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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상원 소식

[참고]사띠란? - 8.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sati) 마음이 알게 하는 것

작성자향원|작성시간03.10.29|조회수642 목록 댓글 2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cafe.daum.net/vipassana
사념처 수행을 위한 장 - 묘원님 관리
[수행체험담] 보니 거기 세상이 있다 (37) - 후속 자료보충
글쓴이: 묘원
2003/03/15


알아차림을 사띠(Sati)라고 한다. 알아차림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기억이란 뜻이고, 나머지는 같은 내용인데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의깊음, 인식, 의식, 주시, 염(念) 등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이해하다, 안다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다 의 경우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알고 본다는 뜻으로 쓰인다.



알아차림은 기억의 기본 바탕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기억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현전(現前)하는 기억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의식상태에서 깨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서 모든 조건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다. 그러므로 기억이 갖는 의미 또한 매우 크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기억은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연속성의 의미가 있다.



붓다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자는 깨달음의 요소인 알아차림을 할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면 그것을 올바로 알아차린다."



알아차림의 의미는 위빠싸나 수행의 전과정을 거쳐 가장 강조되는 말이며, 위빠싸나 수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말이다. 알아차림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에 제일 처음 등장한다. 알아차림은 팔정도에서도 바른 알아차림[正念]이 있다. 팔정도에서는 정견(正見)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바른 알아차림을 사용한다.



또한 알아차림은 수행자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말하는 오근(五根)에서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를 말할 때 오근의 하나로 알아차림을 말한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근 중에 다른 것들은 많거나 적으면 균형이 깨지지만 오직 알아차림만큼은 다다익선이다.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다.



알아차림을 조금 더 설명하면 팔만 사천 법문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알아차림 하나로 부른다. 팔만 사천 법문은 붓다께서 생존해 계실 때 설한 모든 법문을 통 털어서 상징적인 숫자로 말한 것이다. 바로 이 팔만 사천 법문이란 모두 수행에 관계된 말이다. 왜냐하면 붓다의 궁극적인 말씀은 열반에 있고 열반은 사념처 수행에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팔만 사천 법문은 수행자들의 근기(根氣)에 따라 설하신 내용이라서 방대한 양이 된 것이다. 이 팔만 사천 법문을 요약해서 줄이면 37조도품이다. 이것을 다시 줄이면 팔정도가 된다. 팔정도를 요약하면 계정혜이다. 이 계정혜를 줄이면 바로 알아차림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모든 기본은 알아차림이다.



쉐우민 사야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아차림을 하면 악업을 짓지 않게 되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악업을 짖게 되는데, 손가락을 한번 튀기는 1찰나 간에 꺼테떼떼인이 일어난다. 꺼테떼떼인은 10,000,000×100,000 인데 1찰나 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알아차림도 그렇게 많이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1찰나 간에 내가 나쁜 생각을 한다면 꺼테떼떼인의 많은 악업을 짖게 된다. 만약에 알아차림이 있어서 좋은 생각을 하게되면 그 만큼 많은 선업을 짖게 된다. 그러니 한 순간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쳐서 되겠는가?"



다소는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위빠싸나 수행자라고 한다면 아마 알아차림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수행자가 아닌 다른 경우에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의 알아차림이란 이토록 절대 절명의 것이다. 이것은 미얀마에서 수행하시는 스승의 한결같은 말씀이기도 하셨다.



수행 중에 스승이 말하는 모든 면담내용을 요약하면 알아차림이란 한마디에 귀결된다. 무슨 말에나 "알아차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항상 같은 말인데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와 듣지 않았을 때의 차이는 매우 크다. 수행 중에 알아차림이란 말은 들을 때마다 다르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어서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다.



