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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의 흔적

[펌] 고흐의 자살에 대한 정신분석고찰

작성자허니문 킬러|작성시간02.10.09|조회수7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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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님 ( ) 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고흐의 자살에 대한 정신 분석학적 고찰




고흐의 자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





이근후 이화여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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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고흐의 정신 장애와 자살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되어 왔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와 정신장애 증상의 유관성을 살펴보면서 ‘천재와 광기’에
대한 막연한 사회적인 환상을 깨트리고 있다.






자살을 두고 정신의학자들은 대개 병리적인 해석을 전제한다. 자살을 교과서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자살에는 많은 유발요인이나 동기가 있지만 자살감을 갖는 모든 사람의 경우 감정이나 사랑·힘 등이 박탈되었다는 강한 잠재의식이 있으며 깊은 배척감을 느끼거나 사회환경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한 상태에 놓여있다. 자살 시도는 복수하려는 소망이나 절망감 또는 재결합을 꿈꾸는 소망, 충족적인 환상이 동기가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시도 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살자의 대부분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가도 예술적인 탁월한 재능을 제외하곤 일반 정신장애자가 할 임상 증상과 같다고 본다.

병리적인 과정이나 표현되는 증상이 다르지 않고 보면 예술가의 자살과 일반인의 자살을 굳이 구분할만한 요소는 없다. 예술가들의 자살이 흔히 자신의 의지라거나 아니면 넘치는 예술혼쯤으로 기술되기도 하지만 임상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지나친 미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예술인이나 일반인이나 자살의 순간만큼은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어떤 자살이든 자살기도자가 누구이든 각각의 자살 뒤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강렬한 정신적인 고통이 증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술가들의 자살을 의지적인 자살과 넘치는 예술혼의 결과로 미화하려면 이들에게 항우울제로선 개선하기 어려운 또 다른 증상이 있어야 한다. 동일한 조건하에서 치료받은 예술가나 일반환자의 자살감이나 자살을 구분하기 어렵거니와 필자의 경험으로 보아서는 동일하지 않을까 한다.



고흐를 자살하게 만든 다섯 가지 좌절



대부분의 평전이 고흐의 자살 원인을 주체하지 못하는 예술혼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천재와 광기를 논한 한 에세이는 “1890년 그가 오베르로 돌아 올 때를 보면 어떤 것도 그가 감행한 행위의 전조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많은 서신에서 자살에 대한 암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흐가 일생을 통해 자살감의 줄타기 속에서 고통받았던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다. 그 에세이를 쓴 저자의 말처럼 “항구적 인 자살 가능성은 우울증 환자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거나 사람들이 그를 모르고 있을때 그를 죽음의 위험에 빠뜨린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흐가 가졌던 자살감의 상징적 표현을 읽지 못했으며 예술혼의 그늘에 감추려고 애쓴 결과이기도 하다. 1888년 11월 고흐는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고흐>를 보고 자신이 정신장애자임을 인식한다. “영락없는 내 모습이다.



그런데 꼭 광인처럼 보인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9년 실직상태에서 동생 테오의 권고를 뿌리치면서 적은 편지가 있다. “만일 내가 너와 가족에게 괴로움을 주고 아무 이익도 주지 못한다면 나는 훼방꾼이며 아무 쓸모 없는 자라고 느끼고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것이다. 또 내가 너의 방식에서 동떨어진 방향으로 계속 나간다면 심한 고통이 나를 눌러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병리증상을 가진 일반환자의 사고와 차이가 없다. 이상 지적한 두 가지의 표현을 통해 그가 일반 정신장애자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을까를 유추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다섯 가지의 좌절이란 사건을 선행요인으로 설명하고 싶다. 사랑, 직업, 종교, 그리고 그림에 대한 작업이다. 고흐가 고통이라고 표현했던 자신의 생활사적 사건은 많지만 여기에서는 다섯가지 측면에서 부각된 거절감에 대해서만 주목해본다.




첫번째, 사랑의 거절을 보자. 1873년 고흐가 20세 되던 해에 영국 런던에서 첫 사랑을 경험한다. 고흐는 당시 구필 화랑의 런던지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숙집 딸에게 깊은 열정을 갖고 구혼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그에게는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짝사랑 외제니(Eugenie Loyer)는 이미 약혼한 몸으로 고흐의 구혼을 들어줄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른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외제니를 잊지 못해 누이동생과 함께 다시 런던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우울함에 빠진다.



두 번째 실연은 1881년의 일이다. 그가 28세 되던 해인데 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에텐에서 사촌누이에게 구혼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코넬리우스(Cor- nelius)는 결혼하여 아기도 낳고 살았지만 고흐는 그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재차 구혼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때는 고흐가 암스테르담에서 살림을 차린 코넬리우스를 찾아갔으나 가족들이 만나지 못하게 하자 자신의 오른손을 램프에 올려 놓아 그 고통을 견디는 동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항변한다. 세 번째 거절 경험은 1882년의 일이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데 이때 유일하게 여성과 동거했던 경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임신한 창녀 시앵이 그 주인공이다. 후르닉(Christine Clasina Maria Hoornik)이 그녀의 본명이고 시앵(Sien)은 고흐가 그녀를 즐겨 부른 이름이다.



