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결정적인 거짓말은 '신성한 존재'로부터 분리된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입니다. 언젠가는 그러한 진실이 "당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만물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당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몸 바깥의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긴다면) 의식은 어떻습니까? 의식은 당신의 몸 바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 손에 대해 가지는 의식은 당신이 아닙니까?
연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의 존재가 어디에서 멈추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당신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경계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경계는 모두 마음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당신과 당신 손 사이의 경계가 어딘지 찾아보십시오. 때로는 이렇게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명백해지면, 당신이 당신의 의식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사람의 의식 사이에도 과연 경계가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132~133쪽-
당신이 당신의 생각으로 느낌으로 욕망으로 경험으로 규정지으려 하는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경험이 당신 뇌 속에 기록될 즈음이면 그것은 이미 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기록된 경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여기에 없기 때문에 그것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솔직한 일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당신의 정체성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것들을 당신의 본질로 생각한다면 그것들이 사라질 때 당신은 고통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본질 또한 공임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그것들이 공으로 돌아가도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공은 새로운 순간이 나타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무엇이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옛것이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충만함은 공과 비움에 의지합니다.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왔다가 가버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정직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공과 가버림은, 유와 옴과 마찬가지로 당신 존재의 진실 중 일부입니다. -136~137쪽-
의식이라는 신비
어떤 말들보다 앞서 지금 여기에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깨어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늘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광대한 '의식'입니다. 경험 도중에도, 경험 이후에도, 경험과 경험 사이에도 그것이 항상 지금 여기 존재함을 알아차리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느낌과 욕망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들 이전에, 이후에 존재하는 이 신비롭고 깨어 있는 '신성한 존재'를 충분히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그중 어느 것도 당신의 참된 본질을 충분히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들에 아무리 관심을 주어도 그것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것들에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다른 뭔가를 더 찾게 만들 뿐입니다....
생각과 느낌과 욕망의 계속되는 흐름 너머를 보고, 그것들보다 훨씬 더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진정으로 믿을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항상 현존하는 것입니까?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어왔기에 너무나 평범하고 친숙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신비입니다.....
영적인 체험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이 신비는 당신이 다른 모든 것을 발견했던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구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당신은 이런 사실에 다소 두렵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신비와 접촉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결국 알지 못한다는 그것이 사실은 큰 위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 순간 속에 '의식'이 "존재할"가능성을 허용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무엇으로 간주되기 이전에, 의미를 띠기 이전에, 문제가 되기 이전에 광대한 의식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경계도 한계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 깊이와 풍요로움을 탐사하는 일을 결코 끝마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것의 아름다운 반영입니다. ... 그 카메라로 수없이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있습니다. 감각, 생각, 느낌, 경험은 모두 이 광대한 의식으로부터 나온 아름다운 산물들이지만, 의식 자체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의 표현물들은 체험할 수 있고, 그것들은 저마다 '거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141~143쪽
당신이 온갖 심리적 영적 기법을 알고 있다 해도 의식이 넓어질지 좁아질지를 당신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이 두 상태를 오가는 의식의 운동은 그냥 일어날 뿐, 왜 일어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모르지만 지켜보며 여기에 머물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냥 일어날 뿐입니다. 여기 이곳은 아주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언제나 거대하고 확대되어 있고 ... 언제나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깨닫기를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깨달은 관점 즉 긍정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알아차려보십시오.... 자신이 지금껏 그토록 애써 찾아온 것 안에 당신이 이미 온통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면 당신은 깜짝 놀라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거대한 신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더 깊이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아주 완전하고 충만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절대 멈추지 마십시오. "이" 새로운 순간의 신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전히 벗겨지지 않은 신비가 존재합니다. ... 그저 살펴보기만 하십시오. 지난번에 당신이 살펴봤던 것보다 '거대한 신비'가 더 있는지 덜 있는지를요. 매 순간 더 많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꺼이 계속해서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대한 신비'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들이 매순간 드러납니다.
-145쪽~150쪽
진실을 말하려면 당신은 있는 것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생각이나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안됩니다. 당신의 주의를 거기에만 한정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당신의 주의를 있는 것 "모두"에 기울이면, 생각이나 욕망은 당신에게 고통을 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식의 본성은, 때로는 '진리'에 온통 집중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오래된 관념, 욕망, 환상, 꿈 같은 익숙한 마당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욕망을 품을지에 대해 선택권이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유일한 선택은 '진리'를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냐, 외면할 것이냐 하는 것뿐입니다. 이 선택은 한 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거듭거듭 하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있는 것"에 다 내맡기는 순간들을 살다가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있지 않은 것"에 관심을 갖곤 합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비를 갖는 것뿐입니다.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펼쳐짐의 일부니까요.
'광대함'은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감각기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광대함'이 스스로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일에서'광대함'은 딜레마에 봉착했습니다. '광대함'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딜레마에 말이죠. '광대함'은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를 찾으러 나설 만한 곳도 전혀 없으므로 환상을 통해 그것을 창조합니다. 환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너무나 익숙해지다보니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합니다. 때로 그것은 너무 깊이 이 경험에 빠져서 '광대함'으로부터 분리된 "당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152쪽~154쪽-
'진리'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은총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아무리 심하게 관념들, 개념들, 욕망들, 신념들, 공상들, 꿈들에 빠져 길을 잃어버려도, 심지어 깨닫게 되리라는 꿈이나 환상에 빠져 길을 잃어버려도 진리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단지 멈추어서 보기만 하면 진리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뜨려진 적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현존합니다.