다른 수행에서는 오직 집중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만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맞이한다. 알아차림은 오온 중에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에 속한다. 또한 선업의 마음의 작용으로 분류가 된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 자체가 선업이므로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고요한 집중에 이르게 하며 그래서 지혜가 나도록 한다.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탐진치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순간은 온전하게 계율을 지키는 셈이다. 알아차리면 되지 계율을 지키려고 특별하게 찾을 필요도 없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행(行)이라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알아차림 혼자서 존재하지 못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식(識)이 함께 일어난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에 분명하게 마음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고 아는 것은 식(識)이라고 하는 마음이 아는 것이다. 이 과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알아차림이란 대상을 "주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시는 알아차림이고 아는 것은 식이라는 다른 마음이 아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 항상 아는 마음인 식이 생략된 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모두 오온이 함께 일어나서 함께 작용하여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식(識)이라는 아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것을 왕에 비유하기도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식이라는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란 행도 아는 마음이란 식과 함께 하여 아는 것이 형성된다. 그래서 식은 왕이고 수, 상, 행이란 마음의 작용은 신하로 불린다. 왕과 신하는 항상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진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알아차림은 대상에 마음을 정확히 기울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팔정도의 정사유의 기능과 유사한 면이 있다.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기울이게 하는 역할로는 같은데 알아차림은 팔정도의 정(定)에 속하므로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기능 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사유는 팔정도의 혜(慧)의 기능으로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보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역할까지를 한다.



그러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에 마음을 정확히 보내서 알게 하는 것이므로 아는 것에서 지혜가 따르게 된다. 알아차림과 지혜는 서로 다른 것이나 바른 알아차림의 결과로 지혜가 생기게 된다. 지혜로 알아차리라는 말은 알아차림이란 행과 아는 마음이란 식이 지혜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에 의해 아는 마음이라는 지혜가 생기는데 이때 의식에 성숙됨에 따라 작은 지혜로부터 큰 지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지혜가 생성된다.



또 한편으로는 알아차림이 일어나는데는 슬기로운 지혜가 있어야 알아차림이란 행이 일어나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지혜는 원인이고 알아차림은 결과이다. 이처럼 알아차림에 의해 지혜가 성숙되기도 하고 지혜가 있어서 알아차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온은 항상 상호간에 함께 작용하면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알아차림을 통해서 바른 견해를 갖고, 독선에 빠지지 않고, 모든 사고를 예방한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갖는 특성의 하나로 계율의 측면과 사고의 측면에서 모든 위험을 막아서 보호해 준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육근의 문지기가 되어 도둑을 막아 준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수용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무엇이나 받아들인다.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에서는 못 받아들일 것이 없다. 적어도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에는 사물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에서는 불목이 없다. 알아차림에서는 탐진치가 없으며 알아차림에는 관용, 자애, 지혜가 있다.


마음은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이 있는데 아는 마음은 선업이고 모르는 마음은 악업이다.
아는 마음은 알아차리는 마음이라서 깨어서 알지만 모르는 마음은 무지의 마음으로 혼돈의 상태에 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을 이성적으로 투명하게 보게 하며 객관적으로 알게 하여 공평무사하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게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에 머무는 것은 행복의 제일 조건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번뇌가 없고 행복이 있다. 알아차림은 비현실적인 꿈으로부터 언제나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여 항상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땅에 닿는 점은 언제나 하나이듯 주시해야할 대상은 언제나 현재이다. 현재만큼 가장 실질적이고 진실한 대상은 없다. 인생이나 세월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현재는 미래를 만드는 원인이다.


수행은 원대한 목표가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실제 수행에서는 목표가 장애가 된다. 그래서 이상은 있으되 바라는 것은 없어야 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바램도 없어야 한다. 그냥 바보처럼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릴 뿐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병이 났을 때도 병이 나으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병이 나으려고 알아차릴 것이 아니라 병이 났을 때 일어난 온갖 현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가야한다. 알아차림은 몸의 병을 나으려는 이런 물질적 현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병을 통해서 몸과 마음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물론 알아차림을 하면 좋아질 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바라는 것 없이 제대로 했을 때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육신의 아픔은 일상적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병든 우리의 마음이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이때도 아픈 마음을 알아차린다. 몰라서 불필요한 고생을 하고 스스로 병을 더 키운다. 수행자가 바라는 것은 몸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마음의 자유로움이다.


몸이 있는 한 병이 비켜갈 수가 없다. 마치 죽음이 우리를 비켜갈 수가 없듯이 병도 마찬가지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살듯이 몸은 병의 먹이고 괴로움의 먹이다. 병과 늙음, 괴로움은 몸을 먹고산다. 그래서 병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이다. 붓다께서도 병이 나고 사리불, 목련존자나 많은 아라한들도 병으로 고생을 한 기록이 나온다. 그 분들은 병이 나면 약을 드시고 다만 알아차렸을 뿐이다. 붓다께서는 설사병으로 반열반에 드셨다. 이 말은 인간과 병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극명한 사건이다.


