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징후와 맥락의 시
김동원 시인·평론가
예감, 혹은 데몬Demon과 영귀靈鬼들의 귀엣말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황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 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 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형도, 1988년「짧은 여행의 기록」중에서.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시인의 이유”를 아는가?스물아홉의 비가(悲歌)이자 멜랑콜리커인 기형도는 한국현대시사에서 하나의 구멍이다.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에서 길어올린 “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파울 첼란)이다. 기형도의 시는 불길한 예감으로 휘몰려오는 검은 먹구름과 시대의 폭압에 억눌려 미저러블miserable한 폐허의 노래다. 사회적, 심리적 현실에 대한 절망과 고뇌의 끝간 데다. 그런 “기형도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견디는 시의 강렬한 내구력이다. 그의 시 내부에서 떠돌고 있는 끊임없는 죽음에의 예감. 우리는 기형도의 시 도처에서 그 예감의 색깔로 물든 어느 푸른 저녁의 축축하고 불길한 안개를 만난다. 시인은 이미 그의 시 속에서 충분한 죽음을 살았다. (…) 그러므로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들이다. 죽음에의 예감으로 끝없이 죽음 이후의 삶을 연장해가는 언어. 지금까지 우리 시에서 죽음과 절망을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았던, 그리고 그것을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의 성(城)으로 쌓아올렸던 시인은 없었다. 기형도, 그토록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혹은 질병의 이름.”(『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1993 표사)은 따로 없었다. 당시 기형도(1960~1989, 경기도 안성 출생)는 중앙일보 기자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서울 종로 파고다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마주한 부음이다. 그해 5월 문단 지인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 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1989, 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된다. “시인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부 비평가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자,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젊은 비평가와 시인들에게 가장 많이 주목받은 시집이 되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 한 편 한 편은, 새로운 고전으로 우리 문단에 자리 잡고 있다.”(1989,『현대시세계』)
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의 시집 제명과 해설은 당대의 예각적인 비평가 김현이 썼다. 기형도의 시는 음산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가을 들녘의 흔들리는 수숫대 같다. 예민한 자의식의 불안한 중얼거림이다. 가난을 체감한 슬픈 시대의 풍량계다. 죽음에의 예감과 비감으로 가득 찬 우울한 음조다. 억압된 사회의 부조리에 눌린 압화다. 무력한 자의 자폐적 나르시즘이다. 하여, 기형도의 시는 좌절과 부끄러움의 고백록이자 참회록이다. 모호한, 그의 비극적 행간은 끊임없이 묘지를 배회한다. 암울한 시대의 몽유록(夢遊錄)이자 부정(성)의 시학이다. 서정적 풍경 묘사에는 기묘한 홀림이 있다. 왜 그에게만 유독 ‘그것이’ 들렸을까. 불가해한 비밀의 틈입에서 ‘삐죽’ 올라온 실존은 무엇이었을까. 일상의 전복적 풍경 속에 버무린 잠언은 독창적 아이러니이다. 비틀린 도시적 감성은 낭만적 비극을 낳았다. 그의 시에는 예언의 단정과 들림이 있다. 독특한 시법인 양행 걸침은 그에게서 완성된다. 행과 행 사이의 속도와 긴장미를 극대화한다. 기형도의 시는 사랑과 이별 사이, 그리고 고독의 미학이다. 영원히 어둠 속에 떠돌 수밖에 없는 데몬Demon과 영귀(靈鬼)들의 귀엣말이다. 몸 없는 것들의 환(幻)의 세계와 부재의 장소로 지목되는 기형도의 판타스틱한 시적 테러는 신경에 눌린 ‘내면적 자아’의 분출이자, 동시대인의 폭력 구조에 대한 시그널로 읽힌다.