...... '있는 것'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느껴져야 한다거나 어떻게 들려야 한다거나 하는 모든 선호를 내려놓고, 어떻게 생겼든 어떻게 느껴지든 어떻게 들리든 그것을 허용하십시오. 지금 여기에 '거대한 신비'가 어떤 변장을 하고 나타나든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이 신비 안에 결핍된 무엇이 정말 있습니까?
왜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가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바라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선호와 욕망이 의미를 지니는, 존재 이유를 가지는 유일한 경우는 "나"라는 생각,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과 짝을 이루었을 때뿐입니다. 만일 내가 이 몸이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각들에 대해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내가 생가과 느낌의 특별한 다발이라면, 그때는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완벽하게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다"라는 관념을 계속 믿는 한 고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호는 극히 짧은 시간만 만족을 줄 뿐이기 때문이지요.
많은 이들이 이 "나"라는 생각은 아무것과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발견했습니다. -155~158쪽-
우리는 어째서 이 상상의 "나"에게 충성함으로써 끝없이 고통당하는 길을 기꺼이 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함'이라는 경험과 더불어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라 불리는 놀라운 신비와 더불어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몸"이나 "느낌"등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 신비를 축소시켜서 통제가능한 무엇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대안은 "이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누가, 무엇이 이 생각과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과 함께 어울려 노는 데 있습니다. 대안은 이 '알지 못함'의 장소에서 사는 데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신이 발견되는 곳이고, 현재가 발견되는 곳이며, 이 순간의 전체 진실이 발견되는 곳이고, 살아 있음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알지 못함'의 장소는 매우 생기 넘치는 곳입니다. 누구이고자하는 시도 속에서 당신이 구하고 있던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이 '거대한 신비'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모든 것, 살아 있음의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그것의 입장료는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우리 가슴속 사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속 생각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요구되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 '거대한 신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158~159쪽-
지금까지 나는 무엇이 일어나든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지금 여기에" 그냥 머물라고 권해왔습니다. 사랑이든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안락함이든 불편함이든, 이해든 혼동이든 그냥 "그래. 이것도"하고 긍정하십시오....
무엇이 오든 "예"라고 말하고, 무엇이 가든 "예"라고 말하십시오. 그럼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에너지를 지금 여기에, 현재에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내게 큰 가르침을 주셨던 닐람 선생님은, 이것이 조금만 더 복잡했더라면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이것을 알아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무나 간단해서 오히려 알기가 어려운 거죠. 이건 정말 이렇게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저 모든 것에 기꺼이 "예"라고 말하기만 하십시오.....
뭔가가 환상임을 당신이 진정으로 꿰뚫어보았다면 반복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속도로 저 멀리로 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와도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물이라고 확신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것을 실재라고 착각하지 않으며, 그러면 그것이 나타난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환상은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꿰뚫어 알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진실은 당신의 삶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 순간을 바꿀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 생각을 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다음 순간이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요. -160쪽~162쪽-
우리는 "지금"을 바꿀 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생각조차도 "지금" 속에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항상 "지금" 일어납니다. ....
이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이 이른바 행위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자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단지 지금 속에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합니다. 어디에서부터 나타나는지, 누가 또 무엇이고 그것을 여기에 놓아두는 것인지는 수수께끼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순간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당신의 모든 소망이 거짓인 이유는, 그것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고통을 낳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욕망은 어떤 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와 달라질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욕망은 당신에게 그런 끔찍한 거짓말을 속삭이곤 하지요.
......
마음이 이야기를 지어내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나타나는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지어서 당신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자신의 이야기나 어떤 욕망 속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생겨나는 분리감을 알아차려보십시오. 당신이 살아 있고 실재하고 현존하는 뭔가와 단절되면, 그것은 당신에게 갈망이나 슬픔의 감정을 안겨줍니다.
