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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 인연 ' / 아사꼬 얼굴 공개

작성자베고니아|작성시간11.07.13|조회수2,176 목록 댓글 0

 

 

 

 

 

 

 

 

 

 

 

 

피천득의 ' 인연 ' - 아사꼬 얼굴 공개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연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아시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二世)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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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92)의 수필 ‘인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의 상징’으로 남아있던 아사꼬의 얼굴이 처음 사진으로 공개된다. 29일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 ‘책을 말하다’를 통해서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국어교과서에 소개됐던 이 가슴 아린 구절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아사꼬의 실제 얼굴을 상상해 봤음 직 하다. ‘책을 말하다’ 제작진은 피천득 선생의 ‘인연’ 편을 준비하면서 직접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시바쿠 시로가네, 성심 여학원 등 아사꼬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제작진은 미국 현지 취재를 추진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피천득 선생이 극구 말렸다는 것. “젊었을 때의 아련한 감정은, 그때의 감정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취재과정에서 아사꼬의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 사진, 그리고 성심 여학원 졸업 때의 사진들이 입수됐다. 이제는 수녀가 된 아사꼬 친구의 낡은 졸업앨범을 통해서였다. 피천득 선생보다 10살 연하였으니 아사꼬의 나이도 이제 82살. 하지만 사진속의 아사꼬는 “목련처럼 청순하고, 백합같던 시절”의 얼굴이다. 사진을 찾았는지는 모르고 있던 피 선생은 녹화 도중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고 무척 반가워 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아니 만난 만 못하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변함 없으시냐”고 묻자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지만 60년만에 젊은 아사꼬를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조선일보 - 8/27

 

 

 

 

 

 


 

 

KBS, 피천득 선생 수필 주인공 아사꼬사진 공개

 

그리워하는 데도 만나고는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만났다.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스위트피처럼 귀여웠고

번째 만났을 때는 하얀 목련처럼 청순했으며

마지막 만남에서는 백합처럼 시들어 가는 모습이었던 아사꼬.

琴兒 皮千得 선생의 인연 주인공 아사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KBS 1 TV 통해 방영되는 ‘TV, 책을 말하다프로그램의

인연편에서 아사꼬의 얼굴이 사진으로 공개된다.

책을 말하다제작진은 인연편을 준비하면서

일본 주재 특파원을 통해 아사꼬의 자취를 찾기 시작했다.

 

아사꼬의 부친 미우라씨가 근무했다는 YMCA에서 자료를 구했지만,

미우라라는 사람이 근무한 적은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작진이 다시 확인해보니 피천득 선생은

결례가 될까봐 부친의 성은 가공한 것이다.

지금도 실제 성은 알려줄 없다 잘라 말했다.

 

결국 제작진은 아사꼬라는 이름과 성심 여학원,

작가와 10 차이라는,

수필 속에 담긴 가지 정보만 갖고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성심 여학원 쪽으로 알아 봤지만,

전후 폭격으로 학교측이 갖고 있던 자료도 소실된 상태였다.

학교측은 아사꼬와 비슷한 시기에 졸업한 졸업생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수녀가 졸업생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아사꼬의 동창이었고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음이 밝혀졌다.

그가 보관해온 낡은 졸업앨범에서 아사꼬의 모습을 찾을 있었다.

그는 아사꼬는 청순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친구라고 얘기했다.

 

표만석 PD 나이 지긋한 아사꼬의 사진도 입수했지만,

선생께서 방송을 통해 공개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지만 아사꼬의 사진을 보고 반가워 하셨다 말했다.

 

1920년생으로 확인된 아사꼬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을 처음 알게 피천득 선생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너무도 반갑지만 번의 인연으로

족하다. 굳이 만나기 보다는 그저 아사꼬가 살고 있기를 바랄

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을 펴낸 샘터의 김성구 사장은

지금도 선생은 수필에 나왔던 아사꼬의 안데르센 동화책 표지와

우산 색깔, 신발 모양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전했다.