푸른 저녁의 영감靈感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다.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기형도,『문학사상』1985년 12월호,「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
1985년『문학사상』12월 호에서 기형도의「어느 푸른 저녁」을 만났을 때, 이상하게도 릴케의『말테의 수기』와 네루다의「시」와 파울 첼란이 겹쳐졌다. 이 두렵고 설렘의 경이로움은 시적 영감(靈感)으로 다가왔고, 초기 이성복의 비극적 파토스가 떠올랐다. 이런 이미지의 겹침은 보들레르의 기괴(奇怪)한『파리의 우울』에 접목되어 묘한 기시감으로 살아났다. 아마도 그의 다중적 자아는‘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거나,‘낯선 익숙함’으로서 언캐니uncanny한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여「어느 푸른 저녁」속에는 “이상하기도”한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의” 영적 목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시공간의 열림은 찰나에 일어난다. 시적 주체와 대상이 일체가 되는 순간, 어떤 연속적 흐름이 도래한다. 만약, 그 순간의 시와 시학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만날 수는 없다.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형도,「어느 푸른 저녁」전문
푸른 저녁은 아름답고 신비롭고 모호하다. “검고 마른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 걸어오고 있’는 풍경은 가히 몽환적이다. 이런 현상은, 현실의 세계가 시적 세계로 변형되는 순간 일어난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 서로를 통과해가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르자. 서정시에서 이러한 기척이나 예감은 모순과 부조화를 극대화한다. 하여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인다. 풍경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인간은 “그런 때를” 죽음이라고 착각한다. 기형도의 이런 추체험은 ‘유령’적이며,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보들레르적 은유에 속한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거리를 그는 본다. 그세계는 일종의 몽유(夢遊)이자 판타시아(fantasia)이다. 이런 익명의 세계는 그늘에 숨어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푸른 유리병” 속에서 비밀로 감춰진다. 하여 그는 우리에게 일상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반문한다. 그렇겠다.“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가는 자연의 비밀은 얼마나 많은가.“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스쳐 갈 뿐이다. 마치 영화 속 꿈의 장면처럼 “모자를” 쓰고, 굴절된 이미지에 뒤엉켜 “서로들 통과해” 버린다. “그러나 /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투명 인간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 영원히 신비로운 풍경으로 남을 따름이다. 블루blue는 풍경과 상처, 신화와 현실에 대한 ‘거리의 파토스’(니체)이다.
묘사, 혹은 리얼리티
기차 소리여, 나는 아예 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캄캄한 정전의 필라멘트였지. 아니 하나의 전율로서 소스라치는 일년초 식물이었는지 몰라. 언제나 곁에서 셀로판지처럼 구겨지는 나의 어깨를 무겁고 쓸쓸한 너의 소리가 장중히 손바닥을 짚을 때마다 나는 왜 그리 슬프고 황량한 마음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나의 선천적인 소극성 때문이었으리라. 처음부터 떠나기 저어했던 나는 가장 힘없고 곤고한 자에게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적재하던 너를 나의 한 가지 궁핍으로서 남아 있어야 하는 역설적 변명으로 시도하며, 나의 유약함을 흔들어 네가 멀리 골목을 돌아 굴다리를 스쳐 소리만 남기고 사라진 후에야 조용히 귀로 하던 내 오랜 습성을 너는 알리라. ―기형도,「참회록」1982년 메모 중에서.