마음이 이야기짓기에 빠져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사실 그런 이야기 짓기조차 완전한 신비입니다. 무엇이 이야기 짓기를 하고 있습니까? 누가 환상을 갖기로 결정내립니까? 누가 그 환상을 창조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그토록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것은 누구입니까? ....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는 매우 편리한 영적 수행 방식입니다. 방석이나 조용한 장소나 특별한 책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고 무엇을 암송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음식을 가려 먹을 필요도 없고 성스러운 장소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는 당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입 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탐욕스럽고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든 심오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작동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는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현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현재를 떠나는 일에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어디로 갈 겁니까? "지금"이 아닌 다른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애를 써봐도 지금 이 순간을 떠나지 못하는 영광스런 패배를 당신은 지금껏 내내 해온 것입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항복하고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낫습니다. "아니에요. 전 과거 속에서 살래요." 만일 그런 길을 찾으면 꼭 좀 알려주십시오! -164쪽~165쪽-
만약 당신이 기꺼이 '거대한 신비'와 더불어 놀고자 한다면, 당신은 알려진 것의 가장자리나 그것을 조금 넘어선 지점에 존재하는 경이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마음속보다 존재하기에 훨씬 더 만족스럽고 생생히 살아 숨쉬는 장소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혼돈은 사실 좋은 소식입니다. 혼돈과 더불어 머물면서 그것을 다 긍정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그냥 "예"라고 긍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지면서 혼돈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보통 도망치기 일쑤입니다.하지만 "예"라고 말하고 그러한 혼돈 속에 머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이 분주하게 방황할 때 조차도 현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혼돈은 왔다가 가버리지만 의식(순수의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는 옳은 대답도 틀린 대답도 없습니다. 탐사할 여지는 굉장히 많습니다. 의식이 약해질 때도 약해지고 있다는 의식은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정말로 약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의식이라고 불리는 항상 현존하는 이 신비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요? 사랑이 넘치나요? 호기심이 많나요? 생생히 살아 있나요? 이것의 한계는 무엇인가요? 시간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러한 질문들은 당신을 마음(분별심) 너머로 데려갈 수 있지만 의식 너머로는 절대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런 알아차림 속에서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는 덜 매혹당하고,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는 더 매혹당하게 됩니다. 항상 현존하는 이 의식에 진정으로 호기심을 가져보기를 권합니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이 신뢰하거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은 없습니다. -166~167쪽-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는 데 근거하므로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항은 분리된 자아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냉소와 의심은 멀리 거리를 두며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과 분리된 자아가 있다는 지각을 고수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모든 것을 허용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또는 냉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거대한 신비'가 나타나서 자신을 휩쓸어 가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완벽한 연인이 나타나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압도해주기를 기다리듯이 말이죠.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내 전부를 바칠 거야." 우리는 충분히 오래도록 찾고 구하기만 하면 자신을 모두 내어줄 만한 무엇인가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자신을 다 내어줄 만한 '진리'를 지금껏 충분히 맛보아왔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분리된 정체성을 기꺼이 포기하려는 의지입니다.
두려움 없이 의심 없이 냉소 없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의심과 두려움, 냉소와 자만, 분노가 일어나는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물려받은 조건지어짐(conditioning)입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나 충성심입니다. -168~169쪽-
다 내맡긴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괴로움과 두려움을 포기하는 것이 별로 대단치 않아 보여도, 당신이 궁극적으로 지불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사랑이 능히 그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며, 당신은 그저 두려움과 의심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들을 기꺼이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나 의심에 항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거기에만 너무 좁게 초점을 맞추어 사랑에 관해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없이 넓어서 두려움조차 받아들일 정도로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
허용하기는 내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 '의식'의 본질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랑과 분홍을, 너다움과 나다움을 사랑합니다. 그 자체로, 그것의 모든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랑이 존재합니다.
마음(분별심)은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참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에 한 가지 문제만 가질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다 받아들여집니다. 완벽하게 멋진 것들이 이렇게 많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한 가지만을 그렇게도 크고 중요하게 여길 수가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는 이런 마음의 경향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저항이 일어날 때 그것조차 사랑으로 두루 감싸 안는 것입니다.
-170~171쪽-
그 어떤 것도 한 순간만 지나면 한 순간 이전과 동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체성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 양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하고 자기 동정을 품으면서 연속성의 환상을 쉽사리 저버리려 들지 않습니다.....
과거에 당신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난 위안이 됩니다.당신은 이 에고를, "나"라는 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할 가치가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유지해야 할 거짓된 자아가 없는 거기에 있는 그대로의 신선한 벌거벗음이 있습니다.
매순간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깨끗이 지운 칠판처럼 지금 여기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무엇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이 순간 속에 나타나는 것,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버리는 것을 마침내 받아들일 때, 오는 것을 받아들일 자리 또한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세상이, 온 우주가 살아있음으로 넘실대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때는 그중 무엇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나"라고 여기는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이 너무나도 분명해집니다.
