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 부정관과 성욕에 대하여
< 질문 >
다름이 아니고, 사실 이런 질문하기 좀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 봅니다.
부정관 할때요. 몸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보고, 그 탐욕에 대하여 인식을 뿌리 뽑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름답지 않게 볼려해도 잘 안되거든요.
성욕에 뿌리를 뽑기위해 단순히 아름답지 않은 것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더 빠를 것 같지 않을까 하는데 잘 모르겠구요.
사실 재가자로써 수행한다는 것이 이래서 어려운가보다 생각 합니다. 한번 성적인 번뇌에 휘둘리면 몇칠은 수행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예전보다 그 탐심이란 놈이 살고자 더 극성을 부리는 것 같구요. 재가자이면서 수행하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성적인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한 답변 기대해도 될런지요.
무조건 자제하기보단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면서 그런 욕망들을 줄여서 없애 버리면 어떨지요?
< 답변 >
부정관(不淨觀)은 몸의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것을 알아차리는 신념처(身念處) 수행입니다. 먼저 몸의 32가지 부분에 관하여 부정관(不淨觀)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죽은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9단계로 나누어서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수행방법은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전에 있는 수행방법이라고 해서 그냥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경험한 스승에 의해 지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부정관을 하신 스승은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 없이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방법도 중요하고 스승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모두 선업의 공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몸의 집착을 끊기 위해서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초기에 부정관을 하는 비구가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다가 54명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부정관은 특히 경험이 있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현재는 시체가 썩어 가는 과정을 대상으로 수행할 수가 없고 오직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부정관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의 32가지에 대한 부정한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주석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4대를 의지한 이 몸에 발끝에서 위로 머리끝까지 모두 더럽고 부정한 것들로 가득한 머리카락이 있다. 털이 있다. 손톱이 있다. 이빨이 있다,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뇌, 콩팥, 심장, 간, 폐, 비장, 장간막, 대장, 소장, 위,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수지, 침, 콧물, 관절액이 있다, 오줌이 있다고 알아차린다.
이 몸에는 수많은 병균과 병들이 생기는 원인이 되므로 몸(kaaya)이라고 한다. 이 몸에는 어떤 작은 입자만큼이라도 깨끗한 성품은 볼 수가 없다. 사실은 매우 나쁜 냄새와 아름답지 못한 것들뿐이다."
이상 몸의 32가지를 능숙하게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의 일곱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① 입으로 외움 : 몸의 32가지를 순서대로 다섯 가지씩 묶음으로 나누어서 처음에는 차례대로 외우고 다시 거꾸로 외운다.
② 마음으로 외움 : 입으로 외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마음으로도 외워서 가슴에 담아야 한다. 입으로 외우는 것은 마음으로 외우는 것에 도움을 준다. 마음으로 외워 생각하는 것은 부정한 특징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③ 색깔로 구분 : 머리카락촵촵촵등 32가지를 색깔로 구분하여 기억한다.
④ 모양으로 구분 : 머리카락 촵촵촵등 32가지를 모양으로 구분하여 기억한다.
⑤ 방향으로 구분 : 몸의 배꼽에서 위의 부분과 아래 부분으로 구분하여 기억한다.
⑥ 장소로 구분 : 어느 곳쯤에 있는가 장소로 구분하여 기억한다.
⑦ 같은 특성과 다른 특성으로 구분 : 같은 특성으로 구분하는 것과 다른 특성으로 구분한다. 이 무더기를 아래와 위로, 주변으로 같은 성품으로 구분한다.
이상의 수행을 한 뒤에 다음 단계로 능숙한 수행(manasikaara kosalla)을 하는 방법이 10가지가 있습니다.
부정관은 이처럼 복잡한 수행과정을 거쳐서 하는 것이므로 그냥 막연하게 어떤 대상의 더러움을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집중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타 수행방법입니다. 이때는 고요함만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불가피할 경우에 사마타 수행방법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뒤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하여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의 선정을 얻은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의 지혜로 대상을 꿰뚫어 봐야합니다.
