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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2025 시와 사람 가을호 김동원 평론 / 들춤과 감춤의 시학1 / 불가능의 가능성(이성복 시인편)

작성자시천|작성시간25.08.29|조회수452 목록 댓글 2

 

불가능의 가능성

 

김동원 시인 · 평론가

 

사이렌siren

 

  현실 공간이 문학 공간에 들어오면, 현실은 곧 그 작가의 체험, 상상력에 의해 변형되고 굴절되어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 새로운 이미지야말로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세계에 닿는 다리이다. 다시 말해, 시의 언어는 우리를 꿈꾸게 해주고, 만나게 해주고, 나아가서는 감춰졌거나 망각되었던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 줌으로써, 우리에게 깨어남의 기쁨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다. 하여, 시의 언어는 되찾아진 현실, 다시 태어난 현실이며, 또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현실이 아닐까(이성복,『끝나지 않는 대화』2014, 열화당. p.11.)

 

 

  이렇듯 기원으로서 시와, 시의 언어는 다시 말하고 ‘다시 태어난 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문학의 장은 유무가 공존하는 상상의 플랫폼이며, (푸코의 말처럼) ‘거대한 있음’[il y a]의 공간이다. 하여 여기에는 근원적인 모호함과 불가능, 모험의 모험이 수반된다. 현대시와 예술은 반역과 불온, 금기와 전복을 미덕으로 하며, 미완으로 가는 도상에 있다. 존재와 시간, 때와 장소의 비밀을 캐는 일련의 작업이 시다. 선악과 미추, 찰나와 무한이 혼효되어 있는 순간의 미학이 시다. 차갑고 불길한 이성복의 초기 시는, 병든 사회에 대한 강렬한 ‘사이렌siren’으로 비유된다. 당대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자학적 알레고리다. 전(前)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상투화되고 강요된 삶에 대한 근원적인 모반’을 꿈꾼다. 그는 체험과 꿈, 기억과 해체를 통해 상상력을 확장한다. 불온한 시와의 화해는 언어를 부수고, 새로운 존재의 집을 건축한다. 유니크하고 불안정한 행 걸침(enjambment)은 ‘안과 밖’을 살피는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그의 잠언은 개인의 갈등과 욕망을, 사회나 역사의 투쟁으로 내면화한다. 때로는 중얼거림으로, 때로는 한탄과 허무로 치받는다. 그의 언어는 몸을 관통한 ‘말의 몸’이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역설적이게도 ‘발견의 시학’을 추구한다. 발견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시의 ‘급소’이자 ‘경락’인 셈이다. 그의 아포리즘은 산문 미학의 직경(直景)을 드러낸다. 자학적 글쓰기는 ‘절대고독’에 이르는 진검승부로서, 최근 그의 시적 보법(步法)은 향가를 통해 신화나 구원의 문제로까지, 그 시적 외연을 확장한다. 1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문학과지성사) 는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다. 치열한 자기 검열을 통한 우상 파괴 행위는, 개성적이자 초현실적이다. 은폐된 것들을 표층으로 밀어올린 작업이다. 불편한 진실을 시적 모호성을 통해 발설한다. 2시집『남해금산』(1986, 문학과지성사) 은 1984년 도불 이후, 사상의 일대 전환기의 과정이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한 동양적 시향(詩香)이 물씬 풍긴다.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서정과 서사 사이에서 정제된 언어로 형상화한다. 운문의 리듬은 기억의 해체를 통해, 깊고 따뜻하며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이 시집에서 이성복(1952~, 경북 상주 출생)은 인간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투시한다. 세계는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킨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때로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냉소, 묘사의 난해함과 개인적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의 섬세한 시적 감수성, 의식의 해체와 역동적 상상력은 가히 독보적이다. 3시집『그 여름의 끝』(1990, 문학과지성사)은 연가-애가이면서 고독한 자의 노래다. 연애의 방식으로 행간을 치고 들어가 근원적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어쩌면 이 시집은 길 잃은 자의 방황과 형벌의 노정을 찔러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지나간 길의 사유와 초기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불교적 허무에 닿았다. 4시집『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문학과지성사)은 ‘감각의 깊이’를 확보하여 몽환적이자 무의식적인 흐름의 시적 변주처럼 여겨진다. 파리에 체류할 때 쓴 연작시「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는, 닫힌 감성과 열린 세계로서 일상의 풍경과 사변이 통속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5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문학과지성사)은, 절대 모순과 비탄을 노래하였다.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암컷의 비유 시편은, 비루한 생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육체가 없는 ‘입 없는 것들’을 통해, 실존의 극지를 파 내려간다. 환청과 미망, 존재와 부재 사이, 인간의 끝없는 콤플렉스는 자해적이다. 지독한 독설은 병든 세상에 대한 자탄이다. 6시집『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12, 문학과지성사)은, 시의 허기에 대한 시인의 절해고도이다. 외국 시인의 시를 읽고 쓴 이 시집은, 그가 ‘말의 안쪽’이 아니라 ‘말의 바깥’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뛰어넘는 시적 방식을 취했다.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본 ‘낯선 인식’은 이성복만의 고유한 풍경이다. 7시집『래여애반다라』(2012, 문학과지성사)는, 신라 향가인 풍요(風謠) 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로서, ‘오다, 서럽더라(來如哀反多羅)’의 뜻이다. 이 시집의 요체는 시인의 “삶을 향가의 공정에 집어넣고, 해부하고 관찰하고 종합해 본 것”(이성복,『끝나지 않는 대화』, 2014, 열화당 p187)이자, ‘불가능의 언어’를 ‘시’를 통해 실패한 형식으로 시도하였다. 하여 그는 시로써 “말할 수 없음, 전달할 수 없음, 어떻게 해도 해 볼 수 없음, 속수무책, 속절없음”을 썼다. 그의 말을 빌면,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씌어지는 것”이며, “대상에 의해 혹은 타자에 의해서” 시인이 “망가지는” 작업이다. 하여, 이성복에게 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능의 가능(성)’으로 귀결된다.

