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시뮬라크르
김동원
바다의 입술은 위선적이다
라고 했다가, 바다란 말은 더 폭력적이다라고 고친다
미친놈!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썼다가, 바다는 언어를 가리고 언어로 핀다
다시 바다는,
바다의 몸은 관점의 차이라고 썼다가
들뢰즈에게 들켜, 닮은 것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적는다
꼽추 누이
김동원
천천히 노을빛이 바뀌는 게 다 보였죠
누이는 그 곱사등에 혹등고래를 숨기고 살았죠
나만 보면 까까머리를 쓸어주며
하얀 알사탕을 한 개씩 쥐어 주었죠
밤마다 어느 바다로 가야 할지 몰라
그 누이는 물이 우는 소리를 내었죠
해무海霧가 밀려와 그녀를 감싸기 전까지,
곱사등은 붉은 해를 품고 살았죠
흰 눈이 무너져 내리던 겨울 수평선 위에
누이는 깜박깜박 밤 등댓불 너머
죽어서 슬픈 초승달이 되었죠
흐렁 흐렁 흐렁
김동원
아이고, 자가 누고! 복순 아버지, 순돌이네 큰 애, 뒷집 허갑이 아제 아이가. 신묘년 오징어잡이 한배 탔다가 몽땅 수장水漿된, 가엾은 가엾은 목숨들. 흐렁 흐렁 흐렁 물 밟고 서성이네. 그래 그래 그래…, 뭍은 무탈하니 훨훨 다 벗고 올라 가거래이. 돌아볼 것 없다 카이! 아이고, 이 새벽 뭐 할라꼬 또 흰 수의壽衣 입고 저리들 몰리오노!
집어등集魚燈
김동원
죽어야 사는 여자가 있었네
그 처녀 바닷물 위를 걷고 있었네
앞집 그 남자 오징어 배 타고 나가
수장된 다음 날,
열아홉 고모는 미쳐 갔네
밀려가는 썰물을 붙잡고
흑, 흑, 흑 맨발로 울던 고모
달빛에 고모는 한없이 모래 벌을 걷고 있었네
긴 머리칼은 늘어뜨린 채,
치렁치렁 검은 빛 흔들거린 채,
열아홉 그 고운 고모는
해당화 핀 수평선에 목을 매었네
창포 항 문어잡이
김동원
동해 폭설이야 내리라면 내리라지
갈매기 콧등에나 내리라지
문어하면 봄 문어文魚라
붉은 물결 등대 너머 번지는구나
새벽해야, 수평선 화폭을 칠하라지
구름에 경심줄도 달아야지
물안개에 도래도 달아야지
총각 어부 처녀도 낚아야지
미끼는 가재가 그만이라
청어 내장 더 좋을 시구
아이쿠, 이놈 먹물 뿜는 구나
바다에 시를 찍 찍 갈기는 구나
반들반들 이마가 빛난 문어야
여덟 다리로 빨판으로
칭 칭 칭 저 아침 햇덩이 감아 올려라
섬과 수화
김동원
슬픈 귀머거리는 슬픈 그림자가 있네. 그 아침 동백 꽃에게 다가가, 그녀는 붉은 손가락을 펴 무어라 혼자 수화를 하네. 바람과 바람 사이, 꽃잎의 입술을 더듬네. 그 순간, 바다가 들썩였네. 막힌 울대에서 이상한 물 울음소리를 냈네. 슬픈 귀머거리는 슬픈 그림자가 있네. 손끝에서 우는 슬픈 섬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