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국자감에 숨어 있는 베트남의 유교
국자감 국가위해 일할 인재 양성기관
유교 수용하며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 상징의 규문각 세워...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이라면 문묘국자감을 찾는다. 하지만 베트남의 문묘국자감을 제대로 소화해 내기란 만만치가 않다. 베트남적인 유교를 드러내는 정신적 가치들이 모두 한문으로 된 대귀시(對句詩)와 대자(大字) 그리고 혹은 횡피(橫被) 및 사자성어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설사 한문을 독해할 수 있다고 해도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적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중국과 한국유교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면 베트남유교의 특징을 알아 낼 수가 없다.
문묘국자감에 베트남적인 유교의 특징이 맨 먼저 표출되는 곳이 바로 사주(四柱)에 걸려있는 대귀시에 있다. 문묘 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 이 사주 사이를 통과해야한다. 사주란 네 개의 기둥을 말한다. 이 사주 중에서 가운데 두 개의 기둥이 가장 중심이 되는 기둥이다. 왼쪽 기둥 위에 새겨져 있는 대구시의 한 편이 바로 베트남유교의 특징을 말 해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聖卽天也不可階而昇,성즉천야불가계이승서다] 성(聖)은 곧 하늘(天味)이라 사닥다리를 타고도 오를 수 없다. 여기서 성(聖)이란 성인(聖人)을 가리키고, 이 성인은 바로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문묘(文廟)라는 뜻이 공자[文]를 모시고 있는 사당[廟]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聖卽天也不可階而昇 성즉천야불가계이습] 중에서 불가계이승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닥다리를 놓고도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을 가진 [不可階而昇불가계이승]은 다른 곳이 아닌 공자의 어록이 담겨져 있는 논어, 장편에서 인용했다. 진자금과 자공과의 대화에서 등장한다. 자공이 진자금에게 공자를 일컬어 자신과 비교함 수 없는 분이기에 夫子之 不可及也 부자지불가급야, 猶天之不可階而昇也 유천지불가계이승야 라고 했다. 여기서 夫子(부자)는 공자를 뜻한다. “선생님께 미칠 수 없는 분이심은 사닥다리를 놓아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해의하면 [성즉천야불가계이승]은 성인인 공자는 즉 하늘과 같은 존재이라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간다 한들 오를 수가 없을 만큼 위대하고 높은 분이시다.
베트남에서는 공자를 이처럼 존승하고 있다. 필자는 이 대귀시 한편이 감히 베트남 유교의 특징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트남의 유학(儒學)의 목표는 오로지 성인공자를 존승할 따름이지 한국이나 중국처럼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려고 격불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수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옮기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공자를 모시는 베트남의 문묘에 들어가면 알 수 있다. 그곳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사배(四配)를 두었는데 우측에 안자와 자사 그리고 좌측에 맹자와 증자의 상(像)이 세워겨 있다. 여기서 특이 것은 베트남 문묘에는 중국이나 한국처럼 공자와 사배 외에 다른 성인을 모셔 놓고 배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트남에서 굳이 성인을 들자하면 국자감의 초대학장인 주반안(Chu Văn An, 朱文安)이 성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베트남인이 지해가 부족하거나 열심이 부족해서 성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는 유학의 목표가 성인됨의 추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설총, 최치원, 이색, 정몽주로해서 조선중기 때 조선유학의 최고 절정시기의 퇴계와 율곡 등 무려 성인이 18명이나 나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유교에 대해서 가장 명망 높은 하버드대 중국인두 웨이밍 교수는 조선유학자 퇴계와 율곡을 두고 이 두 분을 모르고는 유학의 핵심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퇴계와 율곡의 학문의 깊이와 인품을 극찬했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유교의 목표는 무엇이었올까? 그것은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와 같은 성인을 높이 받듣어 모시는 가운데서 유학의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교육시켜 현재(賢才)를 배양하여 나라들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이것을 위해 과시( 科試)가 열렸던 것이다. 교육의 장소는 바로 국자감의 태학실이다. 문묘국자감의 태학실 2층에 올라가면 국자감올 세운 리연똥(Ly Nhan Tông, 李仁宗)의 워패 옆에 관련된 대귀시가 걸려있다.