수용을 넘어서서 더 나아가기 위해 육신의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당장 수용을 넘어서서 매순간 일어나는 절대적인 죽음과 경이로운 창조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173~175쪽-
모든 것이 왔다가 가버림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조차도, 부정하고 저항하고 슬퍼하고 수용하는 마음은 여전히(아마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그런 것들마저 두루 감싸 안을 만큼 충분히 크고 넉넉합니다.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면 당신은 그저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에 매료된 채 그 모두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이 있는 그대로에 다 내맡긴다면 당신의 에너지는 거기에 저항하지 않을 테니 당신은 그것과 더불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놀라운 점은 거대한 신비가 가진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 커다란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내맡긴다는 것은 사실 다소 과장된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진실인 것을, 당신이 지금까지 줄곧 싸움에서 패배해왔다는 사실을 그냥 인정하는 것일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신비는 우리가 찾아낼 때까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맡겨져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모두 과거시제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그것을 기록할 때면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앎에서는 언제나 꼴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할 필요, 모든 것이 "옳게" 일어나도록 해야 할 필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결국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에 자신을 다 내맡기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176~179쪽-
잘 살펴보면, 생각이든 감각이든 느낌이든 그것의 근원이 한 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돌이켜보십시오. 지금까지 모든 생각, 모든 느낌, 모든 감각이 그냥 갑자기 나타났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라는 것은 기둥서방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모든 공을 자기한테로 돌리려 듭니다......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은 "갑작스럽게" 솟아납니다. 어디에서 솟아난 생각인지 어디에서 나온 느낌인지 그 근원을 찾을 길이 있습니까? 어떤 생각이 나면 그 생각을 "당신"이 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거대한 신비는 절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면 미지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이 흔히 찾아옵니다. 예전에는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됩니다. 편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이 갑작스러움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앎을 놓아버리면 무엇이 남는지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지금껏 알아왔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알지 못하는 미지 속으로 뛰어들어보십시오. 갓 태어났을 때보다도 더 아는 것이 없는 미지의 바다에 빠져 보십시오. 자신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함에 다 내맡기면,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발견되지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당신이 인식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당신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179~180쪽-
당신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텅 비어 있음을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울과 무관심으로 퇴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공 안에도 현존하는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공은 어떤 "것들"의 부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성을 가지며 현존합니다. 공 안에는 너무 명백해서 오히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공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이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대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항상 존재하는 이 경험의 특성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신비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여기에 존재합니다. 다른 모든 것이 스러져 없어져도 이것만은 존재합니다. 그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우리가 '공'이라고 불러온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생각과 느낌과 감각은 모두 공으로부터 솟아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으로부터 솟아나는 것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뒤쫓는다면 우리는 근원에 대해서는 계속 등을 돌리게 됩니다.....우리는 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멋진 탈출구로 보이는 것들을 내내 쫓아다녔습니다만, 그중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공에서 나온 투사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184~185쪽-
사람들이 공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또 다른 이유는 거기에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면 공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나'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뒤쫓는데 있습니다.
의식은 거대한 신비지만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리 찾고 구하고 애써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명백하게 현존하는 것을 찾고 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거대한 신비는 찾고 구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는 있습니다.
...'거대한 신비는 지금 이 순간에만 만날 수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발가벗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것은 날것이고, 항상 현존하며, 생생히 살아 있으며,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공'에 깨어 머물면 수많은 것들이 스러져 사라져버립니다. 삶이 깨끗하게 청소됩니다. 그렇게도 많은 것들이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은 지난날의 낡은 의상과는 달리 정말 풍요롭고 진실하며 생생히 실재합니다. -186~190쪽-
고통의 끝
모든 욕망은 사물이 "지금 상태"와 달라질 수 있다는 관념에 근거하는데,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순간이든 사물이 "지금 상태"가 아닌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 사물은 늘 "지금 상태"로만 존재하는데 머릿속에서만 달라졌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또한 사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거짓입니다. ....
우리는 어째서 "있는 그대로"를 원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요? 너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간단한 일을 꺼려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원하게 되면 거기에는 "내가"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진실로 "있는 그대로"를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바꿀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누군가는 더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역설과 맞닥뜨리는데, 뭔가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당신의 욕망조차도 욕망할 필요가 있는 무엇이라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그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배제하면 안됩니다.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관계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과 진리를 향한 욕망과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욕망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진리를 구하는 것 역시 또하나의 더 미묘하고 정교하고 잘 차려입은 욕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바로 여기 바로 이 시점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어떠한 구함도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193~196쪽-
지금 현존하는 그 모든 고통을 사랑한다면, 고통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저항할 때만 고통은 우리를 친친 휘감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껴안으면 삶은 다음번의 새로운 경험을 자연스레 펼쳐줍니다....
그것들을 껴안아버리면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알고 웃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고통을 베어버리려면 그저 매 순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을 열광과 감사로 맞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날 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실컷 원하고 욕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스스로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러려니 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현존하는 모든 것을 열렬히 껴안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떤 고통을 찾을 수 있는지 직접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198~200쪽-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으니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라고요. 어느 차원의 욕망에 머물러야 할지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도 비극이고 얻지 못해도 비극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그 반대편 욕망을 휘저어 놓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욕망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욕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메커니즘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본질은 이원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욕망을 어쩔 도리없는 것으로 내버려두면 욕망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뿐더러, 욕망이 실현 가능한 해결책이 아님을 실제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욕망에 솔직해지면 욕망의 춤에 가담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임이 밝혀집니다....