몸이 아플 때 몸만 아파야지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 한다. 몸과 마음은 다르다. 몸이 아플 때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로 마음까지 아프게 된다. 그래서 즉시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까지 아팠을 때는 늦게라도 마음까지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몸이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면 아픔이 더 커진다.


병은 업의 결과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병이 나면 업의 결과로 그냥 받아들인다. 성자나 범부나 똑같이 병이 나는데 성자는 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나 원망이나 화를 내지 않는다. 누구에게 구타나 모함, 비난, 박해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병으로 그치고, 업의 결과로 그치고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범부는 병이 나면 괴로워하고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서 새로운 업을 만든다. 이것이 성자와 범부의 차이이다.


알아차림은 비정상적인 환청(幻聽)과 환시(幻視)를 바로 알아차리게 한다. 바로 헛것을 헛것으로 알아차리게 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조작하거나 꾸미지 않고 적나라하게 알아차리게 한다. 수행 중에 집중력이 향상되면서 알아차림이 뒤따르지 못하면 혼몽(昏 )한 상태에서 없는 형상을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실재를 본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거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는다. 그런 현상 때문에 일생을 괴로움으로 보내는 수가 있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헛것을 본 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모두 알아차림이 부족한 현상인 것이다.



알아차림은 균형이다. 불균형을 바로잡아 균형을 이루게 하여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이것은 치우침이 없게 하여 중도를 뒷받침한다. 알아차림은 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실제로는 공격적이지 못하다. 다만 적극적이다. 그리고 대상을 앞서서 끌고 나가지 않고 그냥 일어난 대상을 뒤따라가면서 알아차린다. 겉으로는 적극적이지만 속내로는 수동적으로 대상을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지켜보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상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상을 끌고 나가면 호흡을 알아차릴 때 호흡을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것과 같다. 뒤 따라 간다는 것은 호흡이 일어나고 꺼지는 현상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호흡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을 이렇게 뒤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만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때 대상을 뒤따라가며 알아차린다는 표현은 한문으로 수관(隨觀)이라고 한다. 그러나 빨리어 아누빠싸나(anupassanaa)를 수관(隨觀), 또는 응시를 뜻하는데 이 말은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왜냐하면 뒤따라간다고 하면 시차를 달리해서 알아차리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알아차림에 시차를 두어서는 안 된다. 대상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림도 대상과 함께 밀착되어 일어나야 한다.



알아차림에는 순도가 있다. 10%, 50%, 90%, 100% 짜리 여러 가지 순도의 알아차림이 있다. 낮은 순도의 알아차림은 힘이 약한 것이다. 그렇다고 강하다고 높은 순도가 아니다. 정확하게 밀착되었고, 알맞고, 집중력이 있고, 노력하는 마음이 포함될 때가 높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된다. 대상에 깊고 깊지 않고 하는 것은 집중이라는 사마디의 문제다. 순도가 높은 알아차림은 대상이 확대되어서 크고 자세하게 보인다. 이렇게 알았을 때 알아차림이 오래 지속되고 고요함이 생긴다. 그래서 지혜가 난다.


너무 강하게 대상에 집중하면 깊은 집중이 되어 오직 고요함에만 빠지게 된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거나 다른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못 본 척하며 보아야 대상을 흥분하지 않고 실재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이 가볍게 알아차리는 찰나사마디이다. 또는 순간집중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찰나주의는 오직 현재에만 머물러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에 머물되 알아차림이 있으면 가장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지혜가 나는 실용주의가 된다.