 

 

 

수필 같은 생애 세상 `인연`을 접다 - 별세한 피천득 선생

금아(琴兒) 피천득. 그는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늙지 않는 얼굴로 늘 우리 곁에 머무를 줄 알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멈추지 않을 줄 알았다.

지난해 9월에도 '피천득 수필집' 일본어판을 제작한

일본 출판사 제작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금아였다.

 

그러나 지인들은 달랐다. 조용히 '만약'을 준비해왔다.

금아는 96번째 생일이었던 지난해, 예년과 달리 지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외부와 연락도 끊었다.

금아는 변변한 세간도 없는  서울 반포동 32평 아파트에서 25년을 살았다.

 

거기서 금아는 치매에 걸린 아흔 살 아내와 막내딸 서영(61)씨가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과 함께 살았다.

아흔여섯 평생을 자신의 수필처럼 소박하고 단아하게 살다 간 금아였다.

 

#거문고 소년

금아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금아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엄마'라고 불렀고, 당신을 기린 수필 '엄마'를 남겼다.

 어머니 말고 소년 피천득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두 명이 더 있다.

금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그때 그의 재능을 주목한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춘원은 금아의 중국 유학을 권했고, 유학을 마친 금아는

춘원의 집에서 3년간 기숙하기도 했다.

거문고 소년이란 뜻의 아호 금아도 춘원이 지어준 것이다.

거문고 잘 탔던 금아 어머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금아는 도산 안창호를 만난다. 도산도 금아를 몹시 아꼈다.

도산은 금아가 아프자 요양소에 입원시켰고

 아침마다 문병했다. 도산과는 안타까운 일화도 있다.

도산이 순국했을 때 그는 조국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경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때 일을 금아는 평생의 한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서영이와 난영이

금아는 영원한 어린이였다. 늙어서도 늘 어린이의 표정을 짓고,

어린이를 '어린 벗'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처럼 살았다.

 '엄마! 나는 놀고 싶은데 무엇하러 어서 크라나'('아가의 슬픔'부분)라고

드러내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천생 어린이 같은 금아를 작가 최인호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불렀다.

 

금아는 일생에 두 여성이 있었다. 엄마와 딸 서영이다.

금아는 외동딸을 끔찍이 위했다.

딸이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안 보냈고,

"아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수필집 '인연'(1996)의 세 장 중 한 장을 '서영이'라 이름 지어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전했다.

거기서 금아는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라고 적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 하버드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55,

 금아는 딸 선물로 인형을 사왔다. 그 인형을 금아는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 씻기고 이불 덮어 재우고,

철 따라 옷을 갈아입히며 쉰 해를 함께 살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 서영이를 대신한 사랑이었다.

인형의 이름은 난영이. 서영이 대신 난영이가 금아의 임종을 지켰다.

 

# "사랑을 하고 갔구나"

금아는 채소 위주로 소식했다. .담배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진 금아의 장수비결이다.

이와 관련한 금아의 농() 한 토막이 있다.

"영국의 버나드 쇼(1950 95세로 사망)가 채식주의자였어요.

나이 들어 죽었는데 이때 런던 타임스가 사설에서 '버나드 쇼의 장례 행렬에는

염소와 소, 양떼들이 울면서 뒤를 따랐다'고 썼대요. 재미있지?"

 

서양 신문처럼 적어본다.

그의 운구에도 소와 돼지가 울면서 뒤따를 것이고, 그의 주옥같은 문장을 읽으며

 어른이 된 모두가 뒤이을 것이다. 언젠가 금아는 "잠자는 듯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커다란 소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장 커다란 소망까지 이루고 떠났으니, 금아는 복도 많으시다.

 

 

피천득 선생이 남긴 명구절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수필 '인연'에서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수필 '오월(五月)'에서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수필 '수필'에서

 

"눈보라 헤치며/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앉아있다가/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 가는/" -

'', 생전의 금아가 가장 아꼈던 자작시

 

 

 

온 국민에 '인연' 남기고 떠난 영원한 수필가 - 별세한 피천득 선생

모성 향한 끝없는 갈망감성적 문체로 그려

프로스트詩 좋아한 국내 영문학계의 1세대

 

수필가 피천득은 늘 한 손으로 원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말년을 보냈던 서울 방배동 자택 서재에 가 본 문인들은 모두 기억한다.