기형도의「위험한 家系 · 1969」는 1986년『시운동』8집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시적 상황은 1969년 부친의 중풍에서 촉발한다. 급속한 가계의 몰락으로 모친은 장사를, 누이는 공장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 시는 일 개인의 상처가 어떻게 기억 속에서 실존적 리얼리티의 형태로 묘사되는지를 실감나게 묘파하고 있다. 상황에 투영된 현실은 ‘날 이미지’로 행간을 가득 채운다. 묘사와 서사의 차이에 있어 “묘사란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 형식이며, 서사는 사건의 의미 있는 시간적 과정을 제시하는 형식이다.”(오규원『현대시작법』) 하여, 이 시는 감각적이면서도 암시적인 기법으로 이미지를 생동감있게 처리한다.기형도의「위험한 家系 · 1969」는 가족사적 고백의 형식을 띤다. 이런 개인적 가족 서사는, 기형도에 와서 사회적 명암과 연결되어 그 의미가 더욱 증폭된다. 시대 상황의 단순 모사나 진술에 그치지 않고, 시의 테크네가 가일층 에스컬레이션되어 미학적으로 승화되어 있다.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추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추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댕이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 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기형도,「위험한 家系 · 1969」전문
「위험한 家系 · 1969」의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황 묘사는 탁월하다. 이 시는 시인의 열살 무렵의 가족 풍경이다. 이런 60년대 후반의 장면은 “영화의 내러티브”(심보선)의 “사실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구축하고 배열하면서 만들어 가”는 “이상한 리얼리티”를 연상케 한다.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의 이 시는, 여섯 개의 장면으로 분할되어 각각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아버지의 투병 묘사는, 뛰어난 시각적 이미지다. 시행 중간중간 인물들의 치고 빠지는 대사는 시나리오적이다.「위험한 家系 · 1969」속의 가난을 상징한 시적 소재들은 당시 풍속을 약여하게 드러낸다. “남폿불”과 “공책”, “잠바”와 “숭숭 구멍이” 뚫린 “스펀지”가 그것이며, 이는 작품 속에서 사회적 개인적 삶의 관계를 적확하게 형상화하였다. 1연의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라고 말한 대목은 어머니의 가장 아픈 지점인 만큼 애잔하다. 병든 아버지의 죽음의 복선과 불안한 아들의 미래를 함의한다. 2연의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은 일견 그로테스크하고 공감각적이다. 지독한 가난의 상징인 ‘노랗게 곪은 달’도 인상적이지만, 달빛이 아버지의 그림자를 흔드는 놀라운 죽음의 메타포는, 기형도만의 독창적 감성에 속한다. 가난과 우울을 넘어 시인의 비관적 시선의 극점은, “꽃들은 금방 죽어요.”라고 아버지에게 대꾸한 말이다. “꽃 모종”을 심고 싶은 아버지의 희망과 결국 ‘꽃들은 금방 죽는다’는 나의 절망은, 이 시를 지배하는 아픔의 정서와 교직되어 있다. 이런 암시적 묘사는 80년대 민중문학에 비껴 있는, 다른 차원의 가족(가계) 중심의 시로 규정된다.「위험한 家系 · 1969」의 중요한 시법은 열거와 반복을 통해 리듬을 형성한 점이다. 그로 인해 다양한 종결형 어미는 산문조의 지루함을 커버하였다. 투병 중인 아버지와 어린 나,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와 누이로의 전개 방식은, 단편소설의 양식과 구조를 띤다. 그의 세계는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김현)으로 집약된다. 특히 3연의 현실적이면서도 모순된 누이의 화법은 모호한 역설을 낳았다. 아버지에 대한 누이의 부정적 갈등은, 뺨을 때리는 어머니의 행동으로 위기와 절정으로 치닫는다. 회고적 시적 진술은 넋두리와 나레이션을 통해, 연과 연을 더욱 밀착시킨다. 늦봄, 꽃모종, 냉이꽃, 죽은 맨드라미는 시간적 풍경 이동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가장 절묘한 시구는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보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란 4연 끝행이다. 몸을 땅속에 ‘옮겨 심는다’는 이 근원에의 놀라운 촉각적 심상은, 이후 수많은 시인에게 영향을 끼쳤다.「위험한 家系 · 1969」의 심금을 울리는 지점은, 결핍과 가난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5연)이다.6연은 문단 전체가 미학적이다.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아버지의 “굳은 혀.”는 풀릴까. 기막힌 암유다. 그리고 어머니 “언제가 봄이예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예요?”란 이 역설적 질문 또한, 희망을 찾아가는 어린 시인의 설렘의 반어다. 물론 “아버지의 꽃 모종”을 어린 ‘나’로 은유한 것 역시, 기존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시적 표현이다. 기형도의 시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冬至의 불빛”이다.