알아차림을 할 때 알아차림에 집착하면 유연성이 없어 오히려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할 일이 없어서 하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 수행도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 되듯이 알아차림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이것이나 하자고 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너무 힘들여서 하거나 꼭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노동이 된다. 노동이 되면 힘들어서 싫어진다. 일상의 알아차림은 노동으로 하지 말고 즐겁게 해야 한다. 실제로 노동을 할 때에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알아차림으로 하면 노동이 아니고 그 순간부터 수행으로 바뀐다. 잘하려고 하는 것은 노력이 지나친 것인데 노력이 지나치면 산란해지고 들뜨게 된다. 잘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긴장해서 오히려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을 할 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생각하고 몸의 지, 수, 화, 풍을 알아차린다. 단단함, 부드러움, 가벼움, 무거움, 따뜻함, 차가움 등등을 알아차리면 일도 재미있고 수행도 한다. 힘들거나 싫어지거나 즐거울 때도 알아차리면 이내 일하고 있는 현재로 되돌아 와서 평형감각을 갖는다. 이렇게 일하면 같은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아 일석삼조의 이익이 있다.


알아차림은 불을 피울 때 나무를 비벼서 피우는 것처럼 지속적이고 대상에 밀착하려는 속성이 있다. 나무를 비비다 말다 하면 불을 낼 수가 없다. 계속 비벼서 불을 내듯 알아차림에는 게으름이 없다. 나태함에는 알아차림이 설자리가 없다. 그래서 나태함은 무지이다. 또한 알아차림이 없는 깊은 망상도 무지이다. 망상은 탐진치라는 불선업의 세계이다. 망상을 하고 사는 한 대상을 바로 알 수가 없으며 그래서 어둠의 세계이다. 어두워서 빛이 없어 끝없는 윤회를 계속한다.


알아차림은 물위에 뜬 공처럼 물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 밖으로 튀어 오르지도 않고 대상과 접해 있어야 한다. 대상과 더불어 있지만 대상 속에 함몰되어 있지 않고 대상의 흐름을 따르면서 그런 현상을 알아차린다. 물위에 있으면서 물의 흐름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더불어 있으면서 현재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임무이다. 물이 출렁거릴 때는 출렁거리는 것을 알고, 고요히 머물 때는 고요히 머문 것을 알면 된다.


알아차림은 그냥 알고 말아야지 알고 난 뒤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아는 것 외에 조건이 붙으면 안 된다. 알아차림은 그냥 알고 마는 것이다. 알고 난 뒤에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아라.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결과를 얻으려 하지만 훌륭한 결과는 언제나 눈에 뜨이지 않게 살며시 온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대상과 함께 있어야 된다. 처음에는 모양(빤냐띠)이라는 대상의 중앙에 고리를 단단히 걸어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다음으로 그 대상의 성품(빠라마타)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 일단 모양을 단단히 붙잡고 나서 성품을 알아차리다가 마음이 달아나 버리면 다시 모양부터 붙잡는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타고 오직 욕망의 힘으로 앞으로 굴러간다. 이 욕망의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다. 끝도 없는 무한 질주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이 전차의 브레이크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정확히 겨냥하는 과녁처럼 항상 분명한 표적을 향한다. 알아차림은 방황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대상을 향해 주시하며 집중한다. 알아차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자연적이다. 비상식적인 것은 거칠고 혼란스럽고 자연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비상식적이지 않고 상식이 통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인위적이지 않다. 그래서 억지가 없다.


알아차림은 습관을 바꾸고 욕망의 거친 물결을 건너게 해준다. 알아차림은 불안, 초조, 공포로부터 자유를 준다. 알아차림은 들뜨게 하지 않고 알아차림이 있는 순간부터 고요함이 생긴다. 그래서 긴장이 이완된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유연하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내적 고요함의 상태다. 알아차림은 작용을 하지 않고 비작용을 한다. 어떤 경우에도 대상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객관적으로 대상을 지켜 볼 뿐이다. 그래서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다.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때로는 자신이 차가워진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냉정해진 모습을 느낄 수도 있다. 수행을 하면 자애로워진다더니 냉정한 모습을 알게 될 때 놀라기도 한다. 또는 가족으로부터도 냉정해졌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변화이다. 누구나 수많은 날들 동안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참견하며 살아왔다. 할 일인지 할 말인지도 알 것도 없고 그냥 분별 없이 살다가 이제 대상을 알아차리면서부터 보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항상 자기 감정의 지배를 받다가 이제는 이성적인 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참된 자비가 넘쳐서 흐르게 된다. 그런 과정의 여과를 거쳐야 비로소 바라는 것 없는 온전한 자애가 생겨 더 따뜻해지는 마음이 일어난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화해서 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의식이 진일보해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이것이 바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이것은 수행을 해서 냉정해진 것이 아니라 전에 없던 새로운 의식의 개안이다. 새로운 마음이 열린 것이다. 이때는 냉정해진 자신을 다시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마지막 상황을 다시 알아차려야 한다. 끝이 없다.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다시 시작이다. 그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한다. 무엇을 바라거나 없애려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야 한다. 처음부터 이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모르기도 하겠지만 이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핵심이란 것만 이해하면 된다.