 그가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가리켰던

그 사진 혹은 그림들 속의 주인공들이 누구였던가. 우선 먼저,

시인 예이츠 등등 영국 낭만주의 시인, 여배우 잉그러드 버그만,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리고 사진 속에 없지만,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의 느낌

 

금아(琴兒)라는 피천득의 호는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금아(琴兒)라는 호는 춘원 선생이 지어주셨는데,

내 나이 열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얘기를 들으시고는

 저 보고  영원히 어머니의 아이처럼 맑게 살라는 뜻을 살라는 거 같았어요라고

고인은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수필가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모성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바탕으로,

 모성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아름다움 앞에서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비애를 평이하면

감성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그의 수필은 사실은 산문으로 구성된 시에 가까웠다.

그는 시는 산호이고 수필은 진주라고 생각해왔어요.

깊은 바닷속에 있는 산호와 진주를 캐 내지는 못한 채

젖은 모래 위에서 조가비와 조약돌을 줍듯

글을 써온 내 인생에 나는 다 만족하고 있어요라고 그는 늘 생전에 말해왔다.

 

워낙 연로했기에 문단에서는 해마다 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그는 늘 새해 인사를 가는 후배 문인들 앞에서

 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건강을 과시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타계는 예상을

초월하는 평상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단의 첫 반응이다.

피천득은 한국 영문학계의 1세대 학자이기도 했지만,

정감 어린 한국어로 구성된

 산문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하는

 그의 수필은 한국어의 우아함과 날렵함을 가장 잘 결합한 글로 남아있다.

그 글은 흔히 수필의 대표적 산문으로 기억되지만,

그 글이 감동의 파장을 남기는 까닭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던 사람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모성의 극치이기 때문에 마치 시처럼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피천득의 수필은 개인사의 고백이지만,

감동의 여백으로 인해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이

그 글의 공간 속에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던

넉넉한 미학의 품을 지녔던 것이다.

피천득은 시 가지 않은 길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좋아했다.

 

문학이란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생처럼 가지 않은 길을

추체험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했던

그는 문학이 제공하는 또 다른 체험의 영역을 사랑했다.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던 그는 말년에도

 버스를 타고 홀로 지인들을 만나고

서점에 책을 사러 가고, 동숭동 카페에 앉아 차를 마셨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고맙다라고.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연인들

금아 피천득


한국 수필 문학이 서야 할 자리를 매김한 개척자요

우리 시대 최고의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이 지난(1997년) 5월 29일로

 미수(米壽)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피천득 전집’을 간행한 바 있는 ‘샘터’에서는

 금아 선생의 애제자인 필자가 가까이서 지켜본 모습을 소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 소개된 에피소드들은 모두 실화에 바탕한 것으로

샘터 가족들이 피천득 선생의 수필 세계를 한층 깊이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심명호 :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 대와 영국 런던대 대학원을 마쳤다.

피천득 선생의 서울대 교수 시절 애제자로 오래 교분을 쌓아왔다.

현대 모교 교수로 몸담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의 형성 과정 -

외래적인 영향과 고유의 독창성> 등의 저서가 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적어도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경우 크게 벗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분을 두고 가인이 아니랄 사람이 없으며,

올해 연세 팔십팔세를 두고 단명이랄 사람 없기 때문이다.


금아 선생님은 지난 오월 말에 미수(米壽)를 맞으셨다.

금아 선생님은 가인이다.

그분은 체격이 우람하거나 늘씬하지는 않으며

 비대하지도 않으며 아주 여윈 편도 아니다.


그분의 용모는 이지적이면서도 인자하다.

그분은 그저 좀 작은 체구의 노신사이다.