 

진실, 혹은 병든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들어 가는 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살아 있음〉의 징조이며,〈살아야 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병들어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의 아픔,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그로부터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이성복, 1시집 표사)

 

 

 「정든 유곽에서」(1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 문학과지성사)는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시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한다.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끈질기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괴롭히는 부조리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정든 유곽에서」그는 병든 시대의 진실과 아픔을 자신의 그것으로 수용, 변주한다. 어떤 측면에서 페미니즘적인 이 시는, 분명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STOP’이라고 외치지 않음을 가슴 아파한다. 돌레오 에르고 숨Doleo ergo sum.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

 

누이가 듣는 음악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 돋아나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임종, 병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의 신체를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일본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나신(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의 별

 

―이성복,「정든 유곽에서」전문

 

  더이상 그에게 “누이”는 전시대의 맹목적 여인상이 아니다. 찢기고 발가벗긴 채, 역사와 현실의 폭력을 감당한, 이 땅의 고통스런 여성의 표징이다.「정든 유곽에서」는 70년대 이전 시에는 볼 수 없는 음산하고도 아픈 신음이 들린다. 행간 속에서 번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은, 불편 부당하고 체념적이다. 이성복은 권력의 폭력에 대해, 전시대의 우상에 대해, 누이의 유린에 대해, 조국의 병(病)듦에 대해, 죽어가는 ‘나의 별’에 대해, 무수한 부조리에 대해 온 힘을 다해 소리친다. 그의 부정의 정신은 당대 폐습에 대한 반동이다. 소리친다는 것은 시인에게 있어 ‘살아 있음’의 방증이자, ‘살아야겠음’에 대한 힘의 의지이다.「정든 유곽에서」의 시적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하다. 흐름의 기괴한 환상은 초현실적으로 비친다. 화법은 비시적이자 반시적이며, 콤플렉스적이다. 찌그러진 언어의 심층은, “한족의 별” 속에 욕동 하는 미학적/윤리적 가치체계를 해체한다.󰡒문학(은) 어차피 한 시대를 함께 겪어나가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삶의 어쩔 수 없는 오열이다.·󰡓(김태완,「이성복의 <정든 유곽에서>」) 그리고 이런 무의식은 즉흥적 시상을 촉발하며, 억압의 대상인 “누이” “당신의 딸” “어머니”의 아픔으로 얼룩진다. 독재 정권에 짓눌린 한국인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상징한 이 시는, 그의 정치적 알레고리로서 부정(성)의 사유와 시법을 요해(了解)하는 열쇠이다.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서정을 내놓음으로써, 이성복은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풍경과 상처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 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 다시 한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당신을 사랑합니다.(이성복, 2시집 표사)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만해 시의 경우와도 같이 사랑의 역설이다. 이 패러독스paradox와 반어의 논리는 이성복 시의 중요한 기제로서 차이를 생성하는 힘이 된다. “이성복이 만드는 풍경은 잘 계산되고 제어된 풍경이다. 그 풍경은 물론 마음의 풍경, 넋의 공간이다. 그것은 시인의 기억 속의 공간이다. …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성복의 시를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그 시들 사이의 거리가 넓고 깊은 것에 우선 당황하게 된다.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정황 묘사가 나오는가 하면, 때로는 그 이유가 선명히 설명되지 않은 절규가 터져나오고 있는 그의 시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보낸 시간을 헛되이 만드는 듯한 절망감과 허망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거기가 고비다. 그것을 참고 이성복의 시를 천천히 되풀이해 읽을 때, 시들은 서로 친화력을 드러내,   한편 한편의 시적 완결성을 넘어서서 이성복적 공간, 한 비평가의 말투를 밀면 이성복적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구성한다.(김현 시평, p91)