어떤 사람이나 간에 모든 삶은 과정일 뿐이다. 과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다. 냉정해졌다고 느끼게된 것도 과정이다.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살아가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 순간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나 두려움을 가질 것 없다. 두려운 상황도 그 때 뿐이다.


좋은 일에 있어서나 나쁜 일에 있어서나 과정이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결론을 내리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상황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을 지켜 보아야한다. 그런 과정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도 놀라게 될 것이다. 당장에 어떤 변화나 결과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온전하게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알아야 하는 대상이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남을 의식할 겨를이 없다. 이것은 세상의 관심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된다. 내가 세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의 인식의 범위 안에 있지 않다. 내가 세상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와 무관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알아차림으로 스스로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히 밖으로 향해지는 마음도 따뜻하고 자애로워진다. 내 마음이 편해야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고 남에게도 관용과 자애가 생긴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스스로의 문제가 우선 이어야 한다.


수행자가 의식이 고양되어 수행이 발전된다는 것은 지혜가 성숙된 것인데 지혜는 알아차림의 결과로써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각기 다른 지혜가 있겠지만 결국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고 있지 않은 가로 평가될 수 있다. 알아차림은 발전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스승들은 항상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셔서 번뇌가 침입할 틈을 주시지 않는 생활을 하신다. 그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고 소박하고 아름답다.


수행자는 우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고 다음으로 알아차림을 얼마나 지속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따르는 것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하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항상 분명한 앎(Sampaja~n~na)과 함께 있어야 효과적이다. 알아차림의 확실성, 정확성, 지속성은 분명한 앎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에 대해 이로움, 적절함, 분명한 대상, 무지가 없는 앎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상호 필요한 것이다.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나르듯이 상호 의존적이고 기본적인 구성요건이다. 이것은 상승효과의 작용으로 하나보다 둘일 때 효과가 뛰어나다.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결국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위빠싸나에서는 열반을 주장하므로 불사의 문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로 불사의 문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알아차림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영원히 사는 죽음이 없는 곳으로 가는 표가 된다. 이 표를 잃어버리면 계속 낳고 죽고 하는 공동묘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경전에 보면 실제로 죽기 전에 알아차림을 통하여 아라한이 된 경우가 많이 기록되어있다.
물론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지혜가 성숙되고 집착이 끊어진 결과로 오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죽기 전의 상태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평소에 알아차림이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고 실제로 죽을 때도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인간이 죽으면 죽을 때의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사몰심(死沒心)이라고 한다. 이 사몰심이 끝나면 바로 태어나게 하는 마음인 결생심(結生心)이 생긴다. 이 결생심은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마음인데 이것은 사몰심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형성된다. 그래서 죽기 전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죽기 전의 마음의 상태가 고스란히 다음 생으로 가기 때문에 죽기 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가가 문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오직 알아차림 하나이다. 이 상황에서는 알아차림만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혼미하게 죽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을 생생하게 알아차리며 죽으면 최고의 죽음을 맞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해보지 않던 알아차림을 죽기 전에 갑자기 할 수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알아차림은 필요성은 새삼 더 거론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할 때도 정도가 있다. 무엇이나 능력만큼만 해야한다. 없는 힘을 내서 억지로 하면 안 된다. 알아차림이 부족하다고 한탄할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림이 중요하지만 알아차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알아차림을 집착하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언제나 알아차릴 대상은 계속된다. 결론을 내리면 알아차림이 박제되어 버린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최종상황을 또다시 알아차리려는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괴로울 때 괴로움에 빠져서 괴롭다고 결론을 내지 말고 괴로워하고 있는 현재를 다시 알아차리면 된다.