그런데 피자가 여기서 그분을 가인이라 함은

외모를 두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그분의 마음은 소년처럼 순결하고,

구십 평생 살아온 삶은 청빈하고 소박하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은 사람들을 인자하고 정답고 솔직하게 대하며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반면 남에게 허세나 위세를 부릴 줄을 모른다.


그분은 늘 상재방의 처지를 살펴가며 대화와 행동을 한다.

그분은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을 지닌 나머지 어떤 때는

좀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는 항상 지성과 이성의 빛과 향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분은 우리 시대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귀인(貴人)이다.


금아 선생님이 한평생 저작한 시와 수필은 대부분

<생명>이라는 시집과 <인연(因緣)>이라는 수필집에 수록되어 있다.

<생명>과 <인연>에 들어 있는 작품들은

그분의 참되고 순박한 삶과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솔직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 그분은 대학에서 반평생 영미문학을 강의하신 교수요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리워하는데도 아니 만나고…

 

그런데 금아 피천득 선생님에게는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그분에게 늘 지속적으로 있어온 여러 연인들과 그분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분은 늘 연인들을 가까이나 멀리에 두어왔다.

그분은 소년 시절부터 구십세를 눈 앞에 바라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 연인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은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연인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금아 피천득 선생님이 한 평생 여러 여인들을 연모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없으면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듯한

 심리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분은 아마도 연인들을 정신적인 지주(支柱)로 삼아

인생이라는 망망한 바다를 건너온 게 아닌가 한다.


금아 선생님의 수필 <인연>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 수필의 주인공 아사꼬를 기억할 것이다.

 아사꼬는 그분의 연인들 중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분은 수필에서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마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필자는 금아 선생님이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 여인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1920년대 중반 그분이 십오세 안팎이었던 서울 제일고보 학생 시절의 일이다.

그분은 어느날 서울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여학생의 뒤를 따라 그 길로 기차를 타고 그 여학생의 집이 있는

 원산까지 갔던 일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금아 선생님은 L이라는 이 여학생과 헤어져 돌아왔으나,

 L은 금아 선생님이 평생 잊지 못하는 풋사랑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를 않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금아 선생님은 L의 근황을 우연히도 같은 원산 출신이며

소학교 같은 반이었던 김형규 교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L은 서울에서 E전문을 졸업하고

을지로의 어느 의원의 안주인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초반 이십대의 문학 청년으로 성장한 금아 선생님은

노천명의 시를 읽고 심취되어 이 여류시인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써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매일 계속해서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는 어느 덧 일백통이 되었다.


이것은 금아 선생님 쪽의 사연이고,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백통의 편지 중에서 노천명에게 전해진 편지는 반도 채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머지를 노천명의 형부가 편지를 가로채어 파기했기 때문이다.

한편 노천명 쪽에서는 계속 오는 익명의 편지에 처음에는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편지의 필적의 주인과 거처를 신동아 잡지사를 통하여 알아낸 후에는

 일단 안심을 하였고, 모윤숙을 대동하고 금아 선생님을 찾아오는

 호기심마저 보였다.


노천명과 모윤숙은 표면상 춘원 이광수 선생을 만난다고

 숭삼동 집으로 찾아왔던 것이다(숭삼동은 지금의 명륜동인데

 금아 선생님은 그집 사랑채에 살고 있었다).


금아와 노천명은 그때 처음으로 상면을 하였다

(윤석중의 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도 금아와 노천명의그때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러나 그후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하게 되지는 않은 듯하다.

 

 

<흙>의 주인공 유순이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은 사람이면 그 소설의 여주인공

유순이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유순이는 금아 선생님의 수필 ‘유순이’에 나오는 여주인공

 유순이가 앞선다.


유순이는 금아 선생님의 술회하고 있는대로 중국 상해 호강대학 유학시절

 몸이 쇠약해져서 한때  했던 교외의 한 요양원에서 알게 된 간호사이다.

 유순이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그런데 겨울에 상해사변이 났다.

금아 선생님은 전쟁의 포화와 피난민의 물결을 헤치며 유순이를 구하

려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를 그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소리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

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았다.