  연애 시의 한 방식인「남해 금산」은, 슬프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다. 붉게 스민 사랑과 이별의 묘처를 얻었다. 리듬의 변주와 어조의 감미로움은 행과 연의 음영(陰影)을 깊이 드러낸다. 특히 종결형 ‘~네’의 반복은, “여자”인 몸과 “나”인 “돌”을 동일시한다. 그 불가사의한 고저와 장단, 강약의 흐름은, 전통 서정시의 율격에 닿아 있다. 그의 글쓰기의 목표는 ‘환(幻)으로써 환(幻) 닦기’, ‘환(幻)으로써 환(幻) 걷어내기’이며, ‘괴로움으로써 즐거움 얻기’, ‘미혹함 굴려 깨달음 열기’로 요약된다. 그는 ‘환상이 아니면 진실을 구할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 시는 ‘몸’을 통해 ‘몸 바깥’의 풍경을 더듬고, 환상의 실재를 드러내고자 했는지 모른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해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남해 금산」전문

 

  시「남해 금산」(2시집『남해 금산』, 1986, 문학과지성사)은 이성복의 출세작이다. 나는 문청 시절 이 시를 암송하고 다녔다.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무너뜨린 연애 간(間)이다. 내 심중을 크게 울린 것은, 돌 속 묻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시속 화자 “나”가 “돌 속에” 들어가는 행위였다. 그 후 나는 희한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시인이라지만 과연 인간이 돌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자문(自問)하였다. 그리스 신화 속엔 퓌그말리온이란 독신남 조각가가 나온다. “자신이 깎아 만든 눈같이 흰 처녀 석상과 함께 산다. 석상은 실로 인간의 솜씨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신묘했다. 퓌그말리온은 틈만 나면 처녀 상을 넋 놓고 보곤 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처녀 상에 입을 맞추고 껴안고 애타게 말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처녀 상의 입술은 늘 차고 싸늘한 감촉뿐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퓌그말리온은 잠자리에 처녀 상을 눕히고 베개를 받쳐주는가 하면 반려라도 되는 양 다정스레 허리둘레를 보듬기도 하였다. 아프로디테의 축제일이었다. 퓌그말리온은 여신에게 처녀 상이 진짜 여자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곧바로 다가가 그 처녀 상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다. 처녀 상의 입술에 온기가 돌았다. 엄청 놀란 퓌그말리온은 그의 손으로 처녀 상의 가슴을 쓰다듬어 보았다. 딱딱하던 대리석이 부드러운 피부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녀의 몸속에선 분홍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분명 피가 도는 처녀였다.”(이윤기,『그리스로마신화』 3권 발췌) 그 유명한 퓌그말리온의 신부 갈라테이아다.