시앵은 이미 다섯 살 된 딸이 하나 있고 임신중인 볼품없는 창녀였다. 고흐는 시앵과 동거하는 동안 퍽 행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본질은 사랑이라기보다 시앵의 불행 그 자체였을 것이다. 불행한 시앵을 헌신적으로 구원해야겠다는 무의식적 소망이 동거다. 시앵은 고흐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창녀생활을 지속함으로써 성병의 고통을 계속 겪어야 했는데 이로 인해 고흐도 성병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동거이니 가족들이 탐탁하게 여길 이치가 없다. 결정적인 것은 그의 후견인 격인 동생 테오의 적극적인 반대로 20개월의 동거생활은 끝을 맺는다. 이때 고흐 행태를 보고 가족들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하지않을까 하는 의논도 했는데 이때 고흐는 가족들로부터 비난받은 만큼 격렬한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주 악화되기도 했다.



네 번째는 1884년의 일로 고흐가 31세 되던 해다. 10세나 연상인 시골여자 마르고트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마르고트 가족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혀 마르고트는 자살을 기도하고 고흐는 거절의 아픔을 경험하고 만다. 다섯 번째 경험은 1887년의 일로 그가 34세 때의 일이다. 이때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카페에서 음주와 퇴폐한 여성편력을 경험하지만 결국 오래 지탱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여성관계 이력을 보면 자신이 사랑을 고백하고 구혼했던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흐의 집요한 편집증적 고백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당하는 이유는 모두 비슷하다. 우선 상대방 여성이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첫사랑이 그랬고 사촌누이가 그랬다. 네 번째 사랑은 비록 서로 좋아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거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나마 성사된 사랑은 창녀 시앵뿐이다.
그녀 역시 고흐의 가족이 반대함으로써 헤어지고 만다. 사랑이 성취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미 결혼할 수 없는 조건의 여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반대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고흐는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공격적 저항을 한 흔적도 있다. 집요하지만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경험은 그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무의식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고흐가 생전에 강한 집착을 보인 삶의 가치는 사랑을 제외하곤 작품활동이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의 좌절은 동생 테오와의 긴 인간관계로 대치되기도 하고 몇 안 되는 인상파 화가들과의 짧은 교우로 대신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사랑의 좌절과 함께 고흐를 괴롭힌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활동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일 것이다.



현실의 도피 그리고 자살



고흐는 그림 공부를 시작한 1880년부터 생을 마감한 1890년까지 10년 동안 모두 800점에 가까운 작품과 1,000점에 가까운 데생을 남겼다. 이 10년간의 작품 활동도 공교롭게 그가 정신적 고통을 헤매면서 남긴 작품이 더 많다. 800점의 작품 가운데 400점이 정신장애 증상이 깊어진 말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간한 다작이 아닐 수가 없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 많은 작품들이 그의 생전에 화랑이나 감상자들의 주목을 끌어 활발하게 매매되지 못했다. 생전에 팔린 그림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풍경화 1점, 20프랑에 팔렸다는 초상화 1점, 20점 내외의 드로잉이 전부였다니 돈으로 환산해도 겨우 100달러였다고 한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그의 그림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이성까지도 반쯤 암흑 속에 파묻었다.” 이 말은 자살을 시도한 고흐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발견된 구겨진 종이에 적혀 있던 글귀다.




자신의 일생을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나 작품 어느 것 하나 성취된 것이 없으니 그 좌절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다했던 작업들을 접고 자신을 관조해보려 했을지 누가 알랴. 어느 쪽이든 고흐에겐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가 인생의 초기에 지녔던 직업은 주변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지속하지 못한다. 화랑의 점원, 무임 교사, 책방점원 등 어느 하나 직업인으로 성취했다고 말할 만큼 적응하지 못한다. 이런 모든 거절로 인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늦게나마 시작했던 충분한 동기가 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무척 바빠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바쁨의 동기를 고흐는 그림 그리기에서 찾았다. 프로이트는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이 신경증의 소산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같은 분석의 카렌 호니는 인간이 갖는 신경증적 욕구를 열 가지 열거하면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고흐는 이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지만 어느 것 하나 성취했다고 보긴 어렵다. 점점 바쁘게 작업해야 하는 것도 불충분한 충족과 거절로 인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으로 이해된다.



부처가 제자에게 설파했다는 고해(苦海)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고통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고흐가 임종에 임해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라고 한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거나 함께 한 경험이 없다. 자기가 원하는 화가로서 자리매김할 수도 없었다.



그가 싫어했음직한 사회적 환경 등을 생각하면 고흐는 그가 남긴 말처럼 고통 그 자체를 살다가 간 화가일 뿐이다. 평가는 작품으로 받아야 하겠지만 그가 일생동안 고통스러워했던 적응의 문제는 깊이 이해되어야 한다. 정신장애적 증상 모두가 역설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왜곡된 방어임을 알게 된다면 고흐를 환상적으로 위장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가 정신장애를 앓았다고 해서, 그래서 자살을 했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낮아지거나 높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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