수필의 끝머리를 보면 이 유순이가 어떻게 해서


 춘원의 <흙>의 여주인공이 되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상해사변 때문에 귀국한 지 얼마 후였다.

춘원이 <흙>의 여주인공 이름을 얼른 작정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를 생각하고 ‘유순’이라고 지어드렸다.

지금 살아 있는지 가끔 그를 생각할 때가 있다.


 

그 후로도 금아 선생님에게는 여러 연인들이 있어왔음에 틀림이 없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작곡가 K라는 여교수가 아니었나 한다.

K교수는 금아 선생님의 시를 읽고 그 중에서

10여 편을 골라 곡을 붙였는데

그 중에는 ‘사랑… 금아연가’라는 연작시가 여러 편 들어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소문이 퍼져서

 한때는 선생님의 가정에 파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금아 선생님은 결국 외형상 원위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의 내면적인 고뇌는 상당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딸 서영이가 소문을 듣고 몹시 슬퍼했던 경우가 아니었나 한다.


선생님은 후에 그때 일을 수필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밤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무렵 서영이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을 읽고

공책에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빠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防波堤)이다.

  

금아 선생님의 수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은

그분이 다음에 간직하고 있는 한 여성상을 비교적 자세히 그려낸 수필이다.


…여기 나의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가벼우나 빨리 걷는 편은 아닙니다.


성급하면서도 기다릴 줄을 알고,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수줍어할 때가 있고,

양보를 아니하다가도 밑질 줄을 압니다.


성실한 가슴. 거기에다 한 남성이 머리를 눕히고 쉴 힘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죽을 힘을 얻을수 있는 그런 가슴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공(架空)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다.

이 여인이 파리로 떠나간 뒤 금아 선생님은 혼자 비원(秘苑)을 거닐며

 둘이서 산책하던 때를 떠올리곤 하였다.


수필 <파리에 부친 편지>에서 금아 선생님은

이 여인을 향한 뜨거운 연모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헤어지면 멀어진다는 그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녹음이 짙어가듯 그리운 그대여. 주고 가신 화병에는 장미 두 송이가

 무서운 빛깔로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금아 선생님은 한 새로운 여성을 알게 되었고,

첫눈이 내리는 날을 택하여

 두 사람은 처음으로 상면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두 사람은 친숙한 사이가 된 듯하다.

하기야 이 여인 X는 그 이전부터 금아 선생님의 글을

거의 다 외우고 있던 애독자였다.

X는 아직 젊은 여성이지만 어느 유명회사의 고위직을 맡고 있다.

금아는 이 여인 X를 위하여 쓴 짧은 시 한 편을 최근 어느 잡지에 발표하였다.


 

한편 금아 선생님의 마음은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계 여인 Y에게도

심히 끌려 있는 듯하다.

금아 선생님은 이 여인이 작년 말 한국에 왔을 때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이 여인의 생일에

 금아 선생님이 국제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


그때 Y는 금아 선생님의 축하를 받고 감격한 나머지

전화선을 빼어놓았다고 한다.

다른 전화가 걸려오면 그 감격이 손상될까봐서 그랬다는 것이다.

금아 선생님은 이 여인 Y를 따라 유럽을 여행하는 낭만적인 꿈을

 아직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아 선생님이 아끼는 또 다른 한 여인을 여기서 빠뜨릴 수는 없다.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늘 상대편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 여인은 구도(求道)의 길에서 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는 수녀이다.

그는 얼마전 어느 문예지에 ‘금아 선생님께’라는 글을 썼다.

편지 스타일의 이 글에서 그는 금아의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금아 피천득 선생님에게 늘 연인이나 연인다운 여인이 있어온 사실을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금아 선생님은 늘 연인이나 연인다운 여인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던 성 싶다.


그렇다면 그분의 생애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여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분과 그 연인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한번 깊이 고찰해보는 일은 곧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금아 선생님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같은 애인이 갖고 싶어

 

금아 피천득 선생님은 어렸을 때 조실부모하였다.