  릴케나 보들레르의 말을 빌리면, 누구나 절실해지면 영혼이 다른 영혼과 하나가 된다.「남해 금산」속의 ‘돌 ․ 여자 ․ 나’는, 그리스 신화 속 ‘퓌그말리온과 처녀 상’처럼 허구를 통해 실제가 된다. 돌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 들어간 로댕의 이야기는 진실하다. 바닷물 속에 노를 담그고 그것을 귀에 대고, 바닷속 이야기를 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접신에 들린 자(者)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땅속 뿌리를 타고 초록 잎사귀가 되는 전이(轉移)는, 그대로가 시다.「남해 금산」은 언어이자 언어 이전의 불립문자다. 이 시는 순간을 통해 영원을 인식한 자의 노래다. “「남해 금산」(1986)은 실험적 언어가 보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정끝별) 이성복은 언어로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돌’로 치고 들어갔다. 그녀가 그 돌 속에 살기 때문이다. 돌 속의 공간은 둘이 숨쉬기에 부족했나 보다. 돌을 떠나 세상 밖으로 그녀는 떠났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지상의 세계를 천상을 상징하는 “해(남자)와 달(여자)”로 은유한 상상력은 절묘하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실존의 엄혹과 고독함이 행간에 사무친다. 결국 신령스런 시의 직관은 찰나에 일어난다. 2010년 남해 금산 바닷가에서, 나는 돌의 귀에 대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남해 금산」속의 ‘돌’이 아직 이 바닷물 속에 잠겨 살고있는가” 이별은 이룰 수 없을 때 가장 시니컬한 표정이 된다. 이성복은 ‘돌’을 파고 들어가 이별이라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다.

 

 

통점, 혹은 어머니의 형상

 

  시의 행간은 허/공의 깊이에 비견된다. 이미지와 언어 사이, 물이 번진다. 의미를 지우고 이미지를 그린 시가 그의 시다. 이성복 시의 심층에는 시대 사회적 맥락이 가로 놓여 있다. 그의 시작(詩作)은, 지우면서 채우고 채우면서 지우는 시법이다. 그는 시의 뼈와 살을 발라내 형(形)과 상(象)을 빚는다. 운문의 형식은 그의 내면이 부름에 응답한 결과이다. 명시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2시집『남해 금산』(1986, 문학과 지성사) 은불의 언어를 버리고 물의 언어를 표방한다. 충돌과 갈등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의 흔적을 새긴다. 시는 순간의 포착이다. 그의 리듬과 정서는 서정적이면서도 모던moden하여 깊숙한 인간의 본성을 찌른다. 고뇌를 통해 모성의 떨림을 감동으로 전한다.「또 비가 오면」은곡진한 사모곡이다. 내면의 울음소리는 너무 아파 마음의 귀(心耳)로만 들린다. 이 시는 비와 몸이 하나가 되는 동일성의 시학으로 기능한다. 좋은 시는‘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다’는, 그의 시관(詩觀)과도 일치한다. 간절히 묻고, 홀연히 솟구친 모성이 보인다. 그는 ‘내 인생 내 문학’에서 이 시에 대해 토로한 바가 있다.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세상의 온갖 노폐물을 투명한 샘물로 바꾸어 주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현실의 내 어머니이면서 세상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늘 허약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쓴 시입니다.” 서정시는 심장의 통점-암점이 있을 때 명시가 된다. 그는 고해 속에 살다 가신 자당(慈堂)을 통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아픔을 대신 울어준 곡비(哭婢)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이성복,「또 비가 오면」전문

 

  그에게 ‘물’과 ‘빗소리’는 “어머니”와의 두 대립각이다. 형상을 지우는 ‘비’는 결국 모호하고 축축하다. 김현은 시평에서“ 이 시속에서의 어머니는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어머니이며 동시에 세계 내에 삶의 원리, 아니 여건으로 존재하는 대지모신으로서의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는 어떤 재난이 그녀를 덮쳐도 “미동도 않으신다” 그 어머니의 받아들임, 고뇌, 절망을 시인은 비―땅의 물질적 이미지로 바꿔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시인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를 미동도 않고 받아넘긴다. 그 어머니야말로 고통스러운 삶을 수락하는 원리 자체이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시는, 이성복의 시적 상상력의 극지다. “비”는 어머니를 “젖”게 하는 매개물이자, “물”에 “잠기”게 하는 대상이다. 이런 자아와 세계와의 불화는, 행과 연을 첨예한 긴장과 갈등으로 몰아간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셔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미라는 존재는, 결코 “미동도 않”는다. 어떤 죽음도 ‘어머니’와 ‘나(자식)’를 갈라놓을 수 없다. 언제나 이성복은 삶의 구체성에서 독창적 언어를 길어 올린다. 하여, 그의 시작(詩作) 행위는 절박하고 사무친다. 만지고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비밀을 들춘다. 형상을 통해 추상을 꺼내기도 하고, 추상을 통해 형상을 버리기도 한다. 그의 시가 고뇌에 찬 까닭은, ‘비’ 너머 사물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 미동도 않으”시는 어머니는, 야훼, 곧 스스로 있는 자다. 자연 그 자체이다.