낭만적 비극성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1889~1951.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철학자)
기형도 시를 횡단하는 두 가지 특징은 낭만적 비극성과 모호한 도시적 감성이다. 그런즉 부정적 시선과 예민함을 동시에 지녔다. 단호한 고백과 강렬한 호흡은 젊은 감수성으로, 열정과 환멸은 행간 속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1989년『현대시세계』에 첫 발표된「빈집」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비극적 노래다.혹자는 이 시가 기형도의 죽음을 예언한 시처럼 읽히는 이유를, “문을 잠그네”, “빈집에 갇혔네”라는 시적 표현 속에서 미루어 짐작한다.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 예언이 되는 경우”(정민)를 고려하면, 시참(詩讖)에 해당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있듯, 말속에 주술적인 힘이 들었음을 이 시는 증거한 셈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의 이런 단정적 진술과 시적 알레고리는 깊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상실은 뼈아픈 법이다. 이는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요절을 암시한 무거운 함의 같다. 사적 언어와 서정이 시대적 비극과 맞물려 우울하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고뇌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 시구이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은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통과한 허무한 풍경이다. 사랑은 안개처럼 몰려와서, 홀연히 바람 속에 사라져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그렇다. 그 무수한 사랑의 촛불들은 이별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몽매했던 자신의 과거를 성찰과 후회로 번민한다. 기형도의 탄주(彈奏)와 부정의 시학 속에 촛불의 밝음은 짧다. 사랑 뒤에 남은 이별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은, 화자에겐 극도의 참담함과 환멸을 가져다준다. 시작 태도의 경건성과 정신적 염결성을 은유한다. 끝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에게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망설임과 공포가 지나간 그 아픈 기억들은, 마침내 시인의 것이 아닌 것들로 무화 된다. 화자는 지금껏 겪은 모든 고뇌를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체념한다. 실존의 외로운 절규는 뼛속을 파고든다. 기형도는 이렇게 시「빈집」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내 사랑 빈집에 갇혀” 죽음의 문을 닫고 만다. 오직「빈집」한 채만 남긴 채, 저승으로 새집을 지으러 떠났다.
시마詩魔
기형도의 시는 세대마다 달리 읽힌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집중적으로 발표된다. 그의 시는 진눈깨비의 언어이자,안개의 시어이다. 죽음의 알레고리이자, 현대시 속의 불멸의 사원이 되었다. 푸른 색채의 언어를 통해 바람의 무늬를 짰다. 그의 시는 절망의 건축이자 희망의 창(窓)이다. 가난의 시어를 뿌렸고, 신화의 열매를 거뒀다. 주체는 언제나 흔들리는 다층적 자아다. 그의 시는 매순간 묘사적 이미지로 확장된다. 실존을 통해‘나’를 물었고, 환멸을 통해 시대에 죽비를 들었다. 그의 시는 투명한 언어였고, 순수의 고백이었다. 하여, 그는 요절로서 영원 속에 별이 되었다. 그의 시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죽었다. 허상을 벗고 표상의 실재를 추구하였다. 때로는 형이상학으로, 때로는 형이하학으로, 그의 시는 생사일근(生死一根)에 닿았다. 죽음을 통해 생을 보았고, 시를 통해 독행(獨行,篤行)을 택했다. 하여 그의 시는 언어를 버리자 시가 되었다. 때론 기억의 방식으로, 때론 유령의 방식으로, 스스로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질투는 나의 힘」전문
시(詩)는 깊어질 때 마(魔)가 낀다. 1989년『현대문학』3월호에 발표된「질투는 나의 힘」은, 요절 이후 스스로에 대한 놀라운 예언 시이다. 그는 죽어서 신화가 될 줄 어찌 알았을까. “흥미롭게도 기형도는 적극적으로 해체의 길을 가지 않았다. 물론 ‘서정시’의 재래적인 문법에서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의 시적 출발은 투명하고 익명적인 도시적 감성의 자리였다.”(이광호,『정거장에서의 충고』p85, 문학과 지성사, 2009) 하여 그의 시는 잠언적이자 영탄적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그는 묘한 선지자(先知者)적 부름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의 영성은 영혼의 갈피를 흔든다. 그의 젊음은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다.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외로운 “개처럼”, 그는 고독을 어둠 속에 새겼다. “허공” 위에서 “머뭇거”리며, “탄식”의 노래를 새겼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그는, 신기하게도 “살아온 날들을” 센다. 하여, 이미 죽은 시인은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긴다고 선언한다. 이승에서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저승에서 노래한다. 그리하여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야, 위대한 자가 될 것임을 예언한다. 살아서는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형도는 스스로 시의 불길에 타버렸다. 불에 타 등신(等身)의 시가 된 것이다.