'의식'은 (욕망까지 포함하여) 당신이 알아차리는 모든 것을 비추는 빛과 같습니다. 이 밝음은 이런저런 말들을 들으면서, 그 말들에 생각이 휘둘리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지금 여기에 현존합니다. 손전등처럼 그것은 자신이 비추는 것을 선호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쓰레기 더미를 비춘다면 그것은 쓰레기 더미를 밝힐 것입니다. 당신이 예술작품을 비춘다면 그것은 예술 작품을 밝힐 것입니다. 의식은 한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베푸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현명하여 모든 것을 다 기꺼이 비추고자 합니다. -201쪽~202쪽-
에고(ego)에 대한 매우 간단하지만 쓸모 있는 정의는 '여기에 있었던 무엇을 붙잡아두려고 애쓰는 동시에 여기에 있지 않은 무엇을 움켜쥐려고 애쓰면서, 고정시키려 하거나 집착하는 경향'입니다. ...집착하는 이런 경향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 정의에 따를 때 당신의 개성과 타고난 선호와 경향은 문제가 아님을 알아차리십시오. 문제는 집착하는 것입니다....집착이 취하는 형태 중 하나는 동일시입니다. (예를들어, 시골에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을 시골에 사는 사람과 동일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이 그냥 선호하는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처럼 스스로를 시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시에서 살게 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집착을 상쇄해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껴안음입니다. 껴안음은 "있는 그대로"안에서 쉬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 안에서 (그러니까 지금 이 방에서, 마음에서,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안에서)그냥 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
하지만 이런 쉼자체가 집착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방금 말한 "있는 그대로"가 변하는 걸 원치 않는 것은 결국 "지금 있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안에서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생기를 앗아가버립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는 늘 변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문제를 상쇄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호기심 또는 "있는 그대로"에 주의집중하기입니다. ..."있는 그대로"는 매순간 달라지니까요....쉼과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더 미묘한 것은 집착하는 경향 즉 에고라 불리는 이 요괴가 "있는 그대로"의 일부란 점입니다. 에고는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뭔가가 일어나거나 우리가 원했던 뭔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로부터 멀어지려는 그런 움직임이 몇 시간,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일어나지 않는 복된 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특효약은 쉬면서 호기심을 갖고 그것과 만나는 것입니다. 에고는 자신이 어떤 것들을 계속 움켜쥐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의 혼돈된 일부분일 뿐입니다.
집착이 일어나거든 이 딱하고 혼돈에 빠진 에고를 사랑으로, 호기심 어린 열린 가슴으로 만나십시오. 우리가 에고라 부르는 것 안에 무엇이 현존하고 있는지 찾아내보십시오. 이 집착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대부분의 집착은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집착을 통해 어떤 것을 고정시키고자 합니다. 이 종잡을 수 없이 늘 변화하는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뭔가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정체성에 관한한 우리는 나"인" 뭔가를, "여기는 내 땅이다"라고 말하면 깃발을 꽂을 어딘가를 기를 쓰고 찾아내려 듭니다......
뭔가를 고정시키려는 이런 시도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깃발을 꽂으려는 데가 어디든 그 깃발 아래의 땅은 계속 움직여왔으며, 그러니 지금 깃발이 꽂힌 장소는 전에 있던 그곳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발밑의 땅을 끊임없이 흔들어댑니다. 모든 것을 고정시키려 드는 마음의 이런 헛된 시도가, 특히 정체성이라 불리는 이것이 바로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207~210쪽-
우리의 집착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나 즐거움과 동일한 장소에서 나온다는 것은 기이한 역설입니다. 에고와 신의 근원은 동일합니다. 에고와 신 모두 똑같은 것의 표현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존재의 광대함에 비추어보면 조약돌(또는 에고)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질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덜 신성하거나 덜 신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똑같이 신성한 신비일 뿐, 다른 것보다 더 특별한 것도 아니며 덜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그랜드캐니언과 맞먹는 무엇인가를 볼 때도 당신은 기꺼이 탐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멈춰서 여기다 캠프를 차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마음은 그랜드캐니언에 깃발을 꽂으려고 들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보이든 기꺼이 놓아버리고, "누가 또는 무엇이 그것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 합니다.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 당신은 보는 자도 없고, 어떤 있음도 없는 장소에 이르게 됩니다. 봄은 있지만 보는 자는 없습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문제를 가진 자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그 무엇으로도 고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당신"을 위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거기서 뭔가가 되어야 하는 그 어떤 "당신"도 없습니다....
(본성을 체험했던 순간으로 다시금 가고싶은데 어떻게 갈지 몰라 좌절하는 질문자에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절대 거기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당신이 어디에 있었든 그건 과거사입니다.바로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누가 그런 좌절감을 느끼는지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곳을 한때 경험했던 것이 누구인지는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려움은 미지의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좋은 신호입니다. 이 알지 못함 안에 그냥 머무십시오....당신이 알지 못할 때조차도 현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알지못함이 현존할지라도 "봄"이 현존합니다. "봄"이라 불리는 이 신비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봄"자체를 되돌아봐도 보고 있는 누구 또는 무엇은 찾지 못합니다. 당신은 단지 "봄"만 발견합니다. ....
(알지못함은 불편함을 준다는 질문자의 말에) 모든 것의 근원은 관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감독할 수도 없는 무엇임을 발견하는 건, 마음(분별심)에게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가슴'에 맡기십시오. 생생히 살아있고 두번 다시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이 '거대한 신비'의 경험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이 불편한 알지 못함의 상태가 마음이 당신을 데려갈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더 멀리 가려면 마음 이상의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여기 가슴 안에서 쉬십시오. '거대한 신비'에서 비롯된 어떤 것 안에서가 아니라 그 근원에서 쉬십시오. 가슴은 바로 이런 쉼의 자리입니다. 좌절감이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자리가 있다면 대단히 멋질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감의 근원 자리인 여기에서 쉬십시오. 좌절은 지복이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왔다가 가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 모두의 근원자리에서 쉬십시오. 쉬면 당신은 저절로 느낌보다 더 깊은 곳에 가닿게 됩니다. 여전히 느낌은 일어나지만, 당신은 좌절감을 덜 느끼려고 애쓰거나 더 많은 지복을 느끼려고 애쓰기를 멈추게 됩니다.....