 

 

슬픔의 대대(對待)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聖人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聖人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怒 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壁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이성복 3시집 표사)

 

 

  “백일홍”은 생사의 경계다. 나무와 언어의 몸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하여, 슬픔은 물질이자 ‘그 여름의 끝’(3시집『그 여름의 끝』,1990, 문학과지성사)이다. 그의 시는 오직 시 속에 머물 뿐. 줄곧 정신의 무한 자유를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 체계를 부정하는 까닭은, 그가  “폭풍”의 ‘연애’ 한가운데를 관통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과 삶의 무수한 진실들이 생생하게 울리기 위해서는 이렇듯 사랑과 고통,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성복의 세 번째 시집『그 여름의 끝』은『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남해 금산』이라는 고통과 사랑의 통과 제의적 도정을 거쳐온 한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려 나오는 ‘숨길 수 없는 노래’들이다. 그가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박철화 해설) 시「그 여름의 끝」은 “나의 절망” 속에 “꽃”핀 패러독스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전문

 

  지옥의 고통일지라도,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길을 낸다. 그에게 언어는 몸이다. 추상적인 진실은 모호할 때 시적이다. 그의 언어는 움츠렸다 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질서이면서 무질서의 시법으로, 취(取)의 방식이 아니라 사(捨)의 시법이다. 예술의 참모습은 진짜이기도, 가짜이기도 하다. 그의 언어는 감각의 방식으로 공간을 확장한다. 시는 모르는 것에 대한 발언이다. 이성복은 ‘의지로서의 세계’를 뚫는다. 어떤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붉은 꽃들을” 시로 “매”단다.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는 곳에서, 그의 “절망은 끝났”다. 세계는 그가 머물 곳이 아니라, 흐르는 곳이다. 그의 시간은 어디에도 있고, 없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백일홍의 “피”만이, 그를 구원한다. 그의 시는 사물 이전과 언어 이후의 모순형용이다.「그 여름의 끝」은 빛의 부제다. 예술은 극한을 치받을 때 꽃이 핀다. 절망은 그 자체가 놀라운 시경(詩境)이다. 결국 그는 언어의 안쪽을 뒤지다, 언어의 바깥을 찾은 셈이다. 시는 불변의 가변을 도모한다. 이성복은 시를 통해 불변이 아닌 불역(不易: 천지는 늘 변하지만 그 변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의 진리를 깨닫는다. 절정은 절망에서 온다. 하여 그 여름의 끝에는 시가 있다.

 

 

불가능의 시 · 하나

 

  도대체 불가능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한 번 불가능의 얼굴을 본 사람은 스스로 불가능이 되기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것이 제 똥을 주무르는 치매 환자의 미소처럼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향락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알아버린 그 불가능의 입구는 생―사―성―식의 불길한 화환과 불후의 먹이사슬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못 나오는 심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직 인간과 가까이한 죄로 자손 대대로 천형 받는 짐승들처럼, 우리 또한 불가능이 애지중지 기르는 가축들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비록 천형을 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천형 받은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학이 소중한 것은 검은 보자기 속 어둠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는 사진사처럼 한 순간, 한 순간 불가능을 기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홀로 문학이라는 암실에서 불가능과 마주하는 일은 고요한 시체 안치소에서 시트를 들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합니다. 지금 제가 문학적으로 살지 못해도 저는 문학을 믿습니다. 그처럼 제가 비록 불가능을 잊는다 해도, 불가능이 저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성복,「문학,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에서

 

 