언제나 어떻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결론을 내린 사실을 다시 알아차려야 한다. 모든 대상은 정체하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런 지속적인 흐름 안에서 알아차림을 통해 나라는 유신견(有身見)이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지혜가 나면 매우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때도 알아차림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고 생각에 빠진다. 그러면 퇴보한다. 알아차림으로 인해 지혜가 난 것을 기뻐하지 말고 다시 기뻐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갈 길은 멀다. 아직 해야할 일도 많다. 그래서 좋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아서 집착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얀마에서 귀국을 할 때 쉐우민 사야도께 인사를 드리며 몇 가지 질문이 했었다. 알아차림에 대한 말이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스승의 눈빛엔 잘하고 있다는 자애가 살며시 엿보였다. 스승은 평소에 상대를 잘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면담자는 스승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 자꾸 끊어지는 것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드렸다. 다시 말하면 귀국 선물로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는 묘수나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평상시에도 큰스승은 무슨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스승은 단호하게 내가 알아차리려고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가"하고 말씀하셨다.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다 보면 계속 알아차리게 된다는 말씀이셨다. 알아차림을 하다가 알아차림이 끊어지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면 될 일을 어떻게 하면 안 끊어지게 할까하고 너무 고심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졌는가 보았다. 그래서 너무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었다.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아차림을 집착하지 말란 말씀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스승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고 계실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큰스승이 알고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다. 매우 단순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항상 자신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스승께서는 나를 한번 흘깃 보셨는데 그 눈에는 지혜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이 함께 있었다. 스승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새삼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물러 나와서 귀국을 했다. 그리고 스승의 훌륭함이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인지를 새삼 곱씹어 보았다.


알아차림은 붓다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위빠싸나 사념처 수행이 바로 알아차림으로 구슬을 꿰는 것이고, 벽돌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란 뗏목을 타고 피안으로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말하는 알아차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알아차림은 함께 하는 모든 대상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현재 자기가 마주하는 대상에서 가볍게 떠나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공을 물에 놓으면 빠지지도 않고 물위로 솟지도 않는다. 알아차림은 이렇게 대상에 빠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게 자기 대상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향하게 하고 보호하므로 지혜가 드러난다. 알아차림은 튼튼한 기억인 상(想)과 가깝다. 비유를 들면 튼튼한 기둥이 있는 성문처럼 육근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문지기와 같다고 한다."


일상의 알아차림이 강화되면 다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라야 한다. 알아차림만으로 부족하여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되어야 하듯이 알아차림에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를 때만이 온전한 알아차림이 된다. 신수심법 사념처에 있는 심념처라는 마음은 마음을 사용해서 알아차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고 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다시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완전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느낌, 생각, 행동을 일어나게 한다. 그런데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감각적 쾌락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감각적 쾌락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므로 그 느낌을 통해서 그것을 일으킨 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반드시 그것을 일으킨 것이 탐심 아니면 진심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원인을 몰라도 된다. 차츰 알게 된다.


또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 망상을 했을 때 망상을 한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망상을 한 마음을 다시 알아차린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좋건 싫건 간에 모두 집착으로 망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싫어하는 것도 좋아서 집착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스스로의 무지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행동도 마찬가지다. 모두 마음이 시켜서 행동을 한다. 마음이 시키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눈꺼풀 하나도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으면 갑갑해서 마음이 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는 것이라서 일일이 다 알지를 못한다.


몸은 통나무와 같이 스스로 앉거나 일어나거나 할 수가 없다. 이때 행동을 보고 행동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때 일어난 행동을 보고 마음을 아는 방법이 있고 행동을 하기 전에 행동을 하려고 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이것은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있는 마음을 알고, 일어난 마음을 알고, 일어날 마음을 알아차린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된다. 그래야 원인을 알게되어 점진적으로 악습의 뿌리가 근절된다. 악습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는 선업의 습관이 자리하게 된다. 악습은 알아차림을 통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업의 마음이 알았을 때도 선업인 것을 알아차린다. 선업이라고 알고 거기에 빠져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념처경에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 알아차림의 일곱 가지 이익 >


① 마음의 청정
② 슬픔의 극복
③ 비탄의 극복
④ 육체적인 고통의 소멸
⑤ 정신적인 고뇌의 소멸
⑥ 올바른 길 8정도에 도달함
⑦ 열반의 성취


< 알아차림의 기본사항 >


① 붓다의 교훈을 어기지 않고 알아차림의 수행법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② 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③ 행동이 필요한 때는 즉각 움직이지 말도 우선 움직이지 않은 체 고요하게 마음을 가진다. 왜냐하면 동작을 하기 전에 보다 강한 알아차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움직임에 전심 전력으로 주의 깊게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④ 잔치나 축제나 위험한 경계 등등에 처했을 때라도 몸을 제어하여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⑤ 행, 주, 좌, 와 에서 사념처인 신, 수, 심, 법의 알아차림을 굳건히 해야 한다.


