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시집 중 /
化飛, 그날이 오면 / 김선우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머리채를 묶은 후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처음처럼
눕겠네 꽃의 은하에 무수한 눈부처와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
하늘을 보아야지
당신을 보아야지
화, 비, 화, 비,
내 눈동자에 마지막 담는 풍경이
흩날리는 꽃 속의 당신이길 원해서
그때쯤이면 당신도 풍경이 되길 원하네
그날이 오면
내게 필요한 건
이름 붙이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와
당신뿐
당신뿐
대지여
음, 파, 음, 파 om의 수영장
정확한 분절음으로
숨쉬기 요령을 가르치는 수영 강사의 입술에
붉은 체리를 물려주고파
체리 값으로 초록빛 도마뱀을 내놓으라 하고파
음, 파, 음, 파,
들숨과 날숨이 서로를 꽉 깨문 채
음- 참고
파- 깨뜨려라
음- 견디고
파- 깨뜨려라
매번 깨지며 깨뜨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는 듯 으음, 파, 음, 파하
음- 그대의 다음 시간인 나
파- 나의 다음 시간인 그대
깨고 깨뜨리고 깨고 깨뜨리고
자꾸 끊기는 꼬리를 입에 꼭 문 채
도마뱀 초록이 수면을 뱅뱅 돌며
음, 파, 음, 파
이런 이별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을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 트리와 어린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1월이 시작되었으니 12월이 온다.
2월의 유리불씨와 3월의 진홍꽃잎과 4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5월의 찔레가시와 6월의 푸른 뱀과 7월의 별과 꿀, 8월의 우주먼지와 9월의 청동거울과 억새가 타는 10월의 무인도와 11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12월이 와서,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안녕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1월이 시작되면, 12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10년 동안 나는 참 좋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보칼리제, om 0:00
“영혼들끼리 부딪쳐 깨지는 사태는 하느님이라도 감당 못 하죠”
공기 속에 크고 작은 수많은 혈관들이 생긴다. 여러 옥타브를 넘나들며 흘러 드나드는 공기의 파동……
오늘의 밥그릇에 낯선 혈액이 가득합니다.
그날의 슬픔 때문에 나의 생이 길어졌어요.
그날은 다 다른 날.
당신의 그날은 당신 속에 있지요.
붉은 거울이 내걸린 하늘입니다. 거울 속에서 걸어 나온 미래의 바람이 둥글게 입을 열어 노래하네요. 뼈마디 어그러지는 소리들 공중에 가득합니다. 비정한 시간이 지은 집이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몸이로군요.
내가 당신을 안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모든 곳에 있고 아무 곳에서나 열리지는 않는
뜨겁고 냉정한 口音의 세계
태어날 때와 죽을 때처럼
사람으로서의 생이 끝난 후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우주를 오가는 당신을 느낀다. 응, 좋다 참 좋다. 슬렁슬렁 소요하는 당신의 발자국을 손 짚어 따라가며 이 시간이 지난다. 따스한 발자국에 닿는 차가운 내손, 문득 당신이 돌아본다. 미안하다. 내 손이 아직 차갑다.
죽을 때와 되돌아올 때처럼
미천한 나의 유일한 자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언제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 모든 시는 진혼가이자 사랑의 노래임을 내가 아직 믿고 있다는 것.
인연 맞는 때가 오면 다시 만날 거예요. 사람으로건 사람 아닌 것으로건 숨결 있는 모든 세상 어느 작은 조각으로든 하아, 강가 모래 속 반짝이는 한 점 비늘 같은 당신을 나는 알아챌 겁니다. 가만히 당신 옆으로 가 한 손을 잡을 거예요. 그때 당신, 나를 알아보길, 왔군요…… 그래요……
무수히 얽힌 공기의 터널을 통과해온 구음들로 가득한 시간
어둠 속의 빛 속의
지금 이 순간 속의
싸락눈 /
싸그락싸그락 싸락눈 내리는 밤하늘엔 마른 눈송이들 부딪는 정전기가 별똥처럼 반짝이고
소녀는 그런 하늘이 그렇게나 좋았다
싸락눈은 마른눈 싸락눈 내리는 밤은 마른 밤……
눈이 늘 젖어 있는 어미를 다독이며 소녀가 싸락싸락 노래 불렀다
일기장 펼쳐 빈 페이지 가득 싸락눈을 받는 게 좋았다 싸락눈은 마른눈 공책이 젖지 않지 싸락눈 털어낸 노트에 침 발라 연필 꼭꼭 눌러가며 병을 앓고 있다 쓰지 않고 병과 싸우고 있다고 쓰는 게 또 그렇게나 좋았다
쟁쟁쟁 챙강챙강 차릉차르릉 싸락눈 부딪는 소리 밤하늘에 가득하면 외롭지 않은 밤이라서 좋았다
부딪히고 멍들면서도 저렇게 예쁘구나 살아 있어라 살아서 반짝이는 싸락눈을 받을 테야 정전기 이는 밤하늘 한 칸을 반듯한 모눈종이로 간직하고픈 소녀는 싸락눈 내리는 밤을 오려 심장 깊은 방문에 붙여두었다
질척이는 젖은 날들 속에 싸륵싸르륵 마른날이 심장 제일 깊은 부적처럼 나부껴서 소녀는 그렇게나 눈이 검고 맑았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시집 중 김선우 2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도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대포항 /
항구에 막 닿은 ‘대양호’에서
여자가 제 키만 한 방어를 받아 내렸다
활처럼 꿈을 당긴 등 푸른 아침 바다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물방울을 쏘아올리는 사이 환한 비린내,
여자의 아랫배를 지나 내 종아리까지 날아와 박힌
푸른 물방울 화살촉을 조심스레 뽑아 든다
손금 위에 얹힌 물방울 하나 속에서
수천의 방어 떼가 폭풍처럼 울고
오냐오냐
여자가 큰 칼을 들어
방어의 은빛 아가미를 내리쳤다
오냐, 내가 너를 다시 낳으마,
여자가 등 푸른 물속으로 치마를 걷으며 들어간다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마리 은빛 방어들,
정오의 태양으로 헤엄쳐 간다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