  우주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유무(有無) 생멸(生滅)의 언어다. 시는 만휘군상(萬彙群象)의 심령이다. 당연한 것에 대한 부정과 균열이 시다. 호명된 언어는 사물을 불러내는 기적이다. 그의 ‘불가능 시’를 관통하는 시로「정선」(7시집『래여애반다라』, 2013, 문학과지성사)은 가장 특이점에 놓인 작품이다. 시 속에서 그의 혼(사북)과 몸(황지)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문제는〈그것〉이 앎의 대상이 되는 즉시 ‘불가능’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우리는〈그것〉을 알 수 없고, 단지〈그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된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러나 이미 되어 있는 것을 안다는 것 또한 어폐가 있다. 그 또한 앎이며, 따라서 ‘긁어 부스럼’이고 ‘평지풍파平地風波’이다. 그렇다고 알지 않으면 ‘되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되어 있는 것 또한 앎이기 때문이다 // 르네 샤르에 의해 ‘영원한 바깥의 흐름’, 혹은 ‘죽음의 유골함’과 가깝지만 ‘혼례 가능한 저 너머’로 명명되는〈그것〉의 자리는 우리가 한 번도 머문 적 없고, 머물 수 없는 곳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찾아지는 곳이다. 이 자리를 기억/보존하고 모험/실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이다.//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실패하는 형식이다.” (이성복,「불가능 시론」) 하여 시「정선」은 이성복이 줄곧 추구한 ‘불가능의 시’와 ‘가능의 시’ 경계에 놓인 아이러니(irony)의극치이다.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느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이성복,「정선」전문

 

  「정선」은, 일상에서 한발 더 나아간 선시(禪詩)의 놀라운비약과 파격을 보인다. 그에게 고유명사“정선, 사북, 영월, 동면, 서면, 아우라지”는, “덧없고 허드레적이고 비시적인 것”의 비유다. 이런 시적 장소는, 언어 당착의 모순어법을 사용하여 ‘무지(無知)’의 깨달음을 얻는다. 불가능의 언어는 초월적 은유의 몸으로 바뀌어“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오라고 하지만,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은, 결코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올 수 없다. 선가(禪家)의 공안(公案)들은 자어상위(自語相違)의 극한을 보인다. 물음의 띠를 비틀어 역설의 답으로 꼬아 붙인 간화선의 화두다. 무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다. 공안은 물음 속에 이미 답이 숨어 있고, 그 답 속에 새로운 물음을 던진다. 노자의도덕경 제1장 첫머리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과 동궤를 이룬다. ‘혼’을 혼이라고 하면 이미 ‘그 혼’이 아니요, ‘몸’을 몸이라고 하면 이미 ‘그 몸’이 ‘그 몸’이 아니다. 그의 시는, 마치, 양자역학의 입자이면서 파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중첩 깨짐은「정선」을 수많은 해석과 정서로 우리를 꿈꾸게 한다.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하여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칠 수 있는 것이다. ‘둘로 나뉘지도 않고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는 무이이 불수일(無二而 不守一)’의 화엄의 골수가 숨었다.「정선」은겁(kalpa/一劫 : 인간계 4억 3,200만 년)의 시공간을 뚫고, 행간의 비약과 환생의 윤회를 거쳐, 서로 몸 바뀐 한바탕 환(幻)의 이야기다. 주체이면서 주체가 아니요,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닌, 모순의 극치이자, 언어도단의 시적 진경을 펼친다. 그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이며, 정선定禪-淨禪이다.

 

 

불가능의 시 · 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비슷한 시집을 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하게 내 보자고 의도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시를 정리해 보면 달라졌음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총 일곱 권의 시집을 보면 아버지에서 출발해서 어머니로, 당신으로, 가족으로, 그리고 사물로 갔던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외국 시인의 시를 놓고 나의 시를 쓰는 실험을 하고, 그리고 결국 여기로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끝났다는 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죽지 않는 한, 지금 내가 나가고 있는 출구가 다시 내가 빠져나가야 할 함정이 되는 겁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은 시 쓰기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쓰는 일이 너무 쉬워졌어요. 그래서 저 자신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뭘 써도 시가 된다? 그건 칭찬이 아닙니다.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는 얘기지요. ―전형철 대담,「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 2014,『끝나지 않는 대화』열화당 p236

 

 