좌절감이 믿을 만한 지표가 아니라면 우리는 좌절감보다 더 큰 무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때 중요한 것은 좌절감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 안에서 나타나고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215~218쪽-
이야기에 사로잡히는 것은 곧 고통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해."라고 말하는 이야기조차도 즐거움으로 위장한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그건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요.
"이것은 대단하다"든가 "이것은 나쁘다"라는 개념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를 그만 두면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립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에도 너무 바빠서 고통스러워할 겨를이 없어집니다.
거대한 신비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완벽합니다. 언제나 그 순간에 딱 알맞습니다. 거대한 신비는 그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당신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잘 알아냅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결국 당신은 거대한 신비를 신뢰하기 시작할 것이고,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힘들지만 그 모두가 마땅히 일어나야 할 것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지 못할 때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므로 그건 좋은 일입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당신이 알지못한다는 것입니다....당신은 지금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당신보다 거대한 신비가 훨씬 더 잘 안다는 사실을 신뢰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거대한 신비가 알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생각은 지금 여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느낌도 상관이 없고, 욕망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기록될 때쯤이면 그것들은 더 이상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18~221쪽-
벽을 보면서 눈이 기록하는 것은 매순간 다릅니다. 한번도 같은 적이 없습니다. 저 벽이 하얗다는 당신의 생각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벽에 대해 경험하고 있는 무엇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절대 같은 경험을 두 번 할 수가 없지만, 우리의 개념은 흔히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말과 개념은 당신이 페인트를 사러 페인트 가게에 가야 할 때는 유용합니다. 그런 실용적인 일에는 말과 개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위험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개념을 가지려 드는 중독성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묘사하는 일에 관한한 말과 개념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잘못된 삶의 틀 때문입니다. 삶에 대해 우리가 설정하곤 하는 큰 틀은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무엇이 나에게 좋은 것인가?"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들조차 이런 질문을 하지만 더 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나는' 더 영적으로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는' 더 많은 영적인 경험을 할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는' 깨달을 수 있을까?".....
"무엇이 나에게 좋은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이라도 동시에 나쁜 점이 있으며, 아무리 나쁘게 보이는 것이라도 동시에 좋은 점을 품고 있습니다.또 하나의 더 심각한 결함은 "나"라는 관념입니다. 좋거나 나쁜 경험을 유지해줄 "나"라는 것, "내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안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나침반입니다. 이 나침반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을 정확히 가리켜줍니다. 환상의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뭔가를 "하고"싶어하기 때문에 이 나침반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222쪽~223쪽-
"나"에게 이로운 특정한 길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고통의 원인이며,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잘못된 관념을 녹여 없애버립니다.
모든 좋은 나침반이 그러하듯이, 이 질문은 그것이 가리키는 곳으로 당신이 갈 때만 유용합니다.그것은 항상 "지금 여기"를 가리키고 있고, 그러니 당신은 그것을 따라 지금 여기로, 진실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여기에 이른다고 해서 지금 여기가 항상 매력적이거나 항상 영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더 좋다고 생각되는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려고 더 이상 애쓰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라고 물으면서 "나"를 위한 것을 계속 찾는 한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의 정도는 지금 여기와 우리가 마음을 빼앗긴 것 사이의 거리와 동일합니다....
고통의 끝은 지금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는 즉각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야기를, "나"라는 관념을 포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거리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만이 남게 됩니다.이제 우리는 고통까지도 포함해 이 순간에 현존하는 모든 것에 자신을 다 내맡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고통이라 부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개인의 것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고통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내" 욕망과 "내"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환상이 환상으로 보일 때, 환상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됩니다. -224쪽~225쪽-
'의식(Consciousness 또는 Awareness)'라 불리는 이 거대한 신비의 주목할 만한 특성 중 하나는 비디오카메라처럼 줌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감각, 느낌, 생각 등에 매우 좁게 의식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그런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줌렌즈를 돌려서 의식의 범위를 넓힐 수도 있습니다. 의식이 얼마나 멀리까지 미칠 수 있는지는 사실 한계가 없습니다.....
의식이 가진 또하나의 능력은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욕망, 정체성, 집착 등은 모두 의식의 이런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 고정시키는 이런 능력은 의식의 모든 차원에, 확대된 상태와 축소된 상태 모두에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는 축소된 상태로 고정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슬픔과 같이 의식이 축소된 상태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해, 그것이 우리가 그 순간에 느끼는 느낌이 아니라 "나"인 무엇이라고 여겨 "나는 슬프다"라고 표현하기 일쑤입니다.