그는 열 살 전에 부친과 모친을 잃었다.

그런데 일곱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만 해도,

모친이 살아 있어서 그는 엄마의 품에 안겨

아빠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눈물을 말릴 수 있었다.


그런데 삼년 뒤 모친마저 세상을 훌쩍 떠나가자

그는 그야말로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가 조숙한 그의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십세 직후였으니

우리는 가련한 떠돌이 신세가 된 그를 머리 속에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가 눈물 속에서 계속 불러댄 엄마는 끝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임종을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나는 ‘엄마!’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내가 왔는데도 모른 체하고 누워 있었다.

나는 울면서 엄마 팔을 막 흔들었다.


나는 엄마를 꼬집었다. 넓적다리를, 팔을, 힘껏 꼬집고 또 꼬집었다.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 얼굴에 엎어져 흐느껴 울었다.

엄마의 빰은 차갑지 않았다…


그는 또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후 외지로 돌아다니느라고 엄마의 무덤까지 잃어버렸다

… 삼십대에 세상을 떠난 그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금아 선생님의 모친은 어떤 분이었을까?

 모친에 대한 묘사가 같은 글에 이렇게 나와 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인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황진이처럼 멋있던 그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와 고행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폭포같은 마음을 지닌 채 호수같이 살려고 애를 쓰다가 바다로 가고야 말았다.


그렇게 예쁜 엄마가 나를 두고 달아날까봐 나는 가끔 걱정스러웠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

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때 엄마는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도 같은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엄마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 하느라고 보냈다…

 이 시간은 내가 산 참된 시간이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은 물론,

 내 생애에 가장 행복된 부분이다.


 

목마름을 적시는 오아시스처럼

 

아무튼 딸 서영이를 금아 선생님은 끔찍이 사랑하였다.

모든 여인들 중에서 그분이 가장 사랑한 애인은, 첫째가 그분의 모친이요,

다음이 서영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그분은 어째서 모친과 서영이 이외에 여러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하여 때로는 사랑하는 서영이나 아내나

 가족들을 슬프게 하였을까?


금아 선생님은 일평생 꺼버릴 수 없는 목마름을 안고 살아온 분이다.

목마름의 시초는 그분이 열 살 때 모친이 의식을 잃고 숨을 거둔

 평안남도 강서의 약수터 인근 집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분은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라 ‘삼백만리’를 찾아 헤매었으나

 아직도 엄마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서영이는 아버지에게 좋은 애인이었고 목마름의 거센 파도를

 어느 정도 막아준 방파제였다.

 하지만 방파제가 있어도 파도는 밀려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거센 파도는 방파제를 넘기도 한다.

 

‘학이 되어 날아간’ 엄마를 찾아 헤매던 나머지 금아 선생님은

엄마의 그림자를 연인들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물론 그분의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소시켜주지는 못하였으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동정과 위안으로

그분의 허전한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주었다.


그러나 오아시스를 지나면 사방은 여전히 텅 빈 사막이어서

그분은 다시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가 ‘학이 되어 날아간’ 곳을 향하여…


어려서 나는 꿈에 엄마를 찾으러 길을 가고 있었다.

달밤에 산길을 가다가 작은 외딴집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는 젊은 여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달빛에 우아하게 보였다.

 나는 허락을 얻어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주인 아주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거기에 엄마가 자고 있었다.

몸을 흔들어보니 차디차다. 엄마는 죽은 것이다.

그 집 울타리에는 이름모를 찬란한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엄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얼른 그 꽃을 꺾어 방으로 들어왔다.

하얀 꽃을 엄마 얼굴에 갖다 놓고 ‘뼈야 살아라!’하고,

빨간 꽃을 가슴에 갖다 놓고 ‘피야 살아라!’

그랬더니 엄마는 자다가 깬 듯이 눈을 떴다.

나는 엄마를 얼싸안았다. 엄마는 금시에 학이 되어 날아갔다.

 

그후 칠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분은 아직도 ‘학’을 찾아 사막을 가고 있다.[ 심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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