  세계와 대지는 사라지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는 방식으로 사라진다. 허구는 진실에 이르는 시법이다. 경계에 선 자만이 ‘그것을’ 본다. 이성복의 시는 ‘불가능의 가능’에 도달하는 노정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는 사람이 대상을 택할 때 시적인 것을 찾아서는 안”된다. “왜냐면 시적인 것은 이미 시적이기 때문에 시로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일부러 비시적非詩的인 것을 갖고 와서 시를 쓰려 해서도 안”된다. “왜냐면 비시적인 것은 시적인 것을 한 번 뒤집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시적인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항상 눈앞에 있는 것, 혹은 발밑에 있는 것, 즉물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시의 대상이 된다.” 이런 즉(卽)의 시는 이다(is)와 아니다(is not)가 공존한다. 7시집『래여애반다라』에 수록된「뚝지」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다. 이면은 다층적이다. 이 시는, 2004년 5월 29일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동해의 약탈자, 대왕문어〉편을 보고 쓴 시이다. ‘시와 현실’의 문제, ‘삶과 고통’의 문제, ‘은폐와 존재’의 문제, ‘性(성)과 생존’의 문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시적 사유가 확장되며, 이성복 시관(詩觀)을 꿰뚫는 요체다. 부(父)가 모르는 모(母)의 절박성, 모(母)가 모르는 부(父)의 곡절은 아프다. 현실은 은폐의 장소다. 하여 시는 까발린다. 부조리에 대해 까발리고, 고통을 까발리고, 생사의 비밀을 까발린다. 시인은 언제나 신(神)과 사회를 향한 ‘경고음’이자 ‘불편한 입’이다. 제 몸을 “기생충”과 “대왕문어”에게 뜯어 먹히는 수컷「뚝지」와 “암컷”의 행위야말로,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하다가如, 슬픔을 맛보고哀, 맞서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다羅”에 부합한다. 생사성식(生死性食)의 허무야말로 ‘불가능의 가능’을 잉태한 비극 시의 제1 조건이다.

 

1

 

울진 앞바다 깊은 바위틈에 바보 물고기 뚝지가 산다 눈도 입도 멍청하게 생긴 수컷이 저만큼 멍청한 암컷의 배를 만지고 쓰다듬고 자꾸 눌러서 희부연 알덩어리가 뭉게뭉게 쏟아지면, 그 위에 수컷은 밀린 오줌 싸듯이 정액을 쏟아 붓는다 엉겁결에 수정이 끝나면 막무가내로 수컷은 암컷을 밀어내고 제 혼자 배를 까뒤집고 끈끈이 주걱 같은 지느러미로 흐느적흐느적 산소를 불어 넣어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온몸이 쭈그러들어, 쭈그러진 살갗 빼곡히 꼼지락거리는 기생충이 피를 빨아도 떼어낼 생각도 않고, 삼십 일이나 사십 일 단장(斷腸)의 세월이 끝나고 올챙이 꼬리 같은 새끼들이 어리광 부리며 헤엄쳐 나오면 그제야 수컷은 깊은 숨 한번 들이킬 여가도 없이 숨을 거둔다 물론 그 전에라도 배 출출한 무적의 무법자 대왕문어가 수시로 찾아와 육아에 바쁜 수컷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2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3

 

또 어느 때는 수컷 뚝지가 눈 껌벅거리며 쉬임 없이 지느러미 놀려 가지런한 알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 줄 때, 제 짝을 못 구한 암컷 뚝지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와 연애 한번 하자고, 한 번만 하자고 졸라대지만, 수컷은 관심이 없다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수컷은 막무가내로 암컷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치근덕거렸던가는 그 또한 대왕문어의 밥이 되어 뱃가죽 터지고 사지가 너덜거려야 알 수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애무해주지 않아 쏟아보지도 못한 알들이 무더기무더기 깊은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4

 

뚝지만 잡아먹다가도 영 입맛이 없고 괜시리 성질 더러워지는 날에는 대왕문어 두 마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다가 두 마리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이 죽음을 잡아먹으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이성복,「뚝지」전문

 