⑥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세에 빈틈없이 기민하게 알아차림을 굳건히 해야 한다.


⑦ 대화를 할 때 지나친 즐거움, 오만, 흥분, 편견 등으로 지나친 몸짓이나 보기 흉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⑧ 알아차림을 하여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하며 너무 크게 소리내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무례한 우를 범할 수도 있다.


⑨ 만약 교양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역경계에 처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이 상대방의 마음에 잘 이해되고 수용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어 알아차리고 말한다.


⑩ 마음은 발정기에 있는 코끼리와 같이 대상을 찾아 이리 저리 날뛰고 있다. 이 마음을 항상 내적인 고요함[寂定]의 말뚝에 꽉 매어 두어야 한다.


⑪ 매 순간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려야 한다.


⑫ 군중이 많이 운집한 가운데에서도 다른 행동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요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위의 설명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 알아차리는 방법 >


바라지 말고, 얻으려고 하지 말고, 이루려고 하지 말고 알아차린다. 없애려고 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화를 내지 말고 알아차린다. 흐리멍덩하게 하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졸릴 때는 졸음과 싸우지 말고 몸과 마음이 졸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변하는지 알아차린다. 하기 싫을 때는 하기 싫은 마음을 알아차린다. 좋아할 때도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차린다.


따지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어떤 차별도 일으키지 말고 그냥 알아차린다. 복잡하게 알아차리지 않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알아차린다. 없는 것을 알지 말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즐겁고, 편안하고, 고요하게 알아차린다.


대상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되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차린다. 지나치게 힘을 주거나, 너무 집중을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부드럽고 가볍게 알아차린다. 꼭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구속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린다.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리되 확실하게 알아차린다. 조급함이나 무거움이 있지 않게 하고, 예리하고 철저하게 알아차린다. 너무 강하게도 너무 약하게도 하지 말고 강약의 조화를 이루어 알아차린다.


과거나 미래를 알아차리지 말고 언제나 현재를 알아차린다. 주의력 있게 집중을 하되 깊게 하지 말고 순간순간의 찰나를 연속으로 알아차린다. 여러 가지를 옮겨 다니지 말고 하나를 주 대상으로 하되 다른 것이 나타나면 알아차린다.


알아차릴 대상은 언제나 자신의 몸과 마음임을 잊지 않고 항상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 마음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나간 것을 알아차린다. 언제나 결론을 내리지 말고 변화하는 대상을 알아차린다. 이미 내린 결론은 결론을 내린 것을 다시 알아차린다.


처음에는 모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성품을 알아차린다. 다시 성품의 변화를 알고 일어나고 사리지는 생멸(生滅)을 알아차린다. 모든 대상은 무상과 고와 무아임을 알아차린다. 지혜가 나면 지혜가 난 것을 알고, 지혜 때문에 좋아했으면 좋아한 것을 알아차린다.


모든 대상은 무엇이나 오직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다. 알아차림은 항상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려야 할 여러 가지 대상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필요하다.
대상을 알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상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상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알아차린다.


화가 난 것을 아는 것은 알아차림이고,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이 화가 아니라 화를 낸 마음이다. 이때 알아차린 것은 마음이다.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항상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되므로 대상의 근본에 접근을 하는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다.


화를 낼 때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화를 낸 마음의 성품인 빠라마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낸 마음의 성품이 탐심인 것을 알게된다. 어떤 대상이나 그것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원인을 아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면 성품을 아는 것이므로 대상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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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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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해맑은 | 작성시간 03.10.29 고맙습니다. 위빠사나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들어있는것 같습니다. 항상 알아차림이 이어지기를....
  • 작성자simpleY | 작성시간 03.10.31 오랜시간 천천히 뜻을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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