줌렌즈가 한껏 뒤로 당겨져서 아름답고 장대한 우주, 멋지고 어마어마한 영역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고정될 수도 있는데, 이는 "영적 에고"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확장된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이 스스로 절대의 경지에 올랐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은 일상의 책임과 의무를 초월했다고 여기는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통증이든 지복이든 뭔가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정말로" 좋은 소식은 다 내맡기는 것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놓아버리기 위해, 다 내맡기기위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영적인 경험이나 확대된 상태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어떤 상태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상태가 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그럴 수 있습니다. ....줌렌즈를 이런저런 위치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아버리십시오. 이런 저런 상태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욕망일랑 던져버리십시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사랑하십시오. -226~230쪽-
근심걱정은 어떤 것을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처럼 주의를 좁힘으로써 생깁니다. 주의를 좁히면 대상이 어마어마하게 커 보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신비'자체가 그렇게 합니다. 거대한 신비는 매우 작은 것을 아주 큰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모든 것을 다 가려버릴 정도로 커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생각을 크게 부풀릴 때마다 당신은 거대한 신비를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육신과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 일단 만사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줌아웃을 충분히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커보이는 줌인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줌아웃된 관점, '절대(Absoute)'의 관점, '하나인 근원'의 관점에서는 더 진실하거나 더 좋은 것이란 없습니다. 처음 줌아웃 할 수 있음을 발견할 때는 대단히 놀랍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전체진실을, '의식'이 줌인 또한 한다는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확대되든 축소되든 문제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의식'을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만들려고 애쓰면서 줌렌즈를 조절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230~232쪽-
목 근육에 경련이 와서 그 증상이 여전히 있는지 하루종일 점검해본 적이 있습니까?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의식은 "나"라는 관념을 끊임없이 다시 들추는 행위입니다."나"는 아직 여기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루종일 "나"를 점검하고 평가하고 반추합니다.
자의식이 고통을 야기하는 이유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자꾸 들추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점검합니다. ...
이런 자의식이 없으면 의식은 매우 일상적이고, 늘 깨어 있으며, 생생히 살아 있고, 고통에서 자유롭습니다. 자의식이 사라지고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순수의식(Consciousness)'을 경험하게 됩니다....운동선수들은 이런 순간들을 '아무 생각없이 뛰었다.' '미친 듯이 뛰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간은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뛰는데만 전념하는 순간들입니다. 의식 전체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만, 경기의 다음 순간에만 집중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렇게 집중할 때 대개 좋은 기록을 남깁니다.
때로는 위급한 경우에, ...... 독서에 몰입하거나 생활에 열중할 때처럼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분명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딜레마는 자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본질상 자의식의 형태를 띤다는 점입니다. 자의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자의식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무엇이든 자의식의 또 다른 층을 쌓는 것일 뿐입니다.
다행히도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 자의식 없음으로 가는 탈출구 또는 뒷문이 존재합니다. 그 탈출구는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니 순수의식을 가지기 위해 자의식을 해소하려 들기보다는, 자기를 의식하는 이 순간에도 순수의식이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심지어 자의식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도 순수의식은 틀림없이 완벽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언제나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식은 가장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런 친구와 같습니다. 아무리 빼앗고 때리고 유린하더라도,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그것에로 돌아서기만 하면 그것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말합니다.
"괜찮아, 그건 다 네가 통과해야 할 과정이었어. 난 너를 이해해."
'은총'과 '의식'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232~235쪽-
자의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의식이 자의식의 덫에 빠지는 일없이 자의식 놀이를 즐길 수도 있음을 알아차릴 기회입니다.
자의식 없음이라는 이 자리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경험이며, 지금 당장이라도, 심지어 자기를 의식하는 순간들에도 충분히 가능한 경험입니다. 고통의 끝은 자의식이 없어져야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의식에 대해서조차 무엇이 진실인지를 기꺼이 살펴 알아차리고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자의식이 현존할 때도 순수의식은 현존하고 있으며, 사실은 순수의식이 바로 자의식 놀이의 설계자입니다. 순수의식은 놀이의 전 영역에서 즐기고 있습니다. ......
신비와의 만남
고통은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순간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간의 간극에서 옵니다....무엇이 어떤 식으로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긴장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도 없습니다. 삶이라 불리는 아름답고 무질서한 것이 언제나처럼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개념과 믿음, 공식같은 것들을 녹여 없애버리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불태워버립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솔직하게 묻는다면 당신이 발견할 유일한 답은, "나"는 환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념은 당신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더 큰 신비와는 어떤 실질적인 상응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당신을 늘 현재 순간으로 되돌려놓는데, 현재 순간은 삶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당신 나름의 공식이나 생각과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라고 불리는 거짓 관념 속에 숨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매일의 일상은 '거대한 신비'이며 (일상과 신비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공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머물 때 우리는 어떠한 공식도 필요없음을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삶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잘 압니다. 거기에 공식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삶은 지금까지 완벽하게 잘해왔지만,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235~243쪽-
마하리쉬의 가르침에서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극도의 단순함입니다. 그는 '참나실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자기탐구로, 나는 이를 보통 "호기심"(무엇이 진실인지 궁금해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 내맡김의 길로, 나는 이를 대개 "쉼(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둠)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니 얼마나 간단합니까!...
