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넘지 못하고 / 송승언
그러나, 매 순간 나를 관통하는 빛
창이 열리면 의자에 앉았다 빛 닿은 자리마다 얼룩이었다
담장 너머 이웃집은 근사한 요새 같았다
이웃집의 창은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의 내부는 환할까 알 수 없었다 내 방은 빛에 갇혀 깜깜하다
어제는 교회 가는 날 그것도 모르고 방에 있었지
오늘 교회에 가면 내일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다
좋은 곳은 이웃집보다 근사할까 알 수 없었고
좋은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좋은 곳을 상상하지 못했다
빛의 문제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이웃집의 커튼이 공중으로 간다
의자에 앉으면 창이 열리고
열린 창으로 보이는 건 열린 창 너머의 열린 창 열린 창으로 보이는 이웃집의 이웃집
이웃집의 이웃집 앞에 일어선 담장이 이웃집 안으로 그늘을 구부린다
풍향계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녹음된 천사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커브
창이 없으면 그림도 없지 그림이 없으면 나도 없다 문 앞에 지워진 발자국 쏟아지는
너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입을 벌린다 그것은 내게 없는 표정
어쩜 저렇게 환할까 치아 사이로 펼쳐진 복도를 따라서 하나 둘 둘 하나
복도는 어둠이고, 복도 끝은 하얀 방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창과 복도는 없고 따라서 울리는 둘 하나 하나 둘
복도를 공유하는 많은 방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손잡이를 돌리면 잠겨 있고 손잡이를 돌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개방되는 문
벽 한가득 걸려 있는 얼굴들이 새하얗게
복도 끝으로 휘어진 그늘을 보았다
창을 열어 몸을 내밀었다
입은 벌어지고
투명한 입에 들어차는 여름 둘 하나 하나 하나
셰이프시프터
전생을 생각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들이 과거로 유폐되고 있었다
최초의 마을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 골목을 따라 길어지는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어두워졌다
담장이 알 수 없는 풍향을 제시했기에 계절의 문턱에 걸려 내가 넘어졌다 꽃이 피면 꽃이 되고 나비가 앉으면 나비가 되라는 주문이 있어 바깥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의 방은 나를 가둘 만큼 넓지 못해서 너의 방을 떠돌았다 네가 원한다면 몸을 흔들며 커튼이 되고 테이블과 의자가 되고 네 손에 들린 피 묻은 나이프가 되는 일 그것이 문제되는가 내가 있기 전부터 여기 있던 사물들인데 네 손이 내게 닿으면 네 손이 되어 네 의자를 만지고 그 자리에 누가 앉을지 논하는 일
너는 테이블에서 나이프를 진전시킨다 나를 삼키고 네가 되려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너는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돌의 감정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애초에 배운 게 없으니 어떤 사물에도 레테르를 붙이지 않기로 오늘 식단에 대해 침묵하기로 음식이 어떠했더라도 그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므로
옴짝달싹하지 않고 싶다 더는 네가 불러도 가지 않고 싶다 차갑더라도 여기 머물고 뜨겁더라도 여기 머물기로 한다 너에게 호명되지 않는 위치에서 너를 호명하지 않기로 한다 애초에 남이니까 남 아닌 것으로 위장하지 말기로
내 속에 무슨 금속성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내 배에 귀를 대면 알 것이니 내 속은 단단한 진공으로 되어 있다 가장 날카로운 금속이 될 가능성은 그 진공 속에서 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예감에 가까운 것이지, 나의 감정은 아니다
네가 너인 까닭은 식탁에서 나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의자에 같이 앉는다면 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다른 것을 주문하기로 한다 목소리와 표정에 감응하는 법 없기로 내가 어떤 것으로 불리는 법 없기로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으로
다만 있다고 한다면 추락하기로, 벼랑에서 떨어져 부서진 상태이기로, 더 부서질 수 없을 파편들로
너와 내가 아닌 모든 자리로 말이 되어 번개가 되어 일용할 만나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