비명, 그리고 窓과 門 사이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의 검은 눈썹과 노래 잘하던 아름다운 목청이 흙 속에서 썩고 있는 모습도 지금 내 눈에 보인다.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선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최면 식의 싸움판을 벌린 너의 동료 시쟁이들이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生死)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은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김훈,『정거장에서의 충고』(p115, 문학과 지성사, 2009)
절박하다. 그의 시는 비극이다. 바람의 절규다. 고통의 비명이다. 고뇌의 작업이자 곡진의 울림이다. 심연의 통곡이다. 그 울음소리는 너무 깊어 심이(心耳)로만 들린다. 그의 시는 접신의 내림이다. 하여, 어둠 속 중얼거린 홀림이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말이 뒤엉켜 있다. 예언의 불길에 휘감겨 불탄다. 뼈를 태우고 굶주림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 굴욕과 핍진으로 절망에 몸서리친다. 하여, 기형도의 시「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은, 귀(鬼)의 몸을 빌려 쓴 탄식의 시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기형도,「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전문
신은 견딘 자에게만 명시를 준다. 징조와 소명을 깨달은 자만 절규한다. 그는 간절히 자신을 묻고 답했다. 감탄과 호격은 부름과 응답으로 예언처럼 들린다. 1985년『학원』3월호에 발표된「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은, 시류를 좇지 않고, 어두움 속에서 언어의 살점과 뼈를 발랐다. ‘생사’를 관(觀)해 ‘내세’를 전복한다. 죽음의 허(虛)와 삶의 실(實)을 한 축에 꿴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기형도는 빙의(憑依)의 방식으로, 귀(鬼)를 몸에 들인다. 절절하면 홀연 시공이 열린다.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는 귀가 보인다. 그 모순의 형용과 도치, 기형도의 달은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객관적 상관물 ‘달’은 주체의 투영이며,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는 참혹한 삶의 은유다. 끊임없는 죽음의 갈등과 행간의 긴장은 “응시”를 통해, 삶과 대립각을 세워 꿈의 세계로 전이된다.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공포”와 “확신의 즙액”이 된다. 그에게 실존은 절망과 희망의 양립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선험적 호명은, 결국 강렬한 삶의 구조신호다. 그렇겠다.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이겠다. 현생의 부조리와 내생의 “환멸” 구조야말로, 기형도 시의 이중 부정의 중요한 테제가 된다. 한편, 죽음을 호명하면서도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하는 그의 “망가진 꿈들”은, 실존의 파편이자 삶의 애착이다. 하여, 생사는 “모순”의 연속이며 “오르기 위해 떨어지는” 다중의 주체다.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간 누이(17세)의 죽음은 기형도(15세)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주었다. 그것은 “몹쓸 어둠”이자,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비유된다. ‘물’은 육체의 은유이자 “냉각”된 현실이며, “액체”를 관통한 ‘영혼’의 가벼움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은 “죽음을 비웃”지 못하며, “삶을 버려둘” 수 없다. 하여, 삶의 모순은 기형도에게 있어 “공중에” “빛나는 달의 귀”로 “고요히 세상을 엿”듣지만, 끝내 죽음의 바다에 잠기고 만다. 이런 내면의 풍경과 상처는, 80년대 민중의 아픔과 겹쳐, 기형도 시를 ‘부정과 타자(성)의 시학’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창과 문 사이, 그가 있다.