다행히 아무리 이리저리 분산시키고 가리더라도, 일단 다 내맡기기만 하면 우리는 즉각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을 가지면 즉각 문이 열립니다. 서서히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다 내어주기만 하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으며, 그러지 않으면 계속 고통스럽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이 언제든 즉각 가능하다는 이 근본 진실은, 우리에게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나기 전에도, 일어나는 도중에도, 일어난 후에도 해당됩니다....이런 진실을 실재하는 현실로 만들려면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만 한 건 없습니다. .....
세상의 모든 스승들이 진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필요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호기심이 충분히 깨어나기만 하면 당신에게는 사실 스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당신을 진리의 근원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때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느 쪽도 진리를 더 많이 체득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 이후에는 스승이 더 이상 진리에 대한 독점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통증을 느끼고 있는가?" "무엇이 호기심을 발휘하고 있는가?" "호기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고 난 후, 다음 단계는 당신이 발견한 것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진리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당신은 그 당신 존재의 진실 안에서 그저 쉬기만 하면 됩니다. 보이는 것에 다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쉼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진실에 다 내맡긴다는 말입니다. -243~247쪽-
쉼이란 그 문을 기꺼이 열고, 발견한 것에 기꺼이 자신을 다 내맡기는 것입니다. 쉼은 '절대진리'를,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이 광대무변한 완전함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사실 절대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쉼을 허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와 완전함은 이미 여기 있으며, 그러니 그것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계시입니까!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고요함을, 지금 여기를 살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내버려둔 채 자기 바깥을 살피는 데 마음 쓰느라 늘 너무 바쁠 따름입니다.
일단 '쉼'을 통하여 '절대'를 보게 되면 거기에 계속 머물고 싶은 미묘한 집착이 흔히 일어나는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보이는 곳에서 누가 벗어나고 싶겠습니까? 이러한 완전함의 발견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 우리 자신을 거기에 붙박이로 고정시키려는 것은, 그곳이 절대 속이라 할지라도 기억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생명을 앗아갑니다.
바로 이 자리가 쉼의 짝인 호기심이 발휘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호기심은 우리가 경험한 신비가 어떤 성질의 것이든 그것을 상하지 않도록 해줍니다....호기심은 우리가 절대의 세계에 연착륙하여 거기에 숨어버리는 일을 방지해줍니다....우리는 "각성"과 호기심이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다소 역설적이지만 " 다 내맡김" 또한 필요합니다. -247~249쪽-
우리는 자신의 온 삶을 진리에 기꺼이 다 내맡겨야 합니다. 진리를 찬미하거나 그 안에 숨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다 내맡긴다는 것은 '텅 빔'속으로, '공'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그것의 관점으로 기꺼이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절대 공'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다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놀라운 경이가 늘 함께 합니다. "모든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그 복잡스러움과 혼란함과 불완전함까지도 전부 사랑합니다. '절대'가 베푸는 이 공평무사한 돌봄은 얼마나 놀라운지요!....모든 것이 똑같이 소중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절대'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를, 당신의 문제들과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떠나는 편도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왕복표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 삶 속으로 돌아와 절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절대로서의 삶"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바로 이 지점이 호기심이 발동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새로운 매 순간순간에만 드러날 테니까요. -249~250쪽-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저는 한계없는 사랑이 언제나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이라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투에 대해서 묘사하기 시작합니다."하지만" 뒤에 이어질 것은 당연하게도 앞에 나온 내용을 부정하는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정직해지는 간단한 방법은 "하지만"을 "그리고"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현존합니다. 그리고..."라고 해야 긍정에서 긍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진실한 모든 것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온전히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온전히 정직해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알 수 없는 진리로 아주 빨리 갈 수 있습니다....진실을 알아차리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함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뭔가 괴로움을 겪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은 "이것은 진실인가?"입니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면 그것은 불길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거짓된 개념은 그 불길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거짓입니다....자신에게 온전히 솔직해지면 우리는 개념들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이 신비인 지점으로 신속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모든 개념을 벗어던져서 벌거벗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해지는 그만큼 삶은 생기 넘치게 됩니다. -251~252쪽_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기에 근거하여 사느냐, 얼마만큼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안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쉬느냐입니다.
진리에 다 내맡기기 위해 영적인 체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런 체험을 한번 하면 멋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 사이사이에,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실제로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에서 진실은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의 가슴을 기꺼이 거기에 다 내어주고자 합니까? 뭔가 새롭고 더 나은 깨달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사랑에 기꺼이 자신을 다 내맡기고자 합니까?......
우리는 대부분 비범한 삶을 살기 위하여 기를 쓰고 몸부림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이런 저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합니다....하지만 비범한 삶은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거나, 그 안에 머무는 길을 찾는다 할지라도 바로 그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비범한 경험이 머무르든 사라지든 우리는 결국 아주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평범한 경험이라도 거기에 충분히 깨어있으면 그것이 곧 비범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평범한 경험에 깨어 있으면 그것은 그 자체의 비범함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어떤 비범한 경험이 일어나도 그것은 곧 다시 평범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평범함이 비범함이 되고, 비범함이 평범함이 됩니다. 이 둘이 서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모든 이원성의 본질은 끊임없이 서로에게로 되돌아가 녹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어떤 경험이 갖고 있는 특별한 내용물은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다른 뭔가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해지는 건 이런 경험이 무엇 안에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53~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