  “고통” 속에서 너덜거리는 찢긴 뱃가죽을 움켜잡고 죽어가는 수컷 뚝지는, 전 시대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시사적topical 인유인「뚝지」는 중의적이다. 인과를 찾을 수 없는 절대 고독자 ‘뚝지’의 행위는 되레 성스럽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 속의 “알”의 보호는, 인간의 자식 사랑만큼이나 애절하다. 대왕문어에게 제 아내와 새끼를 보호하고자 한 ‘아비’의 책임감은 결사적이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고 죽어가는 뚝지는, 생사에 대한 알레고리다. ‘물고기 뚝지’가 그렇듯, 모든 생태적인 삶은, 고해(苦海)다. 먹이사슬의 전 과정은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의 때늦은 후회의 중얼거림으로 끝난다. 천지-자연은 불인(不仁)하다. 하여 선악은 존재하지 않고, 가해자인 ‘대왕문어’와 피해자인 뚝지만 존재할 뿐이다. 아니 “뚝지만 잡아먹다가도 영 입맛이 없고 괜시리 성질 더러워지는 날에는 대왕문어 두 마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다가 두 마리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이 죽음을 잡아먹으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알고 보면 지구는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다가, 홀연, 모른 채 지나가는 무심-무위의 세계다.

 

  그 어떤 분석적 문장도 이성복의 시 세계를 전체적으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의 시는 특징적으로 “기채간(氣彩間)”에 있다. 고통과 사랑의 글쓰기, 혹은 “현실 언어와 문학 언어, 현실의 공간과 문학의 공간이 다르다는 인식과 이러한 공간적 거리감으로 인해 생겨난 문학이 삶의 변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문학적 윤리 의식과의 거리두기, 그리고 이로 인한 미학적 조건으로서의 수동성은 이성복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다.”(김재민,「이성복 시의 상징시학 연구―이원성에 대한 접근 방식을 중심으로」) 그런가 하면, 라캉의 말처럼, 기표가 기의 위에 미끄러지고 대체되면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성복의 시는 중첩 은유이자 진실의 위장술이다. 낡고 관습적인 예술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닮음을 거부하고, 고정된 의식을 버리고, 불안한 모호성을 추구한다. 현실과 환상, 사적 언어와 공적 언어 사이를 횡단한다. “구체적인 삶의 실재에 대한 응시.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사유. 반성적 존재 사유로서의 숭고 시학은 이성복 시론의 핵심이다.”(이철주,「비교문학적 관점에서 본 이성복 시론 연구-하이데거 시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 현대시의 커다란 흐름은 탐미주의와 현실 의식을 바탕으로 뻗어 나와 두 흐름이 이성복에게 모아져 모험을 찾아 떠나는 최근의 시인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한 연구자의 말(김인환,「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권의 시집 평」,『시인세계』2005년 여름호)은 여전히 유효한 데가 있다. 서정과 현실, 실험 사이를 유영하는 그의 시는 현상 세계를 사적 언어와 공적 언어 사이에 펼쳐놓는다. 언어의 전경을 비추어 배후를 은닉하는 그의 언어는 사물의 탯줄이 시의 배꼽에 연결된 생기(生起)에 닿아 있다. 무한한 미시의 이미지들로 언어의 뇌관을 터뜨려 상상력을 폭발시킨다. 그의 시는 존재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는 바깥에 묶는다. 중심을 꿰뚫는 그의 초기 시는, 역사와 시대의 부조리를 방편으로 삼는다. 사랑과 이별의 경계를 찌른 중기 역시, 말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된다. 행간을 보면 그 시인을 알 수 있듯, 그의 언어는 현대시의 방향을 가리키는 조타수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세계의 진실을, 시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의 양자역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말과 말 사이, 뜻과 뜻 사이, 그 틈입에서 입자와 파동을 중첩해 놓는다. 터널링 효과tunneling effect처럼, 전통적인 시적 언어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시적 도약을 통해 뚫고 지나간다. 겹치고 교차하는 복잡계를 놀라운 방식으로 단순화시킨다. 이성복은 ‘심연을 응시하는 결정적인 시선’(이택광,「불가능한 시, 그러나…: 바디우의 시론」)이다. ‘불가능의 시’를 통해 끝없이 ‘가능성’을 확장한, 이 시대 예술을 자각한 몇 안 되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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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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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다는 섬을 안고 | 작성시간 25.08.30 반갑습니다
  • 작성자김동원 | 작성시간 25.08.30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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