은빛 금속(성)의 판화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런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 김현,『입 속의 검은 잎』해설 중에서
몇 편의 텍스트로 기형도 시의 전체를 분석할 수는 없다. 이미 신화가 된 그의 명편들은, 작품 그 자체가 아우라다. “기형도의 리얼리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김현) 하여, 그의 죽음은 그의 시의 출발점이 된다.「안개」를 통해 이 세계가 “빈 구멍 속에 /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한다. 그의 시가 과거의 시간에 갇힌 이유는 참혹한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때문이리라. 하여 그는 밤마다 공포의 “비명을 지”른다.(「비가2」) 그 불행한 사건 이후, 그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오래된 書籍」) 기형도의 이런 모순은 그의 시 전반을 관통하면서, 줄곧 상실과 부재, 죽음과 회귀, 어둠과 비명 속에서 몸부림친다. 시「도시의 눈」에서 그가 본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로 뛰어가고” 있는 누이의 환시일 것이다.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 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진 흰 눈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묘사다.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속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그의 비가悲歌가 빼곡하다. 끝으로 기형도시의 ‘내면 아이inner child’를 가장 잘 형상화한「바람의 집―겨울 版畫1」을 소개한다.“찬밥처럼 방에 담긴” 유년의 외로움은, 시「엄마 생각」에서 압축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주체와 대상 사이의 트라우마trauma는,「바람의 집―겨울 版畫1」(1982년 발표)에서 절정에 달한다. 불우한 그의 성장기는, 기형도 시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청각의 촉각화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그의 극도의 불안성은, 예민한 부정의 미학으로 승화된다.
내 유년의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기형도,「바람의 집―겨울 版畫1」전문
“정말 무서운 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라, 가난한 아버지와 위태로운 어머니가 무서운 것이다.”(김현) 기형도의 바람은 바람 사이에서 운다. 기형도의 집은 바람이다. 그는 판화에 바람의 울음을 새겨 넣는다. 공포와 불안의 떨림을 내면의 절규로 치받는다. “문풍지”의 울음은 겨울밤에 운다. 보지 못해도, 듣지 못해도, 바람은 어둠 속에서 전혀 다른 울림의 시를 생성해 낸다. 바람은 온갖 비명과 흔적을 무(無)의 지문에 남긴다. “당신의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던 어머니의 촉각적 묘사는, 섬뜩하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모자(母子) 분리 현상의 전형이다. 이 시구는, 어둠 속 청각의 불안한 심리가 그로테스크하다. 마치 한 자 한 자 시구를 판화로 새긴 것처럼 이미지가 각인된다. 그 울음소리는, 동지 밤 은빛 금속 사위어가는 호롱불에 겹쳐, 차갑고 어둡다. 화자의 내면 불안과 공포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에서 극도로 떨린다. “종이장 같은 내 배”,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날리는 “입김”은 지독한 가난과 추위의 은유이다. 기억을 현재화한 이 시는 기형도의 아픈 시간의 상처를 드러낸다. “작은 소년”이 떠올리는 “어머니”와의 추억은, 겨울 판화에 새겨져 그리움이 된다. 하여, 결국 ‘바람의 집’은 죽어서 영원히 모자(母子)가 살‘천국의 집’이 되었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기형도의「바람의 집―겨울 版畫1」은 비극적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