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시 추천시

라이터 좀 빌립시다 /이현호 시집

작성자아스트라이아|작성시간16.04.14|조회수1,035 목록 댓글 1

 

 

()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러 옥편을 뒤적대다가

 

조용히 오는 비 령()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 , 나의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날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영하(零下)

 

때마침 너는 내 맘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

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 조용히 오는 비

 

밤새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벤치

 

내 방에는 벤치가 있다

안에 있는 바깥이고 겉을 둘러싼 속이다

외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달라서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난다

벤치는 늘 죽은 나로 비좁다

 

왜 그러고 살아

그러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니 그러는 거지

나였던 나와 나였었던 나의 담소는 마른 화초처럼 권태롭다

다행히 그들은 음악을 애호하는 취향이 같다

 

남향의 집에는 귤빛 볕이 가득하고

벤치의 나와 나는 서로 어깨에 기대 선잠에 든다

나와 내가 장난인 듯 벤치를 집밖으로 들어 옮기려 한다

하지만 벤치는 식물성이고 뿌리가 깊다

우리 중 누군가 몰라 물을 주고 있다

 

나로서의 기억도 잊은 오래된 나는, 오늘도

네가 있어서, 나는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너인 줄 알았다

라는 문장의 뒤를 잇지 못한다

이제 나는 거의 벤치와 하나가 되었다

벤치의 발치에 누워 빤한 운명을 긍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내일이면 벤치는 더욱 비좁겠지만

우리는 모두 벤치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벤치에 앉기 전 잃어버린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벤치는 열린 결말처럼


 

너를 기다리는 동안 새의 이마에 앉았다 간 것의 이름은

 

 

전생이 잠시 놀다 가는 것을 본다

 

구름을 가리킨 손가락이 먹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나간 내일의 도도새가 날았고

 

어제의 비나 눈이 내렸다, 너의 귓불 같은

 

여기 온 적 있는 저녁을 기억하는

 

날개들이 바람의 발목으로 자란다

 

멸종한 새의 울음을 휘파람으로 불러보는 일

 

소문 없이 첨예해지는 우리의 약속

 

멀리 바람의 발목을 어루만지던 작은 언덕이

 

둥글게 접었던 몸을 활엽처럼 편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붉게 어두워지는 정점

 

오늘은 는개 흩날리고, 너의 솜털 같은

 

널 만나지 않고도 날아오르는 것들에게 경례한다

 

기다림이 늦도록 앓는 지병이 됐을 때

 

새의 이마를 털어주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자운영 | 작성시간 16.04.15 다 가라 앉히고 웃물같은 정서 독자도 함께 젖게 하네요. 아트라스님 좋은글 소개, 고맙게 읽고 갑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