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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 용어 마나시까라 살펴보기

작성자수마나|작성시간09.09.01|조회수486 목록 댓글 0

상좌불교를 접하면서 용어의 혼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혼란의 원인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상좌불교가 전래된 역사가 짧기 때문이고 또 각 단체나 개인이 쓰는 용어가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다른 해석과 용어를 접하는 일반독자들의 경우  교리 이해에 혼선을 초래하기 때문에 상좌불교 용어의 정립과 통일은 어떻게 보면 지금 다른 분들이 하고 있는 빨리경전 번역보다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구구절절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들을 들자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일단 그중에 마나시까라(Manasikara)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초기불교 연구원에서는 이를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번역했습니다. 저도 빨리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는 별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빨리어와 아비담마의 공부가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 용어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말로도 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란 말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정립하기 어려울 뿐더러 또 다시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들이게 됩니다. 결국 여러 사전을 찾아본 결과 이 용어의 우리말 개념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다’라는 용어로 사용 된 듯 합니다. 그리고 한역을 참고한 다른 번역서에서는 ‘작의(作意)’로 나와 있습니다. 작의라....? 뜻을 만든다? 한역투의 용어도 역시 이해가 어려운건 마찬가지 입니다. 옛날의 한역은 수천년의 시차를 둔 지금 중국에서 쓰이는 백화체 중국어와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한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글세대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영어권에서 나온 불교사전과 용어집을 찾아보니 아주 간단명료하게 paying attention, 또는 그냥 attention이라 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미에서 통용되는 이 정의를 참고한다면 마나시까라를 가장 잘 풀이한 우리 말은  ‘주의 기울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빨리어 마나시까라를 어원적으로 분석해보면 마나시까로띠(manasi-karoti)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이 동사는 manas(意, 마음)의 처소격에 √kṛ (to do)를 붙인 것으로‘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빨리어 마나스는 우리의 여섯감각기관중의 하나인 마음을 지칭하는 말입인데 옛날 중국에서는 이 마나스를 의(意)로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컨데 당시 중국에서는 意가 마음(心)을 뜻하는 단어였던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 意는 마음이 아니라 의도, 의향, 뜻의 뉘앙스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의(作意)라는 한자투의 번역을 여과없이 그대로 같다 사용하게 되면 독자들은 마나시까라를 '작심을 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게 되어 마나시까라의 원래 의미와는 더욱 동떨어져버립니다. 한자투의 번역어를 지금 사용하는 것 또한 역사, 문화적 배경과 시대적 흐름을 무시한 아주 무책임한 번역이고 훈고학적인 번역입니다. 

 

아무튼 빨리어 단어를 분석하여 보면 마나시까라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에 만든다'는 뜻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 뭘 마음에 만드냐 하면 대상에 마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마나시까라는 중생의 모든 마음이 일어날때 없어서는 안되는 일곱가지 마음의 작용들중 하나입니다.그 일곱가지 마음의 작용들은 감각접촉(Phassa), 느낌(웨다나, Vedanā), 인식(산냐, Sañña), 의도(쩨따나, Cetanā), 집 중(에깍가따, Ekaggatā), 생명기능(지위따인드리야, Jīvitindriya), 주의기울임(마나시까라, Mānasikara)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잡도리'로 번역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중으로 사전을 들쳐보는 수고를 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영어처럼 간단명료하게 '주의기울임'이라 번역했었다면 독자들이 금방 이해할수 있는데 말입니다.물론 저는 여기서 초기불전연구원의 그간의 역경사업에 대한 공로와 수고를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예에서 보든 상좌불교 용어는 가급적이면 부연설명없이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수 있는 말로 번역해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과거 구태의연한 한자투의 용어도 이제는 지양해야 하고 그렇다고 널리 통용되지 않는 생퉁맞은(?) 한글번역도 지양되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어 용어의 정확한 우리말 정립과 해석이 필요한 경우는 구미에서 이미 이루어진 영어정의와 해석을 두루 참조하는 것이 빨리어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구미권의 빨리어와 상좌불교에 대한 연구는 이미 100년이 넘기 때문에 그러한 서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상좌불교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교계에 만연한 중구난방식의 불교용어를 빨리 통일하고 이들 용어에 대한 대중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우리도 서양 나냐띨로까스님의 <Buddhist dictionary>처럼 가칭<상좌불교용어전문사전>이나 <빨리어-한글 소사전>과 같은 Manual Book이 우리말로 나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기회에는 마음의 작용이라 번역하는 쩨따시까(cetasika)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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