성적(性的)인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욕락(五慾樂) 중의 하나입니다. 다섯 가지 욕망은 재산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입니다. 먼저 수행자는 이런 욕망이 있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고 또한 바라야할 대상도 아니고 다만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오욕락이 극복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한 오히려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은 원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것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이고 법(法)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괴롭고, 즐겁고 하지만 이것은 있는 것이므로 오직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느껴질 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욕락을 오진(五塵)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더러움이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앞서 말한 재산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색·성·향·미·촉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 오진(五塵)의 진(塵)은 한문의 티끌 진자로 쓰였지만 이것은 보편적 인식의 개념입니다. 이런 입장은 없애야할 대상으로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 사회의 통념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선업으로 더러운 것이라면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거의 방법이 다릅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므로 법이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학적으로만 여실지견을 말할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오욕락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여실지견입니다.
수행자에게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다시 새로 마음을 내서 게으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알아차린 만큼 힘이 생깁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커져야 수행이 발전합니다.
오욕락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양면의 얼굴을 가진 것입니다. 때로는 필요하고 때로는 해가 됩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수행자는 욕망이냐 아니면 필요한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결국 세상일이 이 두 가지의 선택으로 귀결됩니다. 이때 수행자는 알아차림으로 욕망으로 선택하지 않고 필요해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선업의 마음은 탐진치의 마음으로 항상 욕망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의 이익입니다.
이런 문제는 어디서 특별한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알아차렸는가,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지 일어난 현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알아차렸다고 해서 일시에 되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간에 이런 축적된 성향이 쌓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이 알아차려야 할지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고 없애려고 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알아차리면 결과는 빨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통찰의 힘은 특수합니다. 부처님께서 바로 이것을 알려주어 중생의 번뇌를 해결해 주시려고 출현하신 것입니다.
성적 욕망은 본인이 은연중에 더 바랐거나 아니면 없애려 했거나 모두 결과는 같습니다. 더 불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뿌리를 뽑으려 했을 때는 욕망이 더 활화산처럼 불붙을 수 있습니다. 모든 수행은 바라는 것이 있거나, 없애려 하면 똑같이 더 나쁜 쪽으로 진전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작용은 반드시 반작용을 부르게 되어있습니다. 억제하면 억제한 만큼 더 큰 반발력을 갖습니다.
생명이 있는 31천의 세계에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축생과 인간이 있습니다. 축생의 특징은 성적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성적 본능을 이성적으로 숙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인간이면서 성적으로는 동물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이런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오직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비작용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고 연꽃에 진흙이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이나, 밖에서 부딪쳐오는 오는 자극과 접촉이나, 자연현상계를 이해하는 모든 것을 막론하고 동일한 입장으로 적용해야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끊임 없이 저항합니다. 이것은 역경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어떤 경계에 부딛쳐도 현실을 받아들여서 알아차림을 합니다. 그래서 탐진치의 번뇌를 새로 내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순경계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순응하는 지혜의 단면입니다.
재가자에게는 재가자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때나 알아차림에 의해서 균형을 유지하는 중도입니다. 어느 때나 문제가 생기면 알아차림으로 이 마음은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제외하고 무엇이나 많으면 부족함만 못합니다. 언제나 알아차림에 의해서만 균형이 유지됩니다.
어떤 욕망이 일어날 때는 욕망이 일어난 것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서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지금 내게 이런 욕망이 일어났구나!' 하고 아십시오. 그리고 이 욕망은 누구의 욕망인가, 이 욕망은 영원한 것인가를 알아차리십시오. 욕망의 주인공은 없습니다. 다만 순간의 현상입니다. 모든 감각적 쾌락은 짧은 한 순간의 것입니다. 짧은 한 순간을 알아차렸는가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했는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또한 욕망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됩니다. 욕망을 향유하는 나는 없습니다. 실재 오욕락의 즐거움은 짧은 한 순간의 것이고 그 다음은 불만족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지나치게 탐착하게 될 때는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가슴으로 가서 뛰는 느낌을 주시하십시오. 이때 억제하려고 하면 더 강력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현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으십시오.
가슴으로 갔을 때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전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의 느낌이 미세해 질 때까지 주시해야 합니다. 가슴의 느낌을 오래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알아차려서 사라진 마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고 순간적인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사라진 마음이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대상을 일정기간 분명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가슴에서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 선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상태가 됩니다. 이때 바른 알아차림을 하면 즉시 탐진치가 소멸됩니다. 그러나 이 탐진치의 소멸은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 완전한 소멸은 아라한이 되어야 하므로 누구에게나 잠재적 성향은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일어나는 소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순간적 소멸 ② 일시적 소멸 ③ 완전한 소멸이 있습니다.