育英才而使能國子監高懸模範 육영재이사능국자감고현모범
(국자감에서는) 영재(英才)를 양육하고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사용하게 되니, 국자감은 높이 모범으로 세워져 있다. 이 부분은 맹자의 진심편 상장구 20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孟子曰 君子有三樂 王天下不與存焉 맹자왈 군자유삼락 왕천하불여존언
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 부모구존형제무고일락야
仰不愧於天俯不作於人二樂也 앙불괴어천부부작어인이락야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 득천하영재이교육삼락야
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군자유삼락이왕천하불여존언
맹자께서는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의 즐겨음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이에 들어있지 않다.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며 형체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음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둘 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이를 교육하는 것이 셋 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베트남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단지 현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현재(賢才)가 국가의 원기(元氣)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배양해서 국사를 강하게 하기 위해 이들을 선취(先取)하는데 최우선을 두고 있다. 태학실 주 반 안의 위패 뒤편에 베트남유교가 지향하는 바를 턴년중(Thân Nhân Trung, 1484년)의 아래의 글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賢才國家之元氣 현재국가지원기
元氣盛則國勢强以隆 원기성칙국세강이융
元氣餒則國勢弱以汚 원기뇌칙국세약이오
是以聖帝明王莫不以 시이성제명왕막물이
育才取士培植元氣爲先務世 육재취사배식원기위선무야
원기가 왕성하던 국세가 강하고 나라가 크게 될 것이요 원기가 파리하면 국세가 약하고 나라가 더럽혀질 것이다. 그래서 성제명왕은 재능 있는 자를 육성하고 학자(士)를 발탁하여 원기를 배양하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영재(英才) 혹은 현재(賢才)는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된 유학자인 사대부를 가리킨다. 베트남은 유교를 수용해도 조선 처럼 사대부가 국왕을 좌지우지 하는 나라로 만들지 않았다. 그것과 관련되는 대구(對句)가 사주(四株)를 지나 문묘 문을 통과한 후 되를 돌아보면 문묘문 뒤편에 걸러있다.
士夫報答謂何哉朝廷選就之恩國家崇尙之意 사부보답위하재조정선취지은국가숭상지의
사대부는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 조정이 발탁해 준 은덕과 나라가 숭상하는 뜻을.
사대부는 조정에 의해 선택받았으니 어떻게 보은할 것인를 생각하는 것이 도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 않고 왕실이나 조정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권좌를 찬탈한다면 그는 더 이상 사대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의 영예는 대단했다. 조정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진사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국자감인 성균관에는 진사비가 딱하나 뿐인 반 면 베트남의 국자감에는 진사비가 무려 82개가 그것도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2015년 3월 10일 이 진사비석이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과시에 합격하여 진사에 급제한 사대부의 명예가 높은 만큼 그 들의 책임과 사명 또한 이에 비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왕실과 조정에 보답해야 했다. 베트남은 조선시대의 유교왕국에서 볼 수 있었던 왕당파 대 사대부파 다시 사대부파 가운데서 도 여러 갈래의 당파로 갈라져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며 충돌을 일삼은 그런 완고한 사대부왕국이 아니었다. 베트남의 사대부는 단지 덕德과 재才들 갖춘 현재資才로서 국가발전을 위해 사용되는 원기의 역할을 담당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베트남 사대부의 정체성을 잘 발해주는 대귀시가 역시 문묘문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吾儒要通經要識時無拘因也尙思聖訓永相敦
오유요통경요식시무구고야상사성훈영상돈
-우리의 유교는 경전을올 달통하는 것을 요하며,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요하며, 고집을 부리지 아니하며, 오히려 성인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영원토록 힘써 바라보는 것이다.
한국은 사대부들에 의해 왕이 죽음을 당하거나 또는 사대부들 끼리 당파가 극심하게 나누어져 상소, 음모, 역모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화(士禍)로 점철된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 베트남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없었다. 베트남은 왕과 사대부와의 관계가 오륜(五倫) 가운데 첫 번째 관계인 군산유의(君臣有系)의 덕목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그리고 사대부들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무도하게 깨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도 분쟁과 정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왕과 사대부들과의 세력 다툼이나 사대부들 자기들끼리의 권력 다툼이라는 악순환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베트남이 유교를 수용했으나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을 사대(事大)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대국인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수용했지만 베트남 역시 자기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대등한 입장으로 문명국임을 자랑하기 위해 문묘 국자감 안에 문명을 상징하는 규문각을 세웠으며, 동시에 대국임을 선언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 역시 문묘문 위에 우뚝 세워져 있다.
大國不易敎不變俗旦尊崇之赤信斯文原有用
대국불역교불변속차존숭지역신사문원유용
-대국은 가르침을 바꾸지 아니하고 또한 풍속을 바꾸지 아니하고 역시 그것을 존승하며 이 가르침을 원래대도 믿고 유용한다.
아와 같이 베트남은 스스로들 대국으로 자처하며 비록 베트남이 중국에 비해 영토도 작고 문명의 수준도 뒤쳐져 있지만 항상 중국과 대등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심상준 : 한-베문화교류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