순간적 소멸은 알아차린 대상이 알아차리는 순간 소멸됩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매우 짧습니다. 알아차리는 대상도 변화하기 때문이며 알아차리는 마음도 순간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집중이 있어야 소멸의 순간이 지속됩니다.
일시적인 소멸은 순간적 소멸보다 소멸의 상태가 더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 소멸의 상태는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에 의해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의 상태가 되었을 때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탐심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완전한 소멸은 아라한이 되었을 때 탐진치가 완전히 불타버렸기 때문에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것입니다. 성욕의 경우는 아나함이 되어도 소멸됩니다. 그래서 아나함의 도과를 얻으면 가정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습적인 욕망의 번뇌로 인해 세속에서 살게 될 때는 얼마가지 않아 죽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신자 생활을 하거나 출가를 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의 본성입니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영원히 사라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오래 지속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바로 탐진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탐진치를 없애려 하면 더 강해집니다. 여기에 대해 오직 하나이고 가장 적절한 대응이 바로 조건 없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상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알아차림에 의해 생기는 소멸은 순간적 소멸과 일시적 소멸이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소멸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입니다. 알아차린 대상이 사라지지 않고 잠시 뒤로 물러서 있다가 기회를 노려 나타나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 지속시켜야만 소멸도 계속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결과가 아라한의 도과를 얻어 완전한 소멸을 이루게 되며 이때가 되어야 번뇌가 완전하게 제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완전한 소멸의 단계가 올 때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에 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절제를 빨리어로는 위라띠(virati)라고 합니다. 위라띠는 금욕, 금지, 기뻐하는 것에서 벗어남, 끊음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선업의 행이기 때문에 강제하지 않습니다. 항상 현재에 서서 물흐르듯 깨어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면서 흐름을 타는 것입니다.
선업의 행인 마음의 작용에서 말하는 절제는 바른 말, 바른 생계, 바른 행위라는 세 가지를 알아차림으로 절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계는 막아서 보호한다는 절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팔정도의 계에 속하는 바른 말은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며, 바른 생계는 알아차림이 있는 생계를 말하며, 바른 행위는 알아차리면서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정어, 정업, 정명의 세 가지 행위를 함에 있어서 절제의 유형이 있습니다.
① 자연적인 절제 : 나쁜 짓을 저지를 때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나이 등을 고려해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음란한 행위를 했을 때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고 가정이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삼가는 것입니다.
② 계율에 의한 절제 :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5계 또는 8계를 지킴으로써 나쁜 짓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5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스스로 절제가 됩니다.
③ 소멸을 통한 절제 : 출세간의 도에서 감각적 쾌락이 소멸되면 자연스럽게 나쁜 행위에 대한 모든 성향이 소멸됩니다. 이것은 나쁜 행위가 알아차림에 의해서 일어날 근거가 소멸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선업의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 자연적 절제와 계율을 통한 절제는 세간의 방법으로 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방법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선업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빤냐띠(모양, 관념)적입니다.그러나 이것도 알아차림이 있으면 세간의 방법에서 출세간의 방법으로 바뀝니다. 출세간의 방법은 빠라마타(성품,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소멸을 통한 절제는 출세간의 방법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이 소멸은 억제가 아니고 위빠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에 의해 지혜가 성숙되어 끊어지는 단계의 절제입니다. 이것은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때문에 지혜가 성숙되어 법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처음 두 가지에 의한 절제를 기본으로 하여 궁극적으로는 수행을 통한 소멸의 과정을 밟아야 할 것입니다.
주석서에 지혜에 관하여 다음과 말합니다.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떨어지는 벼락이 큰 바위산을 부숴버리듯이, 큰 태풍의 속도로 생긴 산불이 숲을 붙태워버리듯이, 스스로의 빛으로 밝게 빛나는 태양이 어둠을 없애듯이 , 오랜 세월동안 이 몸에 붙어서 이익이 없는 일을 준비하고 만들던 번뇌라는 그물을 수행으로 키운 지혜가 부숴버린다. 그래서 현재 만나게 되는 번뇌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익이라고 지혜수행을 통해 알아야 한다."
언제나 알아차리셔서 지혜의 힘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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